시몬 나베흐의 오독


혹시 이번에는 wkchoi44님께서  이스라엘의 군사이론가이자 풀러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몬 나베흐의 해석을 빌려오려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wkchoi44님께서는 나베흐의 저서 In Pursuit of Military Excellence: The Evolution of Operational Theory를 참고문헌으로 하셨는데 나베흐는 오스트리아의 학자 루드비히 베르탈란피의 시스템 이론(System Theory)를 군사 해석에 적용하여  투하쳅스키가 유럽 군사사상을 지배하던 섬멸 전투 개념을 시스템적 붕괴의 작전술적 충격(Удар) 발상으로 대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1 나베흐는 전간기 소련군 이론가들이 시스템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소련군의 종심 작전은 적의 시스템에 '작전술적 충격'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고 작전술적 충격을 "적의 시스템의 원리를 적의 사령부를 시스템에서 제거하여서 무너트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풀러가 1919년부터 규정한 적의 "사고의 중심"을 공격해 "와해의 탄막"을 만들어서 적을 더 쉽게 서서히 섬멸한다는 내용과 같았습니다.2


그러나 나베흐는 여러가지 무리수를 범했습니다. 베르탈란피의 시스템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야 나타난 것이고 베르탈란피는 1968년까지 시스템 이론이라는 용어 자체를 쓴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군의 행동을 시스템 이론에 따른 '작전술적 충격'으로 해석하는 건 지나친 해석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3 그리고 소련군의 용어 '충격군'이나 '충격 집단'의 용어 '충격'은 심리적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군사 백과사전에 따르면 '충격 집단'은 "공세에서 주요 공격을 하거나 방어에서 반격을 수행하는 보병 전투 제대의 요소를 기술하는 역사 용어"였습니다. 소련군의 충격군은 제병협동 제대로 적의 방어를 돌파하고 돌파를 적의 방어 구역 전체로 확대시키는 제대였습니다. 충격군이 돌파구를 확보하고 적 방어 구역 너머로 교두보를 형성하면, 기동 집단이 돌파구로 들어가 전과를 확대시키는 작전 목표로 들어가는 방식이 소련군 종심 작전의 일반적인 형태였습니다.4 나베흐는 용어 '충격'의 의미에 집착해 꿈보다 해몽격인 해석을 한 셈입니다. 나베흐를 비판한 미 해군대학 교수 밀란 베고는 "소련군의 종심 작전 이론은 소련군이 시스템적 붕괴를 위해 사용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이론과 실제에서 붕괴는 단지 섬멸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지 섬멸을 대체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로 정리했고 "소련군은 시스템 이론의 용어를 자신들의 작전술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저작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소련군의 작전술에 대한 접근은 체계적(systematic)이었지만 시스템적(systemic)이지 않았다."고 명확히 하며 나베흐의 해석을 비판했습니다.5


그런 고로 나베흐의 해석도 상당히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군의 영향?


혹여 이번에는 소련군이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까지 라팔로 조약을 통해 진행한 독일군, 당시는 바이마르 공화국군과의 군사교류를 논거의 증거로 말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교류를 통해 풀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되어 온 하인츠 구데리안 등의 독일군 기갑 장교들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준 것처럼 오랫동안 서술되어 왔습니다.6 그 때문에 소련군이 독일군을 통해 간접적으로 풀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겁니다. 당시의 군사교류에 대해서는 제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분야라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소련군이 바이마르 공화국군과 교류하기 전인 내전과 그 직후부터 전차를 어떻게 전술적으로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적용이 있었습니다. 적백내전 때 붉은 군대는 백군과 폴란드군이 영국군과 프랑스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전차를 대적했으며 그 전차들을 노획해 사용하였고 노획한 전차들을 어떻게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할 것인지 연구하고 논의했으며, 기갑 부대 총감부가 설립되어 기갑 부대 양성과 운용을 담당했고 거기서 전차가 장차전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논의했고 또 전차 부대를 위한 교범까지 만들었습니다. 이 때는 소련에 풀러의 책 『대전쟁에서의 전차』가 들어오기 이전이었고 마찬가지로 독일과의 군사교류가 시작된 시기보다 이전이었습니다.7


여기에 대해서 이미 콘돌리자 라이스는 논문 "소련 전략 만들기"(Making of Soviet Strategy)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과의 협력이 소련 군사사상에 미친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소련 군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새로운 군사 발전에 관한 외국의 문건을 읽을 때는 주의를 했다. 예컨데 풀러의 전차에 관한 전술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때가 1923년이었고, 그것은 영국에서 출간된지 3년 후였다. 소련군의 기갑 잘전을 연구한 자들에 의하면 전차 배비에 관한 해답을 특히 독일 등의 사상에서 참고하기는 했지만 다른 국가의 문제들보다는 실제로 앞선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사상은  그들의 특별한 문제점들을 위한 근본적으로 토착적인 해결책으로 보여진다."8 그런데 참고문헌으로 라이스의 이 글도 있음에도(21쪽) 어째서 이 부분은 보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데리안이 풀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내 관심을 일깨우고 상상력을 자극한 자류는 주로 영국의 풀러, 리델 하트, 마텔이 쓴 저서와 논문들이었다. 선견지명이 있던 이 군인들은 당시에 이미 전차를 보병의 보조 무기 역할을 뛰어넘어 다양하게 활용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전차를 우리 시대에 태동하고 있는 군 차량화의 중심에 배치했고, 그로써 대규모로 진행되는 새로운 용병술의 선구자가 되었다."라고 쓴 건 사실입니다.9 그러나 구데리안은 전간기 독일군 기갑부대 발전에 대해 한국어판 기준으로 22쪽에서 64쪽을 할당하고 있는데 풀러와 리델 하트에 대한 언급은 단 한쪽에 불과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구데리안이 전적으로 풀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0


그리고 소련군이 독일군에서 배워간 게 있다면, 그것은 풀러의 전략적 마비가 아닌 전통적인 포위섬멸(Kesselshlacht)에 대한 강조였을 겁니다. 구데리안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적 사령부나 통신선의 장악을 통한 적의 마비를 직접적으로 의도했다는 주장은 사실 1940년의 프랑스 전역에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풀러는 거기에서 나온 결과만 가지고 독일군이 마비를 의도했다고 해석했지만 현재 독일군의 자료들을 보면 전혀 그렇제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군사사상가 J. F. C. 풀러 소장은 1940년의 전투를 "제2의 스당 전투"라고 언급하며 스당 주변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중요성과 결정적인 성격을 인정하였다. 그의 군사고전에서 전격전의 기본을 '마비에 의한 공격'이라 주장한 풀러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PLAN 1919'를 발전시켰다. 물론 독일군이 '날카롭고, 신속한 단기전'을 추구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풀러의 주장처럼 "마비에 의한 공격"을 신봉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 이론가들이 전쟁 이후에 부석한 전격전 개념이 독일군 고위 지도층 사이에 회자하였다 할지라도 구데리안이나 혹은 만슈타인과 같은 소수 장교들만이 이를 수용했을 것이다. 5월 17일, 구데리안의 해임으로 귀결된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이 첨예한 논쟁은 제19 기갑군단의 전진 속도와 취약성에 대한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걱정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독일군의 계획 발전 과정은 아르덴느를 돌파하는 거대한 팔랑크스의 목적이 전통적인 포위섬멸전략(Kesselshlacht)임을 시사했다. 물론 무기체계가 현저히 달랐지만 기본 개념은 울룸 전투(1805년), 스당 전투(1870년), 또는 탄넨베르크 전투(1914년)에서 사용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일군이 5월 16일 아침에 프랑스군 방어선을 돌파했을 때 그들은 -풀러가 말한 바와 같이- "곧바로" 사단, 군단, 야전군 지휘소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대신 독일군은 과거 기병대가 비슷한 수많은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영불해협을 향해 서쪽으로 내달았다.

 

한편, 풀러는 '독일 육군이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의 엄호를 받는 강철 공성추로 적을 난타하여 연속적인 방어선의 선택적 지점에서 돌파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제19 기갑군단, 제41 기갑군단, 제15 기갑군단이 선도부대로서 아르덴느를 돌파하는 동안 연합군의 가장 강력한 저항(보당주, '글레르의 버섯', 방드레스, 라 호른, 부벨몽)은 포병과 전차의 지원을 받는 보병이 격렬한 전투로써 극복하였다. 제19기갑군단의 전차가 '공성추' 역할을 한 경우는 벨기에에서 상대적으로 빈약한 프랑스 엄호부대를 압도했을 뿐이었다. 1940년이 한참 지난 후까지도 스당에서의 보병의 중요한 공헌과 보병과 전차의 협동작전에 대한 믿음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11


여기서 나타난 바와 같이 독일군이 정말 풀러의 전략적 마비 사상을 받아들였다면, 실제 그러할 의도로 적의 "두뇌"를 먼저 타격했어야 했는데 독일군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독일군이 전략적 마비를 사용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 중에서 『부대지휘』(Truppenfuhrung)같은 독일군의 교범을 직접 읽어보고 주장하는 사람은 최소한 국내에는 없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소련군 또한 적의 마비 가능성은 일찍히 부정했고 오직 적의 섬멸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시행된 소련군의 모든 공세 작전의 목표는 하나같이 적의 "두뇌"가 아닌 중요한 지점의 확보나 적의 포위 및 섬멸이었습니다. 1941년 12월에서 1942년 2월까지 진행된 모스크바 반격 작전, 1942년 11월에 시행한 스탈린그라드 반격 작전, 1943년 7월에 쿠르스크 전투 직후에 시행한 쿠투조프 작전과 류먄체프 작전, 1944년 1월에 시행한 코르순-솁첸콥스키 작전, 1944년 6월에 시행한 바그라치온 작전, 7월에 시행한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8월에 시행한 야시-키시네프 작전, 1945년 1월에 시행한 비슬라-오데르 작전, 1945년 4월에 시행한 베를린 작전, 그리고 1945년 8월에 시행한 만주 작전 모두 적의 섬멸 자체가 목적이었지 적의 의지를 꺾거나 적의 사령부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12


이러한 이미 1920년대부터 굳어진 적의 물리적 섬멸에 대한 강조는 실제 전쟁 경험으로 더욱 굳어졌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작전기동군은 마비 이론이었나?


이런 맥락에서 소련군이 냉전기에 운용했다는 작전기동군 개념이 적의 마비를 유도한다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 전에 잠시 작전기동군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이미 논문에도 쓰셨지만(2쪽) 작전기동군은 소련군의 공식 용어가 아닙니다. 사실 이 용어는 폴란드군의 공식 용어인 Operacyjna Grupa Manewrowa이고 소련군에서 이걸 공식적으로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소련군은 전쟁 전이나 냉전 시기나 계속 '기동 집단'용어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13 실제 서방에서 최초로 작전기동군 개념을 소개한 크리스토퍼 도넬리의 글도 소련군보다는 폴란드군의 논문에서 그러한 개념을 추출했습니다.14 여기의 문제는 서구의 연구자들이나 우리의 연구자들이나 소련의 1차 자료를 보지 않고 거의 도넬리의 글에만 의존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 또한 그러한 자료를 볼 수가 없다는게 제 한계입니다. 


어찌 되었던 간에 wkchoi44님께서는 주로 박기련의 논문을 토대로 작전기동군이 "전투를 최소화하고 적의 본격적인 작전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 전투력의 마비를 추구하는 바 풀러의 마비전 사상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46쪽)라고 쓰셨습니다. 박기련은 스탈린 사후 부터 1970년대 말의 소련군의 핵전쟁 지양과 재래식 전력을 통한 기동전을 강조하는 배경의 전개와 작전기동군이 2차 대전기의 기동 집단(=기동군) 개념의 부활이라는 점 대해서는 다양한 문건들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박기련, pp. 186-200. Donnelly, 53-55에서는 기동 집단이 어째서 냉전기 소련군의 기동 방법이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기련의 글은 작전기동군을 논하며 처음부터 오독을 하고 있습니다. 박기련은 "그러나(OMG와 본질적으로 같은 논의가 최초로 1981년 폴란드군 대령 원트루키(Wontruki, 표준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본트루키'로 읽는 게 맞습니다.)의 한 논문에 나타났다. 이 논문는 미국의 적극적 방어에 대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대응책을 논한 것인데, 바르샤바 조약군은 6내지 9대 1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나토군을 마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라고 썼습니다. 본트루키가 그러한 글을 쓴 건 맞습니다. 하지만 본트루키는, 최소한 도넬리가 인용한 부분에서 '나토의 방어를 마비' 시킨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본트루키가 제시한 수치는 6:1에서 9:1이 아니라 2:1에서 3:1이었습니다.15  이건 심각한 오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기련과 마찬가지로 김명균 또한 똑같은 오독을 범하고 있습니다. 16



박기련의 논문을 포함한 논문들에서 작전기동군이 마비 개념이라고 명확하게 쓴 해외 문건은 아마 C. J. 딕(Dick)의 논문 "Soviet OMG: A Closer Look"일 겁니다.17 제가 부족하여 C. J. 딕이 <International Defence Review>의 1983년 7월호에 쓴 건 구하지 못했습니다. 박기련이 인용한 일본의 히라이 켄이치의 논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작전기동군의 모태가 기동 집단이고 기동 집단의 운용 바탕이 적의 섬멸에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딕와 켄이치의 해석은 아무레도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제까지 이념적, 실제적인 이유로 부정해 왔던 풀러의 전략적 마비를 갑작스럽게 군에 도입시킨다는 발상은 소련군에서 생각하기가 힘든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소련군이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과거의 관점을 수정하고 전략적 마비를 목표로 한 기동전 방법을 적용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폴란드군의 미할라크부터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행군집단(주: 작전기동군을 말함)과 습격 분견대는 본대와 밀접히 공조하더라도 본대에서부터 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서 임무를 수행하며 항상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부대는 적이 핵미사일 기지, 지휘소, 전자전 장비와 방공 무기를 파괴하는게 주 목적이다. 행군집단과 습격 분견대는 적의 후퇴를 차단하고, 적의 예비대가 후방 지역에서 전선으로 오지 못하게 방해하고, 적의 보급 체계를 마비시키고, 중요한 지역과 목표를 본대가 접근할 때 까지 점령하는데도 운용될 수 있다."18


즉, 작전기동군의 운용 목표는 기동 집단과 달리 적 핵무기 시설 지휘통제 시설이 추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목표가 적 예비대 투입의 방지와 적 후퇴 방지 및 중요한 지역과 목표의 점령이라는, 명백히 적의 포위와 섬멸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는 중간 목표라는 점은 딱히 변한게 없다는 겁니다. 되려 소련군이 냉전기에 주된 섬멸 수단을 핵무기로 보았고, 또한 적의 섬멸 수단인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섬멸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석한다면, 이제까지의 소련군의 섬멸 강조를 볼 때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 관계로 J. A. 잉글리시가 작전기동군이 풀러의 Plan 1919와 비슷하다고 주장한 건 결국 소련군의 발전 과정을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 잘못된 해석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 Milan N. Vego, “A Case against Systemic Operational Design,” Joint Forces Quarterly, No. 2, 2009, pp. 71.
  2. Kelly and Brennan, p. 57.
  3. Vego, op.cit.
  4. 충격 집단의 운용에 대해서는 B. Petrov, "On Certain Trends in Creating and Employing Assault Groupings from the Experience of Front Offensive Operations in the Great Patriotic War", VIZh no. 11 (November, 1983), pp. 1-11를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5. Vego, op. cit.
  6. 박기련, p. 154-155
  7. 내전과 그 직후의 소련군 전차 전술 발전에 대해서는 Habeck, Storm of Steel, p. 8-18;27-35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8. Condoleezza Rice,“The Making of Soviet Strategy,”Peter Paret ed.,Makers of Modern Strategy from Machiavilli to theNuclear Age (Princeton, N.J.:Princeton Univ.Press,1986), 국방대학원 역, 『現代戰略思想家 : 마키아벨리부터 核時代까지』,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 p. 919.
  9. Heinz Guderian, Erinnerungen eines Soldaten, (Motorbuch, Auflage: 1994), 이수영 역 『한 군인의 회상』, 길찾기, 2014, p.24
  10. 최근 연구는 구데리안의 독일 기갑부대 육성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헤이백이 이제까지의 연구들을 종합한 것에 따르면, 독일군 기갑 교리와 편제는 구데리안 단독의 작품이 아니며 구데리안 이전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에른스트 폴크하임, 알프레트 폰 폴라르트-보켈베르크, 오토 폰 슈튈프나겔, 오스발트 루츠 등의 공동된 노력이고, 또한 구데리안이 기갑 교리를 만들 때 실제 독일군은 대규모 기갑 부대 양성에 익숙해져 있어서 구데리안이 딱히 반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Habeck, pp. xii-xv)
  11. Robert A. Doughty, Breaking Point, The: Sedan and the Fall of France, 1940, (New York, Archon: 1990), 나동욱 역, 『전격전: 프랑스 패망과 거짓 신화의 시작』, 황금알, 2012, pp. 384-385.
  12. 러시아군 참모대학의 1995년 교재인 Военное искусство во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е и в послевоенный период (стратегия и оперативное искусство): Учебник. (М.: ВАГШ, 1995), 국방대학원 역, 『러시아 연방군의 전략과 작전술』,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 제1권, 1998의 pp. 296-338; 363~388을 봐 주시길 바랍니다. David M. Glantz and Jonathan M. House,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the Hitler, (Kansas: University of Kansas Press, 1995), 권도승 외 3인 역, 『독소전쟁사』, 열린책들, 2007도 봐 주시길 바랍니다.
  13. Chris Bellamy, "Antecedents of the modern Soviet operational manoeuvre group (OMG)", The RUSI Journal Volume 129, Issue 3, 1984, p. 50.
  14. Christopher Donelly: O.M.G.: The New Challenge of NATO, Military Review (March, 1983), p.47-58.
  15. Donelly, p. 47-48
  16. 김명균, p. 35.
  17. Ibid., p. 35
  18. Major Wojeiech Michalak, "Aviation Raid and Maneuver Operations of the Ground Forces" Air Force and Air Defense Reiew, February 1982, Donelly, p. 5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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