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의 전체적인 풀러 비판


지난번에 투하쳅스키, 트리안다필로프, 이세르손은 풀러를 받아들이자고 말하거나 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커녕 그를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군국주의자 등으로 비판하고 풀러의 소수 정예 군대론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했으며 그의 전차에 대한 선호를 제병협동에 대한 경시라고 비판한 걸 다뤘습니다. 이걸로 wkchoi44님 등의 논문에서 제시한 투하쳅스키가 풀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논거의 근거 자료들은 거의 무너졌습니다.


여기서 저는 전간기부터 냉전 시기까지 이들 이외에 소련군의 인물들이 풀러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실 투하쳅스키의 비판 이전에 소련군의 인물들은 풀러를 비교적 다양하게 바라봤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의견은 풀러가 장차전에서 전차와 다른 기술적 수단들의 운용을 지나치게 크게 보았다고 한 비판적인 평가가 강했었습니다1 풀러를 소련에서 최초로 독해하고 비판한 인물은 프룬제 군사대학의 강사였던 블라디미르 리슈인츠키(Владимир Лищинский)였습니다. 리슈인츠키는 풀러가 꿈꾼 이상적인 군대를 비판했고, 전차가 보병과 포병을 교체할 거라는 보병을 계속해서 "전장의 여왕"이라는 상투어로 수식하는 걸 자주 반복하며 끝을 맺었습니다.2


N. 레세비츠키(Лесовички)란 저자는 풀러의 저작 "후방 방위 작전에서 전차의 역할"(The Role of Tanks in Rear Guard Operations"을 간단시 소개하며 이걸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풀러의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장차전에서 전차에 대한 몇몇 관념은 시행 중이고 전차는 모든 행동 이후마다 분해되어 정비될 필요는 없고 전투에서 모든 타격 중량을 운용하는 가장 복잡한 기동에 적합하다."라고 평했습니다.3 S. 비시네프(Вишнев)의 경우 『전쟁의 개혁』을 비평하면서 미래의 전쟁과 군대에 대한 풀러의 주장들을 비평하며 이들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4


풀러에 대한 평가는 1930년대 초에 소련군 내에서도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이 생겨나면서 다소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프룬제 군사대학의 강사이고 기갑 전술에 대한 표준 교범을 저술한 암모소프(Аммосов) 같은 몇몇 저자들은 풀러가 그의 극단적인 "전차주의적" 관점을 교정했으니 이제 이 영국 이론가에게 완전히 동이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풀러가 몇 부문에서 전차가 다른 군종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계화된 부대들은 강력한 타격력 뿐만 아니라 방어 능력도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5


1933년 3월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신원미상의 한 강사가 1933년 3월의 한 강의에서 신원미상의 한 강사가 풀러에게 큰 찬사를 바쳤습니다. 그는 풀러의 1919년 계획을 "적 진지의 깊은 종심을 동시에 타격한다는 최초의 계획"이라고 불렀고 풀러가 종심 전투처럼 고속 전차가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돌파해 들어가는 동안 다른 전차들은 포병 및 보병과 함께 정면을 공격한다고 예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강사는 풀러의 사상의 발전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풀러의 소규모 군대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풀러를 "기계화의 이념가 (중력)  기계화군에 대해 최초로 진전한 인물이며 적을 적 진지의 깊은 종심에서 파괴하는 문제를 고려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바쳤습니다. 이 강사는 풀러의 비정규군 운용과 군을 공세에 운용되는 "전차군"과 방어에 운용되는 "대전차군"으로 분류한 발상을 "흥미롭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강사는 강의의 끝에서 풀러의 기계화군을 "영국 제국주의의 신속타격군"으로 보았지만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발상은 그 자체가 이러한 작전의 기반으로 행동(기동)에서 정련되고 시험되기에 알맞다. 이러한 발상은 전선에서 후방 종심에 이르는 적의 전체 진지에 대한 종심 타격을 가할 필요를를 특성으로 하는 마지막 작업이 가치있게 하는 지도 원칙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독립적인 기계화 전력의 행동은 전체 군대(풀러의 용어로는 "점령 군대")와 함께 조정하여 실시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공군의 더 종심 깊은 활동과 함께 해야 한다."6



여기까지만 보면 "보라, 소련군에서도 풀러를 진지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시며 풀러가 소련군에 영향을 줬다는 근거로 사용하시고 싶어할지도 모르시겠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시네프와 암모소프와 저 신원미상의 강사 모두 소련군의 주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소련군의 핵심 인사들은 투하쳅스키 등의 풀러 비판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의 측근이자 소련의 국방 인민 위원회 위원장 겸 혁명 군사 위원회 의장이었던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는 1932년 10월 말에 열린 혁명 군사 위원회 확대 회의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여기에 극단적인 의견이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붉은 군대에서도 차량화-기계화 부대가 미래 군대의 초기 형태고 모든 군종을 전부 대체할거라는 발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로실로프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건 완전한 풀러주의입니다. 이런 이론은 제가 보기에 붉은 군대에서 받아들일 수 없고 이런 이론을 대중화시켜서도 안됩니다. 이 이론은 붉은 군대를 위한 이론도 아니고 소비에트 연방을 위한 이론도 아니며 지구의 땅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를 위한 이론도 아닙니다. 우리의 국경선은 매우 넓으며 지리, 기후, 인종, 기타 다른 특성들이 극도로 다양합니다. 풀러주의의 단순화는 이전의 모든 군종들을 심각하게 축소시키거나 불필요한 실험들을 위한 의문시되는 일련의 소비를 이끌 겁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우리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겁니다. 그래서 풀러의 이론이 우리에게 알맞지 않고 해악만 가져온다는 겁니다."7


스탈린의 측근이자 당시 소련군 명령계통의 최상위에 있는 보로실로프가 이렇게 말한 이상, 소련군에서 풀러를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인물은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투하쳅스키는 1933년에 쓴 책에서 1930년과 같은 맥락에서 풀러를 비판했습니다. 


"만약 파시스트들이 평시에 기계화군을 거의 신뢰할 수 있는 군대로 여긴다면, 전시에 기계화군은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전선에 있는 기계 하나하나는 후방(기지, 야전 정비소 등)에 있는 수백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전차나 기계화 부대의 전투 능력은 지휘 전차보다는 후방에 있는 수십에서 수백명의 인민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한 계산은 전투 차량이 인력과 대치된다고 보는 풀러에게 기반하고 있다. 이게 풀러의 이론이 가진 가장 큰 모순이고 풀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평시에 노동 계급이 부르주아의 기계들과 다른 적대적 산업들의 안전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전시에 노동 계급은 그러한 무기들을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기에 알맞은 상태에 있을 것이다."8


이러한 풀러에 대한 비판은 S. N. 크라실니코프(Красильников)의 책에서 더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크라실니코프는 보병 없이는 기갑 부대를 "관리할 수 없으며" 기갑 부대는 방어전을 수행할 수 없고, 전차는 야간에는 실제로 도움이 안되며, 특정한 지형에서는 전차가 도움이 안된다고 풀러를 비판했습니다.9 크라실니코프는 보병이 없는 "풀러식의" 부대는 차량화 사단과 기계화 사단 같이 보병과 기병의 대규모 제병협동 제대에 있어야 하며 풀러식의 기계화 부대는 소비에트의 전쟁 전구 특성에 알맞지 않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종류의 부대는 풀러가 '보병 구역'이라고 부른 기계가 보병의 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든 통로(요새, 늪지대, 강둑 등)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10


이와 같은 비판이 소련군이 풀러를 보는 주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조류 하에서 풀러의 '전략적 마비'이론이 소련군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혹여 여기까지 보시고 미국 육군 중령 S. L. A. 마셜이 풀러의 책 『기계화전』의 1943년판에 쓴 서문의 이 대목에 기댈려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한 고위급 러시아 장교가 나에게 말하기를 독일이 러시아를 공격하기 전에 티모셴코 원수가 모든 장교에게 (풀러의) 『야전교범 제3권』을 붉은 군대의 탁상용 서적으로 삼아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항상 참고서로 이용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듀헤의 『제공권』만이 이 범주에 속하는 서적이라고 말했다."11


박기련과 류재갑 또한 마셜의 이 글이 소련군이 풀러를 받아들였다는 근거라고 보고 있습니다.12 그런데 위에서 보여드렸던 풀러에 대한 소련군의 공통된 비난 분위기와 또 스탈린의 대숙청 이후 더 경직된 군과 사회의 분위기 하에서 서방 이론가의 글을 당시 소련군의 국방 인민 위원인 티모셴코가 읽게 했다고 보는 게 정말로 자연스럽다고 보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셜의 저 발언은 소련 측 문건을 사용해서 정말 티모셴코가 그랬는지, 그리고 저 "한 고위급 러시아 장교"가 누구인지는 교차검증을 해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저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저 소련 장교가 동맹국 군대의 군사이론가에 대한 립 서비스를 한 것에 불과한지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미 전간기에 공고히 된 인식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1965년에 소련군의 전간기 전략과 작전술 선집의 서문을 쓴 소련군 총참모장 마트베이 바실리예비치 자하로프 원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풀러와 듀헤는 전차와 항공기의 대규모 제대가 장차전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정확히 봤지만 전차와 항공기가 전쟁에서 결정적인 결과를 할 수 있고 전차 등 신무기 체계의 독자적인 작전만으로 전쟁을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다는 완전히 잘못된 가정을 했다."13


1966년에 소련군의 군사사학자인 파블렌코 소장은 풀러를 이렇게만 봤습니다. "이 시기에 자동화기는 더욱 발전되었고 포병 화력의 사거리가 증가했으며 전차, 항공기, 통신 장비, 수송 장비의 질적 향상이 일어났다. 군사과학 사상은 이 경향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전에도 항상 비슷한 상황이 있었듯이 몇몇은 미래 전장에서 향상된 전투 수단의 영향을 과대평가했고 반면 다른 몇몇은 이런 수단 변화를 과소평가했다.몇몇 외국 이론가들(풀러, 젝트, 졸단 등)은 수백만 병사의 군대에서 순전히 악몽만을 보았다. 그들은 규모가 작지만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군대를 꿈꿨다."14


1972년에 바실리 예프레모비치 사브킨 소장은 저서 『작전술과 전술의 기본적 원칙들』에서 풀러의 책 『대전쟁에서의 전차, 1914-1918』을 비평하며 같은 맥락으로 풀러를 비판했습니다.


"풀러의 이론이 가진 가장 큰 결점은 인력의 역할과 군사과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장비가 전쟁에서 가지는 역할을 과대평가했다는 점이었다. 풀러는 이렇게 썼다. '화포나 무기는 만약 투입이 필요한 상황을 만나면 승리의 99%를 차지한다. 전략, 지휘, 통제, 용기, 군기, 보급, 조직, 그리고 모든 정신 및 육체적 부속품은 무기의 우위에서 비하면 최상의 경우에도 승리에서 1%만 차지한다.'"15


하지만 사브킨은 그 뒤에 풀러를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처럼 보이는 서술을 했습니다.


"풀러는 군사술의 원칙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풀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노력의 다른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과학적 기반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 풀러는 전쟁을 '과학적 원칙에 기반한 지식의 체계'로 축소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풀러의 군사과학 발전에 대한 인식은 주목할 만 하다. 풀러는 군사과학이 위에서 언급한 매우 작은 역할만 한다며 군사과학을 수정하려고 싸우면서도 그걸 '인류의 발전과 함께 발전되어야 할 살아있거나 역동적인 과학'이라고 믿었다."16


그러나 사브킨은 결국 위의 글을 통해 "풀러는 군사술의 원칙의 발전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7 박기련은 논문에서 사브킨의 책을 통해 이세르손을 재인용하여 종심 작전을 설명하면서도 사브킨이 풀러를 이렇게 평가한 것을 보지 않은 취사선택을 범했었습니다.18


자, 이게 소련군의 주요 인물들이 풀러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나열입니다. 정리해 보면, 소련군의 주류는 풀러의 기계화된 소수 정예론과 인간에 대한 기계의 우위를 자신들의 군사이론에 따라 계속해서 비난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소련군의 종심 작전 이론이 풀러의 영향 아래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정말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1. Mary R. Hay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p.46
  2. "Problema makhanicheskogo vedeniia voiny," Tekhnika i snabzhenie Krasnoi armii, Bronevoe delo, no. 7(1922): 29-38, esp. 36-37., Haybeck, p. 46에서 재인용.
  3. N. Lesevichkii, "The Journal of the Roal Artillery," Voina i Revoliutsiia, no.6(October 1925): 203, Ibid에서 재인용.
  4. S. Vishnev, "Fuller: Preorazovanie voiny," ibid., no.1 (January-Feburary 1925): 283, ibid., p.47에서 재인용.
  5. S. Ammosov, Taktika mtomekhsoedinenii, 2d ed. (Moscow: Gosudarstvennoe Voeenoe Izdatel'stvo, 1932), 15-16, ibid., p. 172에서 재인용.
  6. Tezisy k dokaladu: 'Mekhvoiska i glubokaia taktika,'" addressed to Stoinov, 31 March 1933, RGVA, f. 31811, op. 2, d. 183, l,130-37, Ibid., p. 172-173에서 재인용.
  7. Stenograficheskii otchet rasshirennoe zasedanie RVS SSSR," 20-25 October 1932, RGVA, f. 4, op.18, d. 39, l. 139, Ibid., p. 173-174에서 재인용
  8. ТАУ "Моторизация и механизация армийи война",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ВО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МОСКВА, 1933) p. 125. 여기서 ТАУ는 투하쳅스키를 말합니다.
  9. S. N. Krasil'nikov, Organizatsiia krupnykh obshchevoiskovykh soedinenii (Proshedshee, nastoiashchee i budushchee)(Moscow: OGIZ-Gosudarstvennoe voennoe izdatel'stvo, 1933), 275, Haybeck, p. 175에서 재인용.
  10. Ibid., 265; 276-82, Haybeck, p. 175에서 재인용.
  11. J. F. C. Fuller, Armored Warfare, 최완규 역, 『기계화전』, 책세상, 1999, p. 11.
  12. 박기련, p. 153; 류재갑, p .110
  13. M. V. Zakharov, "Voprosy strategit i operativnogo iskusstva v sovetskikh uoyennykh trudakh (1917-1940) 
    (Moscow: Voyennoye lzdatel'stvo Ministerstva Oborony SSSR, 1965)." in Orenstein, "Sellected Reading...", p. 64.
  14. N. Pavlenko, "Nekotorvye voprosy razvitiya teorii strategii v 20-kh godakh," Voyenno-istorzcheskiy zhurnal [Military-historical
    Iurnall, 5 (May 1966), pp. 10-27, in Orenstein, "Sellected Reading...", p. 71.
  15. V. Ye. Savkin, The Basic Principles of Operational Art and Tactics, (Honolulu: University Press of the Pacific, 2002), p. 47
  16. Ibid.
  17. Ibid.
  18. 박기련, 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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