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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의 소비에트 군 역공

역사적 사건들 중에서, 시간이 힘을 가지지 못한, 모스크바에서의 역공이 일어난 모스크바 전투에 속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우리 국가의 존망 문제가 달려있던 잔인한 1941년 가을의 나날들에서, 이에 대한 해답은 모스크바가 나치 독일군에 대항하여 모스크바가 견디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그의 차량화 및 군 군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란 것을 몰랐고, 진격로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휩쓸었고, 전략적 전선을 돌파했으며, 뱌즈마 및 브랸스크에서 3개 소비에트 전선의 상당한 병력을 포위하였고, 모스크바로 돌진하였다. 이 드라마틱한 무대에서,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때 단지 적 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동료들 또한, 모스크바의 운명 예단과, 이의 추락은 ─ 향후 수 일 후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우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의 수호자들은 모스크바 및 모스크바근교 거주민들과 협동하여, 영웅적으로 적과 싸웠고, 도시를 요새로 탈바꿈시켰다. 그들은 모든 전선에서, 적 후방 포위망에 갇혀서, 수도의 창공에서 밤낮으로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다. 고집스런 방위 위치 고수, 반격 및 역습, 새로운 예비의 투입과 적 세력을 소진시키는 공중에서의 타격이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수도의 교외까지 접근하였을 때 이미 거리의 사람들을 쌍안경으로 볼 수 있었다...


소비에트 군의 방위에서 역공으로의전환

역공을 준비하는 소비에트 사령부는, 적으로부터 그들의 의도를 은폐할 수 있는 모든 가망성을 모색하였다. 전선의 작전 계획은 극히 제한된 범위의 사람들만이 시행했으며, 전투 문서는 전선 참모장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되었다. 군 사령관은 직접적으로 "공세로의 전환은 오직 군사 회의 및 참모장에게만 전파되어야 함. 실행자는 이와 관련된 부대에 명령을 하달할 것." 이라 경고했다. 임박한 역공에 대해 기술적 종류의 통신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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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적들로부터 이러한 대규모의 군 재편성을 완전히 숨기는 것은 가능성이 낮았다. 실제로, 노획 혹은 기타 문서에서 증명되는 바와 같이, 독일 측에서 요원, 공중 및 기타 정찰 수단으로 획득한 소식은, 그들이 붉은 군대의 배치 및 그들 사령부의 구상에 대해 상대적으로 완전한 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하였다. 보고에서는 러시아의 주력이 모스크바 북부 및 남부에서 진격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보고의 불안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령부 측은 적절한 평가를 수신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러시아가 아직 전투에 주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그들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모스크바에 새로운 부대의 출현 사실은 수동적에서 적극적으로 독일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한 통상적인 군 재편성으로 간주되었다. 12월 4일 "중부" 집단군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육군원수는 이러한 정찰 보고서 중 하나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였다: "...적의 전투 가망성은 그들의 거대한 지금 역공을 시작할 만큼 거대하지 않다...".

독일 사령부는 소비에트 군 저항 노력과 그들의 적극성 증가에 눈을 감았다. 병력 구성 소진, 가장 중요한 기상 조건으로만, 야흐로마, 코빈카, 나로-포민스크, 카시라, 풀라 및 기타 구획에 내던져진 독일군이 역습에 버티지 못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12월 5일 새벽 소비에트 군의 거대한 역공 전환의 불가능성에 대한 폰 보크 육군원수의 예측과 반대로, 칼리닌 전선 좌익 제대에서, 그리고 14시 ─ 제5군 우익에서 적에 대한 타격이 시작되었다. 12월 6일 제1충격, 제10, 제13, 제20 및 제30군이 가세하였다. 12월 7일 ─ 제16군 중부 및 우익 제대, 또한 F.Ya. 코스텐코 중장 작전 집단, 12월 8일 ─ 제16군 좌익 제대, P.A. 벨로프 중장 작전 집단, 제3 및 제50군이 추가되었다. 칼리닌, 클린, 솔네츠노고르스크, 이스트라, 툴라 및 옐레츠 방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41년 12월 5일 병력 및 수단 비교

병력 및 수단
소비에트 군
독일-파시스트 군
비율
병력 구성, 천 명
1100
1708
1:1,5
포 및 박격포, 문
7652
13500
1:1,8
전차, 대
774
1170
1:1,5
항공기, 기
1000
615
1,6:1
 
 

"겨울이 되기 전 적을 격멸할 것", "적은 결코 상승하지 못할 것" 이라는 그의 최근 선언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이번에는 모스크바에서의 베어마흐트의 모든 문제는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온 혹한 때문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어쨌건 모스크바근교의 평균 온도는, "중부" 집단군 일일 작전보고에서 증명되듯, 11월에 영하 4-6℃ 에 머무르고 있었다. 반대로, 얕게 눈이 쌓인 빙결한 습지, 개울, 소하천은, 진흙 수렁에 빠지지 않고, 험지에서 행동하지 않으며 소비에트 군 익측 및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독일 전차 및 차량화 부대의 지형 환경을 극적으로 증대시켜 주었다. 이러한 조건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사실, 수은주가 영하 30-38℃ 로 내려간 12월 5-7일 군의 위치가 악회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온도는 0도로 상승하였다. 결론적으로, 겨울 환경에서 활동하는 그들 군의 준비부족으로 책임을 돌려 스스로를 용서하고, 가장 중요한, 제국의 정치적 및 군사적 지도자로의 완벽한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총통이 동부 전선의 상황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욕망을 내비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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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붉은 군대의 역공은 속도를 얻기 시작하였다. 서부 전선 우익 군은 칼리닌 전선과 공조하여 클린-솔네츠노고르스크 및 칼리닌 적 집단을, 서부 및 남서부 전선 인접 익측에서 제2기갑 및 제2야전군을 타격하였다.

D.D. 렐류셴코 소장의 지휘를 받는 제30군은 북동쪽에서 클린으로 접근하면서 제3기갑군의 방위 전선 중앙을 돌파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독일군의 강렬한 저항이 있었다. 사실, 소비에트 군의 클린으로의 근위 접근의 배출구는 모스크바 북서부에서 지배적이던 독일군에 의한 익측 종심 타격의 위협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독일 사령부가 다른 구획에서 군을 재배치하여 급히 클린 집단을 강화한 이유였다. 12월 7일 클린 지역에 6개 기갑 사단 부대의 재배치가 시작되었다. 이는 제30군 공세의 지연을 유발했으나, 서부 전선 우익의 다른 군은 더 쉽게 전투 행위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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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군의 공세 속도는 여전히 매우 느렸다: 이들은 하루에 단지 1.5-4㎞ 만을 전진하였다. 독일군에 의해 거주 지점, 도로 노드 및 지배적 고지에서 급조된 지탱 지점 점유를 위해 전투중인 제대의 공세는, 불행히도, 이러한 경우 매우 어색하게 행동하였다. 심지어는 방위 대전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던 그들도, 공세 전투의 수행을 위한 기술을 연마할 시간이 없었다.

칼리닌 방면에서의 역공은 더 느리게 확대되었다. I.I. 마슬렌니코프 중장의 지휘를 받는 제29군은 단일 타격 대신, 동시에 전선 세 구획에서 공세를 실행하였고, 더하여 하나는 다른 하나와 7-8㎞ 이격되어 있었다. 3개 공세 각각에서 사단은 1.5㎞ 전선을 타격하였다. 공격 부대는 적 방위를 관통했지만, 양익에서 화력에 노출되었고, 중단을 강요받았다. 다음 날 독일군은 강력한 반격을 가했고 소비에트 부대는 볼가 좌안으로 다시금 후퇴했다. 대체로 5번째 날의 말에 공세를 시작하였던 제29군 제대 전투원들은 같은 경계에 남아있었다. 반대로, V.A. 유쉬케비치 소장이 지휘하는 제31군은, 성공하였다. 이들은 볼가 우안의 교두보를 점령했고 12월 9일 말까지 10-12㎞ 를 진출하였으며, 칼리닌-투르기노보 간선을 절단하여 칼리닌의 적 집단 후방에 위협을 만들어내었다.

동시에 서부 전선 우익은 공세를 지속하였다. 12월 12일 말까지 이들은 7-16㎞ 를 더 이동하였다. 현재 전선 라인은 클린 북서부, 북부 및 동부에서 나아갔으며 이스트라 저수지, 이스트라 강에 근접하였다. 솔네츠노고르스크 및 이스트라 시가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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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소비에트 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댐을 폭파하였다. 공세는 중단되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 유지와 볼로콜람스크, 루자 경계의 제3기갑군 및 제4기갑군 주력의 철수 보장을 위해, 적은 클린 및 이스트라 저수지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였다.

소비에트 사령부는 군을 증원하고 재배치를 실시했지만, 공세 확대는 완전히 충분하게 빨라지지 않았다. 제대 및 부대의 활동은 그들을 포괄하는 포위망 형성보다 여전히 적의 강화된 지탱 거점에 대한 우세한 정면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는 G.K. 주코프 대장이 12월 13일 우익 군에 다시 한번 "가차없고 기력넘치는 공세로 적을 완전히 격멸하고, 제30 및 제1충격군은 병력 일부를 클린 지역의 적을 포위하도록 할 것" 이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서부 전선 사령관은 적의 강화 저항 거점에 대한 정면 공격을 절대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는 "추격을 신속히 실시하기 위해, 적을 분할하는 것을 금지한다. 도로 노드, 협로의 점령, 적의 주둔 및 전투 서열의 와해를 위해 강력한 진출 분견대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라" 고 지시하였다.

12월 11일부터 K.K. 로코소프스키 장군의 지휘를 받는 서부 전선 제16군 제대가 이스트라 저수지 극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댐 폭발 이후 얼음은 3-4m 가라앉았고 서안은 반 미터의 수층으로 덮여있었다. 이 강력한 자연 장애물에 더하여, 적 5개 사단의 부대가 방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저수지를 북쪽에서, 강을 남쪽에서 우회하는 공세를 위해 로코소프스키 장군은 2개 기동 집단을 편성하였다. 하나는 F.T. 레미조프 장군, 다른 하나는 M.E. 카투코프 장군이 임명되었다. 서부 전선 사령관 G.K. 주코프 장군은 제5군 제2기병군단 증원으로 L.M. 도바토르 장군에게 2개 독립 전차 대대 및 기타 부대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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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우익에서의 공세 확대를 위해서 기동 집단의 사용은 필수였다. 그들의 기동 가망성으로, 이들은 적의 익측, 심지어는 후방에서 갑작스럽고 대담한 타격을 실시했다. 특히 이 역공 단계에서 L.M. 도바토르의 기동 집단은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는 단지 소비에트 본부의 보고 문서 뿐만 아니라, "중부" 집단군 작전 보고에서도 증명된다.

어려움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역공은 성공적으로 확대되었다. 서부 전선군은 공세 11일간 우익으로 30-65㎞ 를 진출하였고, 평균 진격속도는 일일 6㎞ 였다. 칼리닌 전선 좌익 군은 10-22㎞ 거리를 극복하였다. 이들의 평균 속도는 일일 0.8-1.8㎞ 를 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모스크바에서 북부 및 북서부로 근위 접근하던 베어마흐트 정예군은 처음으로 큰 패배를 겪었고 강렬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기를 강요받았다.

당시 서부 전선 좌익 군은 수도 북부 및 북서부에서 활동하던 제대보다 큰 성공을 성취하였다. 세 가지 주요 조건이 이 성취를 이끌어내었다. 하나, G.구데리안 육군상장 제대의 비성공적인 위치. 둘, 서부 전선 사령부의 창출된 위치의 숙련된 사용. 주공이 적 작전 건설의 가장 약한 지점 ─ 이들 집단 주력의 익측 및 후방에 가해졌다. 셋, 기습적 타격으로 보장되는, 종심으로부터 집중 지역까지 직접적인 군 공세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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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한 상황의 사용으로, F.I. 골리코프 장군의 지휘를 받는 제10군 제대는 적을 거주 지점 다수에서 패배시켰고 12월 7일 말까지 적이 위치한 종심에 약 30㎞ 를 진출했다. 이 때 소비에트 사령부는 이전에 단지 분열시킬 뿐 아니라, 툴라 동쪽 G.구데리안의 기갑군 병력 일부를 포위하는 전망을 열어놓았다. 포위를 피하기 위해, G.구데리안 장군은 급히 군에 샤트 및 돈 강 경계로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적은 다른 구획에서 저항을 강화하고 있었다. 12월 9일 샤트 강 좌안, 샤트 저수지 및 돈 강의 방위를 점유하던 이탈 부대들과 같이 제112 보병사단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자연 장애물에 기초하여, 독일군은 당시 종심 60㎞ 안으로 이동한 제10군을 돈좌시켰다. 그러나 이들 제대의 모든 위치 극복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12월 8일 G.K. 주코프 대장은 지시를 하달했다: 벨로프 집단 및 제50군은 합동으로 툴라 남부에서 활동하는 독일 집단을 포위 및 섬멸하고, 제10군은 ─ 플라프스크를 타격한다. 본 지시의 진행 경과의 분석은, 소비에트 군이 툴라 동쪽 가방에서 적의 퇴각로 요격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퇴각과 동시에 소비에트 군 공세로에 자연 장애물 및 장벽의 높은 빈도의 사용은 G.구데리안의 사단이 단지 지역에서의 포위를 회피할 뿐만 아니라 제10군을 돈좌시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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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부 전선 좌익의 공세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12월 14일 새벽 벨로프 집단은 우즐로바야 역을, 다음 날에는 ─ 데딜로보를 해방하였다. 같은 날 제10군은 보고로디츠크를 강습하였고, 플라프스크 측으로 공세를 지속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2월 14일 역공에서 알렉신의 적 집단 격멸을 임무로 한 I.G. 자하르킨 장군이 이끄는 또 하나의 군 ─ 제49군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12월 16일 말까지 이들은 5-15㎞ 를 지나갔고, 제50군 우측을 커버했다.

남서부 전선 우익 라인에서 활동하던 R.슈미트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2군은, 12월 6일까지 공세를 펼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방위를 준비하지 못하였다.

12월 6월 조공 방면에서 A.M. 고로드냔스키 장군의 제13군이 활동을 개시했다. 첫날 이들 군은 어떤 상당한 영토적 이득을 성취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전선 주공 방면으로부터 적의 주의를 끌어 산만하게 하였고, 독일 사령부가 제13군 제대 대항을 위해 세력 일부를 떼어내도록 강요하였다. 이는 코스텐코 장군이 지휘하는 전선 충격 집단이 12월 7일 아침 약화된 독일 집단에 기습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가망성을 부여했다. 같은 날 제13군은 옐레츠를 향해 직접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적은 고집스럽게 저항했으나, 12월 9일 밤 포위 위협 하에서 도시를 벗어났다. 옐레츠는 해방되었다. 다음 날 군 병력은 모든 라인에서 이미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연시키기 위한 독일군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12월 10일 A.M. 고로드냔스키 중장의 부대는 6-16㎞ 를 나아갔고 적은 다급히 서부 및 북서부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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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하는 적 북서부 부대의 성공적인 포위를 위해서는 두 가지의 주요 임무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했다: 공세 속도의 증가; 제13군 및 코스텐코 집단의 타격 방면을 변경하여, 베르호브예를 목표로 돌렸다. 총체적으로 전반적인 상황이 유리하였다. 할당된 임무의 수행을 위해 A.M. 고로드냔스키 및 F.Ya. 코스텐코 장군이 지휘하는 군은 12월 12일 말까지 옐레츠의 적 집단 절반을 포위하였다. 이들의 완전한 포위는 제3군 좌익 제대가 수드비시 마을로 진출한 12월 16일 말에 완료되었다.

서쪽에서 돌파를 시도하던 적 부대는, 반복적으로 반격당했다.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종종 F.Ya. 코스텐코 집단군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했다. 그래서, 적의 제34 군단 독립 부대는 V.D. 크류쵼킨 장군의 제5기병군단의 통신을 차단했고 이들에 대한 보급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곧이어 전선군이 제34군단을 완전히 격멸하였고, 잔여병력은 서쪽으로 내던져졌다. 독일 병사들의 사기는 내려갔고, 제2군 사령관 슈미트 장군은 감히 패배주의적인 언행을 일삼는 자를 식별하여 본보기로 즉각 처형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제2군에 참패를 가한 S.K. 티모셴코 원수의 군은 서쪽으로 80-100㎞ 진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제2기갑군과 세력 일부를 혼란시켰고, 서부 전선 좌익 군의 임무 수행을 용이하게 하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역공이 8일을 넘겼을 때, 이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되지 않았다. 두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랑하는 도시의 운명의 불확실성에 의한 불안감 증폭으로 수도에 드리워진, 임박한 문제에 대해 압력을 받았다. 그리고 12월 13일 밤 라디오로 소브인포름뷰로에서 전했다: "지난 시간입니다.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점령한다는 독일의 계획은 실패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적의 계획이 공개되었고 "모스크바로의 두 번째 총체적 공세" 파탄에 대해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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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까지 소비에트 군은 적의 기갑 타격 집단을 격멸하였고, 최초 라인에서 수도 북쪽으로 60㎞, 남쪽으로 ─ 120㎞ 진출하였고, 모스크바로의 직접적인 위험을 제거하였다. 즉, 3개 전선군은 즉각 임무를 수행하였고 역공의 주 목표를 달성하였다: 적을 모스크바에서 가능한 한 멀리 격퇴하고 가능한 한 막대한 손실을 가할 것. 12월 16일 소비에트 사령부는 적 추격 지속에 대한 지령을 하달하였다. 군은 그들이 성취해야하는 경계, 또한 임무 수행 기간 및 이를 해결할 방법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칼리닌 전선 남익, 서부 전선 중심 및 남서부 전선 우익을 통한 전선 공세 폭 및 포함된 군 구성이 증가되었다.

스타브카는 지속적으로 전선의 행력을 조정했다. 하달된 지시 분석에서, 이들은 만일 남서부 전선이 12월 18일 공세를 실시한다면, 서부 전선 익측과 확실히 100㎞ 인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타브카는 S.K. 티모셴코 원수에게 남서부 전선 우익의 공세 기간을 가속하기를 요청했다. S.K. 티모셴코는 하달받은 지적에 따라 제61군 세력 일부에 12월 16일, 즉 이틀 전에 공세하기를 지시했다. 이를 위해 K.I. 노비크 장군이 지휘하는 기동 집단이 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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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우익 군의 적절한 공세는 주목할만한 속도를 보여주었다. 스타브카는 일일 10-15㎞ 진격을 상정하였고, G.K. 주코프는 하루에 20-25㎞ 로 거의 두 배 가량 증가시켰지만, 이 환경에서 그러한 속도를 달성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동시에 베어마흐트 최고사령부에서 많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12월 16일 히틀러는 "중부" 집단군에 가능한 한 오래 체류하며 수송 통신의 향상 및 예비를 당겨오기 위한 시간을 벌 것을 지시했다. 전선 유지를 위해 모든 댓가를 지불하겠다는 결정으로, 히틀러는 12월 16일 브라우히치와 보크를 위기에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는 그의 의견에 따라 교체 필요에 대해 결정하였다. 이러한 해법의 분석은, 베어마흐트 최고사령부가 단지 12월 중순에만 "중부" 집단군에 드리워진 모든 단계의 위험이 실현됨을 보여주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소비에트 군 역공이 시작된지 단지 12일 이후 이들은 그들의 행동이 지역 중요점 전술 돌파를 전략적 규모로 유도하지 못한다고 확신하였다. 그 결과 베어마흐트의 가장 거대한 전략적 집단이 격멸 위협에 말려들었다. 상황의 심각성은 악화되었고, 이들의 제대는 단지 중무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독일군은 그들이 퇴각하는 후방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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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부" 집단군 저항의 조건 및 가능성의 객관적 평가는, 전선 라인이 감소한 독일군의 위치는 일부 향상되었음을 지적해야 한다. 고려 시점에서 제3기갑 및 제4기갑군의 밀도는 1.4배, "구데리안" 군 집단은 ─ 1.8배 증가하였다. 이것이 어찌하여 "중부" 집단군이 완고한 방위를 펼치는 실제적 가망성을 보유하고 붉은 군대의 공세에 충분히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현재 상황과 전투 잠재력이 일치하기 때문에 위치를 점유하는 광신적인 저항을 나타내는 히틀러의 요구사항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브라우히치를 육군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히틀러는 스스로 육군 사령관이 되고 개인적으로 동부 전선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지도하기로 결정했다.


모스크바에서의 붉은 군대 역공 2단계

이러한 모든 중요한 사건은 12월 중순에 일어났고, 전투 행위의 특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고려된 요인의 영향 하에서 모스크바에서의 붉은 군대 역공 2단계가 개시되었다. 칼리닌 전선 좌익 군은 남부 및 남서부 방면으로의 공세를 지속했다. 12월 16일 칼리닌 전선 사령관 코네프 장군은 제30 및 제31군은 스타리차 동부로 공세를 실시하며, 제22 및 제29군은 ─ 북쪽에서, 이들의 인접 익측에 주공을 가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본 행위는 단지 제9군의 대부분을 격멸할 뿐만 아니라, "중부" 집단군 주력 익측 및 후방에 대한 후속 타격을 위한 조건 창출을 의도하였다.

구상의 실현을 위해 I.S. 코네프는 전선 좌익 군에 스타리차로의 신속한 진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제30군 사령부는 단시간에 필요한 집단 창설에 실패하였다. 이들의 주력은 12월 19일에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공세와 제31군과의 인접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20일 이들은 서쪽으로 복잡한 선회를 실현하지 않았고, 남서부로 공세를 지속하였다. 양 군은 12월 20일 말까지 총 12-15㎞ 를 진출하였으며, 평균 공세 속도는 일일 3-4㎞ 를 초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닌 전선 사령관 I.S. 코네프 상장은 토르조크-르제프 방면에서 적극적 활동으로부터 단념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는 I.I. 마슬렌니코프 장군에게 2개 사단으로 공세를 펼치고 6개는 끌어당겨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제대 집중이 완료되었고, 군은 강습을 강화하였고 12월 말까지, V,I. 보스트루호프 장군의 제22군 좌익 사단과 공조하여, 적 방위 종심 15-20㎞ 을 돌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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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까지 제29 및 제31군은 적을 참패시키고 스타리차까지 접근하였다. 볼가의 가파른 강안에 위치한 이 도시는, 독일인들이 강력한 저항 노드로 바꿔놓았지만, 이들을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V.I. 슈베초프 장군의 제6군단 부대의 압박으로 스타리차를 황급히 내버려두기를 강요받았다. 적의 상황 반전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소비에트 사단은 르제프로 돌진하였다. 칼리닌 전선 중앙 및 우익 군의 성공적인 진출은 적을 어려운 위치로 내몰았다. 전투의 확대 이후 르제프 북동부에 제9군 중심의 방위 돌파 위협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월 2일 히틀러는 이 군의 철퇴 허가를 내려주지 않았다.

1월 7일까지 제22 및 제39군 제대는 적의 저항을 분쇄하고 뱌즈마 공세를 위한 길을 여는 볼가 강 라인, 르제프 서부 철도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제39군의 성과를 이용하여, 르제프 방면으로 공세를 확대하고 르제프의 적 집단을 제29군 제대가 북서부에서, 제31군 제대가 동쪽에서 매달았다. 제30군에 대해서는, 진출은 여전히 최소였다. 따라서, 칼리닌 전선군의 역공 2단계에서 독일 제9군에 이들을 토르조크-르제프 방면에서 50-60㎞, 칼리닌-르제프 방면에서 ─ 90-100㎞ 밀어내는 또 다른 타격을 가하였다. 우익은 볼가 경계에 도달했고, 중심은 ─ 르제프를 반쯤 감쌌다. "중부" 집단군 주력에 대해 전선은 에워싸는 위치를 계속 점유하였다. 이 모든 것은 뱌즈마 측으로의 공세 확대 전제를 조성하였다. 스타브카 지령에 따라 칼리닌 전선은 새로운 작전을 위해 군의 재편성을 시작했다.

서쪽 경계 110-120㎞ 의 주브초프, 그자트스크 라인으로의 진출 임무를 지닌 서부 전선 우익 군은 12월 17일 적 추격을 지속하였다. 독일 사령부는, 기갑 집단 주력을 선봉으로 강력한 후위 병력의 특히 도로 노드 및 거주 지점이 방벽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라마 및 루자 강안에 준비된 중간 위치로의 퇴각을 엄호하게 했다. 전선의 많은 구획에서 적은 무질서하게, 무기, 기술품 및 차량을 버리고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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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쿠즈네초프 장군의 제1충격군은 12월 18일 테랴예보 슬로보드의 강력한 거점에서 전투를 치뤘고 20㎞ 더 전진하여 볼샤야 세스트라 강 경계에 진출하였다. 적을 추격하던 제20군의, F.T. 레미조프 소장의 기동 집단 부대는 서부 방면으로 약 20㎞ 를 진출하였고 12월 18일까지 볼로콜람스크 동쪽 18㎞ 의 경계에 도달했다. 12월 19일 제20군은 볼로콜람스크에서 전투를 벌였다. F.T. 레미조프의 집단은 I.M. 치스탸코프 대령의 제64 소총병 여단과 협동하여 도시 북쪽 및 동쪽에서, M.E. 카투코프 대령 집단은 ─ 남서부에서 공세에 돌입하였다.

포위 위협 하에서 적의 제35보병사단은 후위를 커버하며, 12월 20일 새벽 라마 강 서안으로 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독일군의 견부에 양 기동 집단 및 태평양함대 수병들이 볼로콜람스크를 급습했고 결정적인 행동은 이들로부터 적의 후위를 몰아내었다. 이리하여 적은 라마 경계에서 그들의 방위 시스템의 주 거점을 상실하였다.

이 시기 K.K. 로코소프스키 장군의 제16군은 루자 강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집요한 저항을 맞이하여 진출에 실패하였다. L.A. 고보로프 장군의 제5군은 12월 19-20일 우익 및 중심에서 적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나머지는 루자 강 및 모스크바로 물러났다. 잘 조직된 독일의 포병-박격포 및 기관총 사격은 자연 경계 및 루자 시 외곽에서 강력한 저항을 가했다. 방위를 돌파하고 도시를 해방하려는 군 부대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다. 여기, 루자 외곽에서, 팔라쉬키노 근처에서 12월 19일 제2 근위 기병 군단장 L.M. 도바토르 장군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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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서부 전선 우익 군의 역공 2단계는 40㎞ 를 진출하였고, 이는 1단계보다 1.5배 못한 수치였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소진 요소로 군 공세 능력을 소진하였고, 적은 중간 지점에서 충분히 강력한 방위를 조직할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그 동안 이를 극복하려던 시도는 실패하였다.

서부 전선 우익 군이 적 방위 돌파에 대한 작전 준비를 시작하던 이 때, 이들의 좌익에서 주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툴라에서의 공세 완료 과정에서 전선 사령부는 군에게 북서부 및 서부 방면에서 이어지는 행동을 위해 군의 방향을 정했다. 12월 16일 주코프 장군은 제10, 제49, 제50군 및 벨로프 집단에 무중단적인 적의 추격 지속과 칼루가의 해방을 지시하였다.

과업의 실현을 위해, 서부 전선 좌익 군은 적에 대한 압박을 증가시켰다. 이 압력 하에서 적 제2기갑군 주력의 남서부 방면이 오룔로, 좌익이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집단 간의 간극은 12월 17일 새벽 30㎞ 에 달했다. G.K. 주코프는, 남쪽에서의 타격으로 칼루가를 신속히 취하기 위해 적 전선의 이러한 간극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제50군 사령관 I.V. 볼딘 장군에게 기동 집단 창설을 지시하였다. 동시에 벨로프 집단은 신속히 오카에 도달하고, 벨료프 북부를 도하하며, 주력을 북서부로 선회하여, 12월 28일 유흐노프를 점령하고 또한, 칼루가와 말로야로슬라베츠로부터 탈출로를 차단해야 했다. 제10군은 신속히 벨료프와 수히니치를 취할 것을 지시받았다. 주코프는 중간점 경계에서 고착된 독일군의 가망성을 상실시키고 중요 도로교차점을 지키기를 목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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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루가 해방을 위해 제50군에 창설된 기동 집단은 소총병, 전차 및 기병 사단, 또한 V.S. 포포프 장군의 지휘를 받는 툴라 노동자 연대 및 전차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12월 18일 밤 임무 이행을 개시했다. 거주 지점을 우회하고 적과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며, 이들은 12월 20일 말까지 은밀하게 칼루가 남부로 접근했다.

12월 21일 아침 V.S. 포포프 기동 집단 부대는 오카로 가는 교량을 점령하였고, 칼루가를 급습하였으며 도시 주둔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독일 사령부는 칼루가 유지를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적의 우세한 세력의 활동으로 포포프 집단은 이내 와해되었다. 이들은 포위된 전투에서 시간을 끌었으며 1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제43군단의 칼루가로의 강요된 철군은 제4야전 및 제2기갑군 간의 인접 익측 간의 간격이 더 커지게 하였다. 이 간극에서 벨로프 집단은 12월 24일 리흐빈 (현재 ─ 체칼린) 남부 오카로 나가아도록 지향되었다. 집단의 공세 및 이들 부대의 오카로의 진출로 남부에서의 타격 위협이 제거됨으로써 제50군 좌익 제대 활동에 유리한 영향을 미쳤다. 군은 신속히 리흐빈으로 진출하였고 12월 26일 도시를 해방하였다. 지금 좌익 사단은 남서부에서 칼루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군 우익 제대는 칼루가 동부 및 남동부의 적과 전투를 펼치고 있었고 또한 북동쪽에서 에워싸려 노력했다. 12워 30일 열흘 간의 강렬한 전투 이후 포포프 집단은 제290 및 제258 소총병 사단의 접근 부대와 공조하여 러시아의 고대 도시 칼루가에서 침략자들을 소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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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서부 전선 중심에서 활동하던 군의 역공이 개시되었다. 이 곳의 조건은 서부 전선 익측에 비교했을 때 가장 불리했음을 주의해야 한다. 독일군은 기준비된 방위 경계에 기반하고 있었다. 2개월 간 건설되었고 12월 중순까지 완전한 참호, 엄폐호 및 통신로를 갖춘 완전히 장비된 거점을 보유하였다. 주로 지뢰-폭발물, 또한 충분한 탄약, 지뢰, 탄약을 갖춘 잘 조직된 화력 시스템으로 구성된 대전차 및 대보병 장애물이 존재했다. 이 구획의 제4야전군의 방위 제대 대부분 부대는 한달간 적극적 전투 행위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가장 낮은 손실만을 겪었다. 더하여 군의 작전적 밀도는, 사단당 5.4㎞ 였으며, 이는 "중부"집단군에서 가장 높은 것이였다.

12월 18일 아침 서부 전선 중부군이 한시간의 포병 준비사격 이후 공세를 개시하였다. M.G. 예프레모프 장군의 제33군 일부 부대는 나로-포민스크 북부로부터 나라 강 서안으로의 도하에 성공하였으나, 적의 반격에 노출되었다. 다음 날 제110 소총병 사단 세력 일부는 옐라기노 (나로-포민스크 남쪽 3㎞) 에서 레카 서안으로 도하하였으며 전투를 치뤘다. 12월 20일 M.G. 예프레모프 장군은 전투에 제201 소총병 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기동은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장기화된 전투가 이전 경계에서 벌어졌다. 오직 제222 소총병 사단만이 12월 21일 나라 서안 타시로보의 작은 교두보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서부 전선 중앙 군 방면에 유리하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선 좌익 공세와, 칼루가에서 독일군의 퇴각의 결과로 인해 적 활동 라인에서 제13 및 제43군단 간에 간극이 형성되었다. 이 틈으로 I.G. 자하르킨 장군의 제49군 좌익 제대가 즉시 돌진하였다. 12월 22일 말 52㎞ 를 진출하였고, 독일 제4군 남쪽에 포위 위협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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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후퇴를 촉발시키기 위해 G.K. 주코프 대장은, 예프레모프 장군에게 적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나로-포민스크에서의 전투는 새로운 세력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적의 치열한 대항 극복을 위해 F.A. 보브로프 대령의 제222 소총병 사단 부대는 도시를 북쪽에서, S.I. 이오블레프 대령의 제1 근위 차량화소총병 사단은 남서부에서 에워쌌다. 12월 26일 나로-포민스크가 점령되었다. 같은 날 주코프는 모자이스크 및 말로야로슬라베츠 방면의 적 추격에 대해 지시하였다. 12월 28일 발라바노보가, 1월 2일 ─ 말로야로슬라베츠가 해방되었다.


맹렬한 저항으로, 독일군은 제33군 우익 및 중부 제대가 나로-포민스크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사흘 밤낮으로 이전에 보로프스크의 적을 소탕한, 치열한 시가전에 뛰어난 제33 및 제43군 5개 소총병 사단이 민스크 고속도로에서 남부로 접근하여 둘러쌌다. 이는 1월 4일 발생했으며, 다음 나흘 간 같은 군의 인접 제대가 10-25㎞ 전진하였으나, 제20군단의 완고한 저항과 강력한 반격 및 적의 제7 및 제9군단의 강력한 제대가 접근하면서 돈좌되었다. 1942년 1월 7일, 붉은 군대의 역공이 종결되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승리는 러시아군 병사들의 용기와 의지로 얻어졌다


이리하여, 1941년 겨울 모스크바에서는 상당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음으로 붉은 군대가 여지껏 무적으로 여겨지던 독일군을 중단시키고 크게 패배시켰으며, 모스크바로부터 100-250㎞ 밀어내어 수도와 모스크바 산업 지구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였다. 이 성공은 순수한 군사적 임무를 넘어선 의미로 매우 중요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스크바 이후 독일은 단지 전략적 이니셔티브를 상실하고 패배의 쓴맛을 알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그들의 "전격전" 을 잃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전격전 전략의 붕괴는 제3제국이 길고 긴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런 전쟁에서 그들의 지도자는 "바르바로사" 계획을 재조정하여, 향후의 연도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적 계획과 광대한 물질적 예비의 추가적 조사를 요구하였다. 장기전에 대해 독일은 준비되지 않았다. 이의 수행을 위해서는 국가 경제, 대내외적 정책의 급격한 재구축이 요구되었으며, 전략은 언급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의 패배는 다른 관점에서 측정되었다. "독일군의 무적 신화는 파쇄되었다. ─ 할더가 서술하였다 ─ 여름의 공세에서 독일군은 러시아에서 새로운 승리를 성취할 것이었지만, 그들의 무적의 신화는 복구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1941년 12월 6일은 제3제국의 간략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 극에 달한 히틀러의 세력과 위력은, 이 시점부터 하강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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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붉은 군대의 승리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공세에서 병력 및 수단 비율이 불리할 때 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령부는 이러한 불리함을 적이 돈좌되고 방위 위치를 건설하고 방위로 전환할 시간을 가져가지 못하였을때를 역공 전환점으로 선택하여, 그리고 기습적인 반격을 통하여 이를 보상받았다. 예기치 못한 타격에 준비되지 못한 적은, 불리한 조건으로 전환되었고, 급히 계획을 변경하고 붉은 군대의 행동에 대응하였다. 기습은 1단계 역공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더하여, 성공은 추가적인 세력의 증원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역공의 확대를 위하여 2개 제병협동군, 26개 소총병 및 8개 기병 사단, 10개 소총병 여단, 12개 독립 스키 대대 및 18만 명의 인력이 보충되었다.
 

이 모든 요소에서, 또한 특히 군사 기술품에서, 작전적 예비가 부재하게 된, 적이 겪은 손실은, 당사자들간의 병력 및 수단 비율의 변화를 유발하였다. 공세 말까지 합하여 서부 방면의 전선에서 포병, 그리고 병력과 전차는 각각 1,1 및 1.4배 비율로 균등화되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역공에서 침략자들에 대한 승리 성취의 결정적인 요인은 소비에트 병사들의 높은 사기였다. 저명한 영국의 군사 이론가 및 역사학자 B. 리델 하트는 이 승리가 "무엇보다도, 서방의 어떠한 군이라도 죽일 수 있는 환경에서, 어렵고 지속적인 전투에 견딜 수 있는 러시아 병사들의 용기와 의지" 로 달성되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전적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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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의 나날들에서 세계인들은, 붉은 군대가 단지 후퇴만 하지 않고, 베어마흐트 군에 저항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스크바에서의 성공은 대조국전쟁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전체의 향후 과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 하나의 전행성적 규모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942년 1월 1일 26개국 대표가 연합국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이들에 편승하는 국가들과 싸우기 위해 경제적 및 군사적 예비를 사용하며, 더하여, 각국들과 서로 협력하며 파시스트 블록 국가들과 별도의 휴전협정을 체결할 수 없음을 약속하였다. 이는 반히틀러 동맹의 군사력 증강 계획을 위한 긍정적인 분위기 조성의 열쇠였다.

 

러시아 연방 연방 법령 "군사적 영광의 날 (승리의 날) 에 대하여" 에 의해 12월 5일 ─ 모스크바 전투에서 소비에트 군의 독일-파시스트 군에 대한 역공 개시일 (1941년) 으로 기념되고 있다. 이 날 러시아 연방 무장군과 다른 군은 우리의 수도에서 싸운, 러시아 병사들을 영속하기 위한 기념식을 거행했다.


모스크바 전투는 소비에트 인민들의 영웅정신과 자기희생으로 빛났다. 전투에서 무용과 용기를 보여준 40개 부대 및 제대가 근위 칭호를 획득했고, 3.6만명의 병사들이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고, 187명의 사람들이 소비에트 연방 영웅 및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를 수훈받았다. "모스크바 방위를 위하여" 메달은 약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수여받았다 (군인 38.1만명 및 민간인 63.9만명). 1965년 5월 8일 모스크바는 "영웅 도시"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다.

 


자료는 러시아 연방 무장군 총참모부 군사 아카데미 과학-연구 기관 (군사사) 에서,
사진은 러시아 연방 국방부 "보엔인포름" 에이전시 아카이브 에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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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unmp07 2016.05.30. 20:53
항상 좋은글 잘 읽고 있습니다.

댓글을 달고싶어도 여러번 읽다보니 자문자답이 될 정도로 좋은 글이라 이제서야 댓글을 다네요.

국내에서는 러시아쪽 자료를 정말 찾기 어려웠는데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서 제가 잘못알던 사실도 조금씩 고칠 수 있네요.
Profile image 수보로프 2016.06.07. 01:55

정주행 했는데....정말 다른 데에서는 알기 힘든 정보들 잘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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