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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방위 기간 1942년 7월 17일 - 11월 18일, 반격 1942년 11월 19일 ~)

 

러시아의 군사사는 영웅정신, 야전에서 군인의 군사적 용기 및 지휘관들의 전략적인 천재성의 예제들로 가득하다. 여기에서는 스탈린그라드의 서사시를 조명한다.


200일 동안 돈 및 볼가 강변, 스탈린그라드의 벽과 이 도시 자체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는 100000㎢ 면적과 400-850㎞ 에 이르는 전선 폭으로 번졌다. 이 거대한 전투에는 다양한 단계의 전투 행위에서 양측 도합 210만의 병력이 참가하였다. 전투 행위의 목적, 규모 및 강도에 있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이전의 모든 세계의 역사적 대전을 넘어섰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1942년 여름 및 가을 작전을 계획했고, 1942년 4월 5일 A. 히틀러가 군사-정치적 목표를 함의하 "바르바로사" 계획 아이디어의 실제적 발전을 명시하는 총통 명령 41호에 서명하였다. USSR 의 최종적 격멸의 주요 조건은, 베어마흐트 고위 지도부에 따르면, 강력한 석유 산지인 카프카즈와, 돈, 쿠반, 북카프카즈 및 남부 포볼지예의 광대한 농경 지역, 또한 수로 - 볼가 강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942년 6월 말까지 적은 쿠르스크에서부터 타간로그에 이르는 폭 600-650㎞ 의 회랑에 약 90만의 병사 및 장교, 전차 1260대, 포 및 박격포 17000문, 전투 항공기 1640기를 집중하였다.

베어마흐트 사령부 명령 45호에 따르면 1942년 7월 23일부터 "남부" 집단군을 공세 전 2개 집단으로 분할시킨다: "A" 집단군 및 "B" 집단군. "A" 집단군 (사령관 - 육군원수 V. 리스트) 은 카프카즈 점령 임무를 수행한다. 명령 지시문에 따르면, ""B" 집단군의 일부는 돈 강 유역에 방어선을 구축하며 스탈린그라드를 타격하고, 이곳에 집중된 적 집단을 격멸하고, 도시를 점령하고, 돈 및 볼가 사이의 지협을 차단하고 하천으로의 수송을 차단한다. 이에 잇따라, 전차 및 기계화 군은 볼가를 따라 아스트라한까지 타격하고, 볼가 본류의 이동을 마비시킨다...". "B" 집단군 (사령관 - 육군상장, 1943년 2월 1일부로 육군원수 M. 바이흐) 구성에는 이하가 포함되었다: 독일 제 4 전차, 제 2, 제 6 군, 이탈리아 제 8 및 헝가리 제 2 군.

"B" 집단군 군 구성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위해 제 6 군 (사령관 - 육군상장 F. 파울루스) 가 할당되었다. 독일 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의 신속한 점령을 자신하였으며, 7월 1일-16일 동안 제 6 군 구성을 20개 사단에서 14개 사단으로 감소시켰다. 합하여, 제 6 군은 공세 개시 시 27만의 병사 및 장교, 약 3000문의 포 및 박격포, 약 500대의 전차, 그리고 이들을 공중에서 지원할 제 4 항공군 1200기의 전투 항공기를 보유하였다.

하르코프에서 소비에트 군의 성공적이지 못한 작전의 결과로, 보로네즈 방면과 돈바스에서, 또한 돈의 거대한 굴곡에서 적의 거대한 세력의 확장은 볼가에 적 돌파의 실제적 위협을 만들었다. 이는 소련군 전선의 파열과 카프카즈의 중부 지역과의 통신 손실을 유발할 수 있었다.

남서부 전선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독일-파시스트 군의 동부로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동부, 북부 및 서부에서 "A" 집단군의 독일 제 1 전차 및 제 17 군 제대의 공격을 격퇴한 남부 전선군은, 격렬한 전투에서 로스토프 방위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스탈린그라드 및 카프카즈 방면의 적에 대한 저항 조직을 위해 긴급하고 과감한 조치가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스타브카 최고 총사령부 (VGK) 는 남서부 및 남부 전선에 제 62, 제 63 및 제 64 군을 배치하였다. 7월 12일 스탈린그라드 전선 (사령관 - 소비에트 연방 원수 S.K. 티모셴코) 가 새로이 창설되었으며, 구성에는, 해체된 남서부 전선 제 21 및 제 8 항공군이 배속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은 파블로프스크에서 클레트스크 및 클레트스크-수로비키노-베르흐네-쿠르모야르스카야 라인의 돈 강 유역에 굳건한 방위 형성 임무를 하달받았다. 돈 강 좌안을 따라 베르흐네-쿠르모야르스카야에서부터 아조프 구역 (300㎞ 이상) 에는 북카프카즈 전선 제 51 군이 시작되었다. 남부 전선군의 후퇴와 같이 이것은 카프카즈 방면을 덮어야 했다. 스타브카는 스탈린그라드 전선 구성에 단기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제 28, 제 38 및 제 57 군을 배속시켰다. 제 8 항공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의 강화로 10개 항공 연대 (총 200기) 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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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프 방위 지역. 1942년 6월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한 적 의도의 더딘 산정으로 스타브카 VGK 가 새로운 방위 전선 형성을 위한 예비를 재배치할 시간이 없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7월 중순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적에 대해 제 63 및 제 62 군 12개 사단 (16.6만명, 포 및 박격포 2200문, 전차 약 400대) 은 실제로 저항할 수 있었다. 전선 항공대는 약 600기의 기체를 보유했고, 이 중 150-200기의 장거리항공대 폭격기 및 60기의 대항공방위 (PVO) 전투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로의 접근에 4개의 방위 라인이 건설되었다: 외부, 중간, 내부 및 시가지. 비록 방위 작전 시작 때 이들이 완전히 성공적으로 장비되었지는 아니하였지만, 이들은 도시 방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탈린그라드 거주자들 중 일부는 인민 민병대 대대를 형성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총체적 전선 활동 지도 및 조율은 스타브카 VGK 명령에 따라 최고 부사령관 G.K. 주코프 대장 및 총참모장 A.M. 바실레프스키 상장이 수행하였다.

특히 당사자에 의해 수행된 전투 행위, 해결된 임무, 공간 및 시간적 규모, 또한 전투의 결과를 고려할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개 기간으로 구성된다: 방위 ─ 1942년 7월 17일부터 11월 18일까지; 공세 ─ 1942년 11월 19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 방면에서 125일동안 지속된 스탈린그라드 방위 작전은 2단계를 포함한다: 1단계 ─ 스탈린그라드로 원위 접근에서 전선군 방위 전투 행동 수행 (7월 17일 - 9월 12일). 2단계 ─ 스탈린그라드 보존을 위한 방위 행위 수행 (9월 13일 - 11월 18일).

독일 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제 6 군에 돈의 거대한 굴곡을 통해 서부 및 남서부로 향하는 최단 루트로 주공을 가했고, 방위 회랑에는 단지 제 62 (사령관 - V.Ya. 콜파크치 소장, 8월 3일부 A.I. 로파틴 중장, 9월 6일부 N.I. 크릴로프 소장, 9월 10일부 V.I. 추이코프 중장) 및 제 64 (사령관 - V.I. 추이코프 중장, 8월 4일부 M.C. 슈밀로프 중장) 군만이 있었다. 작전적 이니셔티브는 독일 사령부의 손에 있었으며, 약 두 배의 병력 및 수단을 보유했다.


스탈린그라드 원위 접근에 대한 전선군 방위 전투 행위 (7월 17일 - 9월 12일)

작전 1단계는 1942년 7월 17일 돈의 거대한 굴곡에서 제 62 군 부대와 진출한 독일군 분견대와 전투 접촉하며 시작되었다. 맹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적은 14개 중 5개 사단을 배치하하고 6일을 소모하였고,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주요 방어 회랑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적의 우세적 강습 하에 소비에트 군은 새롭고, 느슨하게 장비되거나 혹은 장비되지 못한 경계로의 후퇴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 조건에서 그들은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유발시켰다.

7월 말까지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상황은 매우 긴장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독일군은 제 62 군 양익을 깊숙하게 감쌌으며, 제 64 군이 방위하는 니주니-치르 지역의 돈 강으로 나아가 스탈린그라드에 남서부쪽 돌파 위협을 생성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1942년 7월 28일 스탈린그라드 및 다른 전선군은 스타브카 VGK 지시 227호를 하달받았다. 가혹한 정직함을 요구하는 지시에는 USSR, 특히 스탈린그라드 방면에서 비우호적인 매우 어려운 환경을 보여준다. 다음은 지시에서 발췌하였다: "독일 침략자들은 스탈린그라드, 볼가를 찢어놓았고 모든 비용을 쿠반, 북카프카즈를 점령하여 그곳의 석유와 식량 부로 충당하려 한다.

적은 이미 보로실로프그라드, 스타로벨스크, 로소쉬, 쿠퍈스크, 발루이키, 노보체르카스크, 로스토프-나-도누, 보로네즈의 절반을 점령하였다...

우리는 7000만 이상의 인구, 연간 8억 푸드의 빵, 연간 1000만 톤의 금속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독일을 인적 예비, 빵 비축분에서 뛰어넘지 못한다. 더 이상의 후퇴는 - 스스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우리 조국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각각의 포기한 우리 영토는 적을 백방으로 강하게 할 것이며 우리의 방위, 우리의 조국을 극도로 약화시킬 것이다...

지금부터, 후퇴를 끝낼 시간이다.
물러서지 마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가장 큰 호소를 들어야 한다.

이후로 각각의 지휘관, 붉은 군대, 정치부원을 위한 규율의 철칙은 고위 사령부 지시 없이 물러서지 말아야 함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 조국의 호소이다. 본 호소의 이행은 - 우리의 땅을 수호하고, 조국을 지키며, 증오스러운 적을 멸하고 승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시는 모든 중대, 기병대, 포대, 비행대, 지휘부 및 참모부가 구독한다.


방위 인민 위원   I. 스탈린"

 


방위 회랑 폭의 증가 (약 700㎞) 와 관련하여 스타브카 VGK 는 7월 23일 V.N. 고르도프 중장에게 명령하여 8월 5일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남동부 전선을 분리하였다. 양 전선군 간에 더 큰 상호작용을 달성하기 위해 8월 9일 스탈린그라드 방위의 지도는 한 손에 결합되었고, 이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전선은 남동부 전선군 사령관 A.I. 예료멘코 상장에게 예속되었다.

7월 30일 독일 사령부는 제 4 기갑군을 카프카즈 방면에서 스탈린그라드로 전향하기를 결정하였다. 결과로 스탈린그라드 방면에는 총 2개의 군이 활동하였다: 제 6 군 ─ 서부에서 및 제 4 기갑군 ─ 남서부에서. 8월 5일 제 4 기갑군 진출 제대가 스탈린그라드 외곽 외부로 접근했다. 적의 이 경계를 넘어서는 돌파 이동 시도는 제 64 및 제 57 군 제대의 훌륭한 반격 조직으로 격퇴되었다.

소비에트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8월 23일 적은 제 62 군의 방위를 돌파할 수 있었고, 도시 외곽 중부로 접근하였고, 독일 제 14 기갑군단 분견대가 볼가에서 예르조프카 지역 스탈린그라드 북부로 진출하였다. 동시에 독일은 도시에 폭격기 함대를 투사하였다 - 하루 동안 2000번이 넘는 소티가 수행되었다. 전체 전쟁에서 이러한 항공 출격은 도달되지 못했다. 50㎞ 로 죽 뻗은 거대한 도시는, 화염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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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스탈린그라드. 1942년 8월

 


스타브카 VGK 대표자 A.M. 바실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아침 잊을 수 없이 비극적인 8월 23일이 제62군의 나를 붙잡았다. 이 날 파시스트 군은 자신들의 기갑 부대를 볼가로 이동시켰고 제62군을 스탈린그라드 전선 주력으로부터 절단하였다. 동시에 8월 23 및 24일 적이 우리의 방위를 돌파하였고 그들의 제4항공군 거의 전부가 투입되어 도시에 격렬한 대규모 폭격을 가하였다. 도시는 폐허로 바뀌었다. 전화 및 전신 통신은 끊어졌고, 나는 8월 23일 간 최고 총사령부와 라디오를 통한 교섭을 수행했다".

8월 23일 PVO 수단은 적 항공기 120기를 격추하였고, 이 중 전투 항공기 - 90, 방공 포병 - 30기였다. 동시에 방공 포병 연대는 도시 앞에서 독일 전차 및 보병에 피해를 주며 많은 공격을 격퇴하였다. 도시 벽에서의 전투는 극도로 강렬하고 치열한 특성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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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도시에서의 방위 전투

 


이러한 나날에 스탈린그라드 지역당 서기 A.C.추야노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도시 방위 위원회는, 도시 거주민들에게 호소문을 게시하였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스탈린그라드의 친우 여러분! 다시 한번, 24년 전과 같이, 우리 도시는 어려운 나날을 겪고 있습니다. 피투성이 히틀러 군단은 스탈린그라드를 위대한 러시아의 볼가 강에서 찢어내고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주민 여러분! 도시를 독일의 모욕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도시, 집, 가족을 기키기 위해 일어섭시다. 모든 거리를 통과할수 없는 바리케이드로 막으십시오. 모든 집, 구, 거리마다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를 만드십시오. 건축된 바리케이드에서 떠나십사오. 모든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십시오. 가공할 1918년 우리의 아버지들은 차리친을 지켜내었습니다. 우리는 1942년 적기가 휘날리는 스탈린그라드를 지킵시다!

모두 바리케이드를 건설하십시오! 총을 쥘 수 있는 모두, 우리의 도시, 우리의 집을 지킵시다!"


도시 인구는 스탈린그라드 수호자들 모집의 주요한 소스였다. 수천 명의 거주민들이 도시의 방어를 위탁받은 제62 및 제64군 부대로 합류하였다.

9월 첫날 적은 도시 외곽 내부를 돌파하였고 북부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완강하게 도시 중심에서 찢어졌으며, 볼가 강을 완전히 절단하였다 - 이는 통신에 중요했다. 광대한 전선에서 볼가로 돌파하려는 적의 시도는 막대한 손실을 남겼다. 오직 9월의 10일 간 스탈린그라드의 벽에서 독일군 24000명이 사망하였고, 약 500대의 전차와 185문의 포가 파괴되었다. 8월 18일부터 9월 12일 간 도시로 근위 접근하는 600기의 적 기체를 격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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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방위 전투

 


9월 12일 "B" 집단군 사령관과 제6군 사령관이 빈니차의 총통 본부로 소환되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이 아직까지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하지 못했음에 매우 불만족하였고 가능한 한 신속히 도시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적의 세력은 모든 시간에서 증가하였다. 합하여 스탈린그라드 방면에는 9월 전반기 간 약 50개 사단이 활동하였다. 하루에 1500-2000소티를 수행하는 이들의 항공대는 공중을 지배하였다. 체계적인 도시 파괴로, 적은 군과 거주자들의 정신-심리적 상태를 무너뜨리기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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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7월 17일 - 11월 18일 방위 작전

 


스탈린그라드 보존을 위한 방위 행위 (1942년 9월 13일 - 11월 18일)

스탈린그라드 보존을 위한 소비에트 군의 방위 작전 2단계는 9월 13일 개시되었고 75일간 지속되었다.

9월 13일 항공대 지원을 동반한 강력한 포병 준비로 도시에 대한 첫 번째 공습이 시작되었다. 적은 병력 및 수단에서 제62 및 제64군을 약 1.5-2배, 전차에 있어서는 - 6배 우위에 있었다. 그들의 주요한 행력은 볼가로 진출할 수 있는 도시 중심부 점령을 지향하였다.

도시에서의 싸움은 매우 맹렬하고 치열한 특성을 나타내었고 스탈린그라드 시가 및 광장에서 거의 쉬지 않고 지속되었다. 소련군의 지구성과 완강함은 베어마흐트 장군들을 놀라게 하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독일 장군 H. 도에르 장군은 후에 이렇게 썼다: "모든 집, 공장, 급수탑, 제방, 벽, 지하실 및, 각각의 쓰레기더미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심지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이런 막대한 탄약 소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군과 적 사이의 간격은 매우 좁았다. 대규모의 항공대 및 포병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근접전 지역에서 탈출하는것은 불가능했다. 러시아는 지형과 위장과 관련하여 독일을 능하가였고 개별 가옥에서의 엄폐 전투에 숙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방위를 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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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 1942년 가을

 


9월 14일은 방위의 위기일 중 하나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서사시를 자아내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2 역과 엘리베이터 지역에서 완강한 전투가 발생하였다. 9월 15일 막대한 손실의 댓가로 적은 도시 중심부의 102.0 고지 ─ 마마예프 쿠르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제13 근위 및 제112 소총병 사단이 격렬한 전투의 결과로 적의 고지를 재탈환하였다.

9월 13일-26일간 적은 제62군 제대 및 부대를 내몰고 도시 중심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적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의 볼가 강 유역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역 소유권을 두고 주인이 13번 뒤바뀌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스타브카 VGK 는 방위군을 국가 깊숙한 곳의 예비로 지속적으로 보강하였다. 그리하여, 7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 스탈린그라드 방면에는 55개 소총병 사단, 9개 소총병 여단, 7개 전차 군단 및 30개 전차 여단이 도착하였다.

전선 구성의 증가와 이들 회랑의 큰 폭 연장에 의해 스타브카 VGK 는 9월 28일 남동부 및 스탈린그라드 전선 단일 사령관 지시를 폐지하였고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돈 전선 (사령관 ─ K.K. 로코소프스키 중장) 으로, 남동부 전선을 스탈린그라드 전선 (사령관 - A.I. 예료멘코 상장) 으로 개칭하였다.

스탈린그라드로의 적의 두 번째 강습은 9월 28일부터 10월 8일에 있었다. 독일 최고사령부는 파울루스에게 최근시일 내에 어떠한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략>..

스탈린그라드 벽에서의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9월 27일부터 10월 4일까지 도시 외곽 붉은 광장 및 바리케이드 노동자 거주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동시에 적은 도시 중심부 마마예프 쿠르간 지역과 오를로프카 지역의 제62군 우익으로 공세를 펼쳤다. 독일 부대의 진출 속도는 하루 동안 100-300m 였다.

1942년 10월 첫날 제62군 제대 및 부대는 회랑 폭 25㎞ 의 볼가 우안을 낀 방위를 점령하였다. 이 경우 강안에서 전방 끝단의 이격은 일부 구역에서 200m 를 넘어서지 못했다. 비록 적의 손에 이미 도시 지방 7개중 5개의 영토가 넘어갔지만, 그들은 도시로 군, 무장, 식량, 연료 공급 및 부상자를 후송하는 정기선이 운항하는 중앙 부둣가 점령에 실패하였다.

독일 최고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의 행위에 매우 불만족함을 표명했고 사령관에게 도시 전체를 신속히 점령할 것을 재촉하였다. 10월 전반기 동안 독일로부터 제6군 보강을 위한 추가적인 병력이 재배치되었다: 증원 20만 명, 30개 포병 대대 (1000문 가량), 도시 강습 및 시가전을 위한 40개 공학-강습 대대. 제62군 제대에 비해 병력과 수단에 있어 4-5배 우위에 있었다.

세 번째로, 다량의 화력 수단을 동원한 가장 맹렬한 강습이 10월 14일 시작되었다. 제62군 제대 및 부대는 적에 의해 서로가 분리되었음에도 볼가 강 제방을 끼고 회랑의 방어를 지속하였다. 제138 소총병 사단 (사단장 - I.I. 류드니코프 대령) 은 군 주력으로부터 절단되었고, 폭 700m 및 종심 400m 로 강안을 따라 대열을 유지하였다. 사단 구성에는 합하여 500명의 병력만이 있었다.

적은 마마예프 쿠르간의 정상, 북쪽 및 남쪽 경사면을 차지하는데에 성공하였다. 동쪽 경사에는 1942년 9월 28일부터 1943년 1월 26일까지 제284 소총병 사단 (사령관 - N.F. 바튜크 대령) 부대가 10-11월간 하루에도 수 차례씩 공격에 노출되며 방위하였다.

충돌의 잔혹함은 최고점에 도달하였다. 전투는 각각의 구획, 골목, 각각의 가옥, 지상 어디에서든지 일어났다. 어느 한 집에서는 소련 및 독일 구분대가 서로 다른 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파블로프의 집" 의 투사들은 58일동안 이곳을 지켜내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업적으로 쌓게 되었다. 적은 폭격을 가하고 포병 및 박격포 사격을 실시하였지만 수호자들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파블로프의 집" 의 수호자들의 구성은 다국적이었다: 러시아인 11명, 우크라이나인 6명, 그루지야인, 카자흐인, 우즈벡인, 유대인 및 타타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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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국의 많은 인민들의 아들들을 수호한 Ya.F. 파블로프와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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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에서 장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이들은 단 하나 - 적을 무찌르고, 자유를 맹세하며 조국을 자립시키기를 갈망하였다. 모든 소련군의 모토는 저격수 V.G. 자이체프의 구절에서 나왔다: "볼가에 우리, 제62군 병사들과 지휘관들을 위한 땅은 없다. 우리는 버티며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V.G. 자이체프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게 된다.

한 달 간 제62 및 제64군 방위 라인 전체에 강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적은 소련군의 방위를 돌파하는데에 실패하였다. 이들은 단지 일부 지역, 볼가로 수백 미터만을 전진하였다. 독일군은 병력 및 화력 수단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강안 부분을 포함하여 도시 전체를 차지하는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와 그 측근들은, 그들의 스탈린그라드 점령 계획의 명백한 실패를 고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군의 새로운 공세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스탈린그라드로의 4번째 강습은 11월 11일 시작되었다. 제62군과의 전투에서 5개 보병 및 2개 기갑 사단이 투사되었다. 제62군의 지위와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이들의 구성에는 이하만이 포함되었다: 병력 - 47000명, 포 및 박격포 약 800문 및 전차 19대. 이 시기에 이들의 방위 라인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이 치열한 공세 전투의 광경을 독일 장교, 대대장은 다음을 보았다: "러시아군의 위치에 일제사가 끊임없이 떨어졌다. 여기엔 이미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아야 했다. 계속해서 중포의 포성이 울렸다. 일출하는 태양의 첫 번째 광선이 하늘을 비출 때 흑철십자의 폭격기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목표로 뛰어들어 폭탄을 쏟아내었다... 20m 까지 왔고 그들 (독일 보병) 은 이미 러시아군의 진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강렬한 화력에 노출되었다. 좌측에 짧게 기관총 난사가 가해졌다. 이미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포탄 분화구와 화점에서 러시아군 보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는 러시아군의 헬멧을 보았다. 우리의 진출 병사들이 땅에 쓰러지고 그들이 손에서 소총과 기관총을 내려놓는 모든 순간을 목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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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방위 공장에서 스탈린그라드의 수호자들



스탈린그라드 영토에서의 전투는 긴 휴식기나 소강상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전투는 계속되었다. 독일에 대해서 스탈린그라드는 수백, 수천의 독일 병사와 장교가 죽고, 전차와 항공기가 터져나가는 일종의 "풍차" 로 표현되었다. 독일 병사의 편지에서는 비유적이고 실제적인 도시에서의 전투 상황을 묘사하였다: "스탈린그라드는 - 지상에 현현한 지옥이고, 베르됭, 새로운 무기를 든 베르됭이다. 우리는 매일을 공격했다. 우리가 아침에 20미터를 전진하면, 러시아군은 밤에 우리를 다시 밀어내었다". 또 다른 독일군 상병의 편지에서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보냈다: "우리가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했다는 호외에 대해서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군은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11월 중순 독일군의 진출은 전체 전선에서 중단되었다. 적은 결국 수세로의 전환을 강요받았다. 이렇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략적 방위 작전은 종결되었다. 스탈린그라드, 남동부 및 돈 전선군은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의 적의 강력한 공세를 저지하고 역공을 위한 선제조건을 조성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이행하였다.

방위 전투 간 베어마흐트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 간 적은 사상자 약 70만, 포 및 박격포 2000문, 전차 및 강습 무기 1000대 이상 및 1400기의 전투 및 수송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볼가로의 멈추지 않는 전진 대신 적군은 스탈린그라드 지방에서 장기화된, 지독한 전투를 맞이하였다. 독일 사령부의 1942년 여름 계획은 실패하였다. 소비에트 군 또한 병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 총 644000명, 이 중 회복불능 - 324000명, 위생 - 320000명이었다. 무장 손실은 이하와 같다: 전차 약 1400대, 포 및 박격포 12000문 이상 및 항공기 2000기 이상.

1942년 10월 14일 베어마흐트 최고 사령부는 달성한 경계를 유지하고 1943년 공세 지속을 위한 조건 조성을 위해 소비에트-독일 전선 전체에서 전략적 방위로 전환함을 결정하였다. 군을 전략적 방위로의 전환으로 규정하는 작전 명령 제1호에서, 히틀러는 사실상, 동부로의 여름 공세 실패를 인정한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략적 방위 작전은 스탈린그라드의 결정적인 적 격멸을 목적으로 한 역공으로 붉은 군대의 전진을 위한 조건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최고 총사령부는 1942년 가을 형성된, 가장 유리한 조건이 창출된 소비에트-독일 전선 남익에 공세 작전 수행을 위한 결론에 도달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소비에트 군 역공 (1942년 11월 19일 - 1943년 2월 2일)

전략적 공세 작전 (스탈린그라드 역공) 은 남서부, 돈,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보로네즈 전선군 좌익이 볼가 소함대와의 공조로 1942년 11월 19일에서 1943년 2월 2일까지 실시하였다 (코드명 《우란》). 이는, 세라피모비치 지방과 클레트스크의 교두보를 타격하고 스탈린그라드 남부 사르파 호수 지역에서부터 군을 격멸하고, 적 타격 집단 익측을 감싸며, 칼라치-나-도누, 소베츠키 수렴 방면으로 공세를 확대시키고 직접적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주력을 포위하고 섬멸한다는 아이디어였다. 공세 개발 계획은 G.K. 주코프 대장과 A.M. 바실레프스키 상장이 지도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10월 1일부터 11월 18일까지) 스타브카 예비로부터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전선 강화를 위해 4개 전차, 2개 기계화 및 2개 기병 군단, 17개 독립 전차 여단 및 연대, 10개 소총병 사단 및 6개 연대, 230개 포병 및 박격포 연대가 이동하였다. 소비에트 군은 구성에 병력 113.5만 명, 포 및 박격포 약 15000문, 전차 및 자주 포병 무기 1500대를 보유하였다. 전선 VVS 구성에는 1900기의 전투 항공기를 보유한 25개 항공 사단이 배속되었다. 3개 전선에 도착한 계산 사단의 총 숫자는 75개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강력한 소비에트군 집단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 약 60% 의 소련군 병력 구성이 전투 경험이 전무한 젊은 신병들이었다는 것이다.

상대편의 "B" 집단군 독일 제6 및 제4기갑군, 루마니아 제3 및 제4군은 병력 101.1만 명, 포 및 박격포 약 10300문, 전차 및 강습 무기 675대, 전투 항공기 1200기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장 전투준비가 잘 된 독일군 제대는 스탈린그라드 지역에 직접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의 익측에는 광대한 전선을 방어하는 루마니아 및 이탈리아 군이 감싸고 있었다. 돈 중부와, 남부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 적의 방위는 충분한 종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서부 및 스탈린그라드 전선 주공 방면에서 대량의 병력 및 수단의 결과는 소련군의 적에 대한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 하였다: 병력 - 2-2.5배, 포병 및 전차 - 4-5배 및 그 이상.

남서부 전선 (사령관 - 중장, 1942년 12월 7일부터 상장, N.F. 바투틴) 군 및 돈 전선 제65군의 공세는 11월 19일 80분간의 포병 준비사격 이후 실시되었다. 일말에 가장 큰 성공은 25-35㎞ 전진한 남서부 전선군이 성취하였으며, 이들은 루마니아 제3군의 방위를 두 지역에서 돌파하였다: 세라비모비치 남서부 및 클레트스크 지역. 루마니아 제2 및 제4 군단이 격멸되었고, 이들의 잔여와 라스포핀스카야 지역에 위치하던 제5군단은 익측에서 둘러싸였다. 제65군 (사령관 - P.I. 바토프 중장) 제대는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하루의 끝에서 3-5㎞ 를 이동하였지만, 불가능하던 적의 제1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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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는 80분간의 포병 준비사격 이후 개시되었다

 


11월 20일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공세에 돌입했다. "최초로 "카츄샤" 를 연주하였다. 그 뒤에서 포병 및 박격포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 A.I. 예료멘코 상장이 기술하였다 - 공세 시작 전 합창곡을 듣는 경험은, 그 감정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지만, 이들은 조국의 강대한 자존심이오 승리의 신념이었다. 어제 우리는,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오늘 조국은 우리가 전진하기를 원한다...". 첫날 동안 소총병 사단은 루마니아 제4군 방위를 돌파하였고 남서부 방면에서 적 방위 20-30㎞ 로 침투하였다.

본부에서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북부 및 남부의 방위 돌파와 양익에서 루마니아군의 격멸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B" 집단군 구성에 예비는 실질적으로 부재하였다. 전선 다른 구역에서 사단을 철퇴시켜야 했다. 소비에트 군은 완강하게 공세를 지속했고, 파울루스군 집단을 남서부에서 크게 둘러쌌다.

2일의 전투 간 전선군들은 루마니아 제3 및 제4군을 크게 참패시켰다. 11월 21일 남서부 전선 제26 및 제4 전차 군단은 마노일린 지역에서 진출하여 칼라치 지역의, 돈으로 가는 최단 루트를 타고, 동쪽으로 선회하였다. 제26 전차 군단은 돈으로 통하는 교량을 점령하였고, 11월 22일 칼라치에 도달하였다. 남서부 전선 기동 제대는 스탈린그라드 기동 제대와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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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군은 공세를 지속했다

 


11월 23일 제26 전차 군단 부대는 신속하게 소베츠크로 이동하였고 제4 기계화 군단 제대와 합류하였다. 남서부 및 스탈린그라드 전선 기동 제대는 칼라치, 소베츠크, 마리노프카로 진출하였고 독일군 포위를 완료하였다. 포위망 내에는 총 병력 30만 명에 이르는, 제6군 제4 기갑군 구성의 일부인 22개 사단 및 160개 독립 부대가 포위되었다. 독일군에 대한 이러한 포위망은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기간에 일어나지 않았었다.

같은 날 라스포핀스카야에서 적 집단이 항복하였다. 이는 대조국전쟁에서 소비에트 군에 최초로 항복한 적의 대형 집단이었다. 라스포핀스카야 마을 지역에서 루마니아 2개 군단 총 27000명의 병사 및 장교를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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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한 포위된 적

 


독일 군단 정보장교는 상황의 조성을 이하와 같이 평가했다: "멍하고 혼란스러웠고, 우리는 적의 다수의 타격 방향, 그들의 우회 기동, 돌파 구획이 표시된 강렬한 붉은 선과 화살표로 가득한 전술지도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우리의 모든 예감은 이런 끔찍한 재앙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11월 30일 독일 군 집단에 대한 포위 및 차단 작전이 완료되었다. 소비에트군 전차, 기병 및 소총병 제대의 신속한 공세의 결과로 2개의 포위 전선 - 내부 및 외부가 형성되었다. 외부 포위 전선의 총 연장은 450㎞ 에 달했다. 내부 및 외부 포위 전선간의 최대 이격거리는 남서부 전선에서 100㎞, 스탈린그라드에서 20-80㎞ 였다. 작전 12일간 소비에트 군 진격 종심은 하루 6-20㎞ 로 진격하는 소총병 제대의 중간 속도 공세와 기동 집단의 경우 하루 35㎞ 진격속도로 40-120㎞ 였다. 그러나 이동하는 독일군을 포위망 내로 집어넣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포위된 적 집단의 숫자를 8-9만명으로 잘못 추산하였기 때문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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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11월 19일 - 1943년 2월 2일 소비에트 군의 역공

 


베어마흐트 최고 사령부는 포위망에 갇힌 제대 및 부대를 구출하려 시도했다. 이들의 봉쇄해제를 위한 기계획된 이 특수 작전은 "겨울의 폭풍" 이란 코드명을 얻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 30개 사단이 배속된 특수 집단군 "돈" 이 창설되었다. 작전 총 지휘자는 육군원수 E. 만슈타인이 임명되었고, 직접적인 지휘 및 실행은 육군상장 H. 호트가 담당하였다.

12월 12일 아침 "겨울 폭풍" 작전이 실시되었다. 강력한 타격이 코텔니코보 지역에 가해졌고 적은 소비에트 군의 방위를 돌파하여 일말까지 25㎞ 를 진격하였다. 예외적으로 다수의 전차가 사용된 강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계속해서 세가 강화되고 적극적인 항공 지원을 동반한 독일군의 맹공이 계속되었다. 12월 19일까지 호트 장군의 전차대는 포위된 집단까지 총 35-40㎞ 까지 다가갔다. 제6군 본부에는 이미 무선전보가 날아다녔다: "버텨라, 곧 해방이다!", "견뎌라, 우리가 간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파울루스가 호트 집단 방향으로 돌파하도록 허가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조건을 내걸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차지해야 한다!". 파울루스는 무선 응답으로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회신했다.

독일 기갑사단의 진격로에서 스타브카 VGK 예비 제2 근위 군 (사령관 - R.Ya. 말리노프스키 중장) 의, 신속한 진격으로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마주하였다. 이것은 아주 강력하고, 완전한 제병협동 제대 병력 구성 및 무장을 갖추었다 (병력 122000명, 포 및 박격포 2000문, 전차 470대). 치열한 대전이 12월 20-23일 미슈코프 강기슭에서 벌어졌고, 적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공세 능력을 모두 소진하였다. 12월 23일 말 이들은 수세로 전환을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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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군 지휘소. 왼쪽부터: 군 참모장 N.I. 크릴로프 소장, 군 사령관 V.I. 추이코프 중장, 군사 회의 구성원 K.A. 구로프, 제13 근위 사단장 A.I. 로딤체프. 1942년 12월

 


동시에 스타브카 VGK 는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간 서부 전선 (사령관 - I.S. 코네프 상장) 및 칼리닌 전선 (사령관 - M.A. 푸르카예프 상장) 군이 코드명 "마르스" 공세 작전 수행을 결정하였다. 비록 소비에트 군이 서쪽과 동쪽에서의 수렴 타격의 결과로 독일 제9군 (사령관 - B. 모델 상장) 주력을 격멸하고 적 30개 사단이 연계되어 적극적 공세 활동을 펼치던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한다는 것은 실패하였지만, 독일 사령부가 이 구역의 군을 주요 사건이 발생하는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투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더하여, 적은 이곳으로 4개 기갑 및 차량화 사단을 최고사령부 및 "중부" 집단군 예비에서 차출하기를 강요하였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포위 후 스타브카 VGK 는 동시에 이탈리아 제8군 주력, "홀리트" 작전 집단 격멸 및 스탈린그라드-로스토프 방면으로 역공을 확대하는 목적으로 돈 중부에서 포위된 집단을 제거하는 작전 (코드명 "사투른") 수행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2월 12일 코텔니코보 지역에서 제6군 봉쇄해제를 목적으로 독일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스타브카 VGK 는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대신 베셴스카야에서 니주니 치르에 이르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제8군 및 독일-루마니아 군 격멸과 서쪽에서 독일 제6군 봉쇄해제 타격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남부로 향하던 주공 공세를 남동쪽으로 선회시켰다 (작전명 "말리 사투른").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적 집단의 제거 작전은, 연기하기로 결정되었다.

공세 동안 12월 16일이 밝아왔고, 소련군은 8일 간 폭 340㎞ 에 이르는 적 방위를 돌파하였으며, 150-200㎞ 를 진격하고 "돈" 집단군 후방에 진출했다. 돈 중부에서 적 72개 사단이 격멸되었다. 그들은 12만 명을 손실하였다 (포로 6.05만). 소비에트 군의 손실 또한 9.57만 (이 중 2.03만 - 회복불능) 으로 상당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이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를 위해 예비를 소모하였고, 운명이라 예단하여 포위망에 갇힌 집단의 봉쇄해제 시도를 거부하였으며, 이는 스탈린그라드-로스토프 방면의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돈에서 이탈리아 군의 격멸은 로마에게 문자 그대로 충격을 주었다. 로마와 베를린 사이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실질적으로 독일의 동맹을 그만두었다.

이 시기 독일 제6군 제대 및 부대는 지상과 공중에서 단단히 봉쇄되었다. 그들이 점령한 면적은, 1500㎢ 이상이었으며, 경계의 연장은 174㎞, 남북 길이 - 35㎞, 동서 길이는 43㎞ 에 달했다. 포위망 외부 전선은 170-250㎞ 제거되었다.

소비에트 군에 의해 조직된 공중 봉쇄는, "포위망" 에 실질적으로 식량, 탄약, 연료 및 기타 수단의 조달을 상실케 하였다. 독일군은 추위 (12월 말 및 1월 기온은 영하 20-30℃ 에 달함) 와 기아를 경험했다. 병사들의 식단에 말고기는 사치가 되었으며, 독일군은 개, 고양이, 까마귀를 사냥하였다. 제6군 딩글러 대령은 재해를 이하와 같이 서술하였다: "...1942년 크리스마스까지 (12월 26일) 군은 인당 일일 100그램의 빵을 나눠주었고, 크리스마스 이후 배급량은 50그램으로 감소하였다. 이후 이 50그램의 빵은, 오직 전투 행위를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부대에만 배급되었다; 지휘부, 연대 및 그 상급대는, 빵을 배급받지 못하였다. 나머지는 액체 스프를 먹었고, 좀 더 여력이 남은 사람은 말뼈를 씹어먹었다".

독일 역사학자 F. 멜렌틴은 저서 "1939-1945년의 전차전" 에서 제6군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6군은 운이 다했고 이제는 파울루스를 구할 수 없다. 설령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히틀러가 포위망 돌파를 지시했더라도, 얼음의 대지로 뒤덮힌 회랑을 따라 로스토프로 퇴각할 수송 수단이 전무했던, 소진되고 기아에 시달렸던 군은 러시아의 포위망을 깨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베레지나 강으로 퇴각하던 시기의 나폴레옹의 군인들과 같이 행군 도중 전멸할 것이다".

제6군의 재해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령관은 총통의 무조건적인 요구사항 수행을 지속했다. <중략>.. 1942년 12월 28일, 이미 밝혀진, 베어마흐트는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집단 해방을 위한 힘이 없다는, 지시 2호에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의 의도는 제6군을 그들의 본영지 (스탈린그라드) 에 고수시키고 이들의 해방을 위한 전제를 창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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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강습 집단의 전투. 1942년 12월

 


스타브카 VGK 는 코드명 "콜초" 로 명명한, 포위된 집단의 제거를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작전의 실시는 3단계로 예견되었다: 1단계 ─ 포위 지역 서부 및 북동부의 적 절단 및 섬멸; 2단계 ─ 도시 근위에 있는 적군의 섬멸; 도시의 적 잔여 집단 제거; 1943년 1월 4일 작전 계획이 스타브카 VGK 에 의해 승인되었다.

포위된 적 제거는 돈 전선 (사령관 - 중장, 1943년 1월 15일부 상장 K.K. 로코소프스키) 군에 할당되었다. 작전 개시 당시 전선군은 병력 21.2만, 전차 257대, 포 및 박격포 6860문, 전투 항공기 300기를 보유하였다.

포위된 독일 집단은 작전 개시 전까지 여전히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들은 이하와 같은 구성을 보유하였다: 병력 25만, 포 및 박격포 4130문, 전차 300대 및 항공기 100기. 그러나 포위된 군의 정신-심리적 및 물리적 상태는 매우 심각하였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으로부터는 "끝까지 버텨라!" 라는 전보를 계속 보내었다.

1월 8일 돈 전선 사령부는 포위된 병력들에게 무의미한 저항의 종식과 항복 조건의 수락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스타브카 VGK 대표단 N.N. 보로노프 및 돈 전선 사령관 K.K. 로코소프스키가 서명한 최후통첩은 무선으로 F. 파울루스의 본부에 전송되었으며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독일 제6군 사령부는 서면으로 소비에트 사령부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돈 전선군은 1943년 1월 10일 아침 공세를 시작하였고 거의 동시에 모든 방면에서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왔다. 절망적인 적은, 소비에트 군의 공격을 고집스럽게 격퇴했다. 이를 통해 적이 군 보급의 주요 실시로였던 피톰니크 지역의 비행장 손실과 같은 상황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령부는 항복 제안을 다시 거절하였다.

1월 24일 F. 파울루스는 무선으로 총통 본부에 보고하였다 (축약함): "...전선 남부, 북부 및 서부에서 군기가 해이해지는 현상이 식별되었습니다. 군의 단일한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18000명의 부상자들이 가장 기초적인 의료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선은 붕괴하였습니다... 더이상의 방어는 무의미합니다. 파국이 불가피합니다. 아직 남은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항복 권한의 즉각적 부여를 요청합니다. 파울루스".

히틀러는 격분하며 짧은 전보를 회신하였다: "항복을 금한다! 군은 마지막 한 명, 마지막 한 발까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해야 한다!".

1월 26일 말 제21군 (사령관 - I.M. 치스탸코프 중장) 부대가 붉은 시월 마을 및 마마예프 쿠르간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로부터 공세하던 제62군 부대와 합류하였다. 도시의 적은 두 부분 - 파울루스를 필두로 하는 남부 집단 (9개 사단이 잔류) 및 "트락토르" 및 "바리카디" 공장 지역의 북부 집단 (12개 사단 잔류) 으로 절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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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에서 합류한 제62군과 제21군 병사들의 만남

 


1월 28일 적 남부 집단은 또 두 환절로 절단되었다. 이제 스탈린그라드에는 패배 전투를 지속하는 독립된 세 집단이 형성되었다. 1월 31일 밤 파울루스는 백화점 지하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에 제6군 참모장 A. 슈미트 중장을 들여보냈고 단어가 쓰여진 종이를 건냈다: "육군원수로 진급함을 축하합니다". 이는 히틀러로부터 "포위망" 으로 송신된 마지막 무선전보였다. 1월 31일 남부 집단은 무의미한 저항을 중단하기를 강요받았다. 같은 날 제6군 사령관은 본부 장군 및 장교들과 함께 포로로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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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원수 F. 파울루스와 그 휘하 장군들의 투항

 


K. 스트래커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6군 북부 집단은 무의미한 피의 저항을 계속했다. 히틀러 본부에서 이 집단에 지령서가 내려졌다: 마지막 한 발까지, 죽을 때까지 싸우며, 포로로 투항하지 말 것. 소비에트 사령부는 이 집단에 강력한 화력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6㎞ 의 구역에 총 1000문의 포 및 박격포가 집중되었다. 2월 화력의 눈사태가 적의 위치에 떨어졌다.

제65군 사령관 P.I. 바토프 중장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저술하였다: "...그리고 모든 위력이 쏟아졌다. 3-5분 후 참호, 지하실, 전차 밑에서 나치들이 튀어오르고,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무릎을 꿇었으며, 미친 사람들은 하늘에 손을 뻗었다. 일부는 엄폐물로 되돌아왔고 연기에 숨어 다시 뛰어들었다...". 동시에 적에게 항공대 폭격이 가해졌다. 독일군 병사들과 장교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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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한 독일군

 


2월 2일 적 북부 집단의 군이 항복하였다. K. 스트래커 장군이 이끌던 4만 이상의 독일군 병사 및 장교들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볼가 강안의 전투 행위는 중단되었다. 1943년 1월 10일부터 2월 2일까지의 포위된 독일 집단의 제거 동안 돈 전선군은 22개 사단 및 149개 부대를 격멸하였다. 장교 2500명 및 장군 24명을 포함하여 91000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포위된 적 제거 이후 전장에서 적 약 14만명을 발굴하고 매장하였다.

스타브카 VGK 대리인 N.N. 보로노프 포병 원수 및 돈 전선군 사령관 K.K. 로코소프스키 상장은 최고 총사령관 I.V. 스탈린에게의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시에 따라, 돈 전선군은 1943년 2월 2일 16:00 에 스탈린그라드의 적 집단의 격멸 및 섬멸을 완료하였습니다.

포위된 적 집단의 완전한 제거로 인해 스탈린그라드 시와 스탈린그라드 지방의 전투 행위는 중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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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가 게양된 스탈린그라드.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단지 대조국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전체에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비에트 무장력의 찬란한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는 단지 대조국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전체에 있어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이의 진행 동안 파시스트 군은 소비에트-독일 전선에서 활동하는 세력의 사분지 일을 손실하였다. 독일 제6 및 제4기갑군, 루마니아 제3 및 제4군과 이탈리아 제8군이 격멸되었다. 사망, 부상, 포로 및 행방불명된 적의 총 손실은 약 150만에 달하였으며, 이에 관하여 독일에서는 전쟁 중 처음으로 국가적 애도를 선포하였다. 붉은 군대의 손실은 약 113만 (이 중 48만이 회복불능) 이었다. 전략적 이니셔티브는 확실하고 결정적으로 소비에트 최고 총사령부의 손에 들어왔으며, 붉은 군대의 총체적 공세 개발 및 점령된 USSR 영토에서 침략자들을 대규모 축출하는 조건이 창출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는 소비에트 연방과 그 무장력의 국제적 권위를 끌어올렸고, 대히틀러 동맹은 굳건해졌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는 전 독일에 있어 정신-심리적 충격을 불러왔고, 위성국들의 신뢰를 훼손하는, 대외정치적 입지를 흔들었다. 일본은 USSR 에 대한 군사적 행위의 시작을 부적절한 것으로 확신했고, 터키는 독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유지하였다.

독일의 작가들은, 종종, 독일의 진정한 패배로 간주되는 소비에트-독일 전선에서의 사건을 편향적으로 서술하도록 강요받았다. Z. 베스트팔 장군은 이렇게 저술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는 독일 인민과, 그 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독일의 전 역사에서 이러한 다수의 군의 끔찍한 죽음은 전무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W. 괴를리츠는 저서 "제2차 세계대전사" 에서 이를 강조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재앙은 단지 대내정치적 입장에 있어 크게 선회했을 뿐 아니라, 대외정치적으로도 그러했다. 이는 유럽의 독일 점령지 전체에서 커다란 충격을 불러왔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붉은 군대와 소비에트 군사술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선 집단의 전략적 방위 및 공세 작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대한 적 집단의 포위 및 섬멸을 완수하였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소비에트 군의 불굴의 인내, 용기와 거대한 영웅정신의 결과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동안 발현된 전투 공적에 있어, 44개 제대 및 부대에 스탈린그라드, 압가네로보, 돈, 바사르기노, 보로포노보, 지모프니키, 칸테미로프카, 코텔니코보, 스레드니 돈, 타친 명예 호칭이 부여되었고, 55개는 - 훈장, 83개는 - 근위로 전환되었다. 수만의 병사 및 장교들이 정부 포상을 수여받았다. 112명의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서훈받았다.

대조국전쟁 승리 20주년 볼고그라드 시의 영웅은 레닌 훈장과 "졸로타야 즈베즈다" 메달을 수여받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를 영속화하기 위해 1942년 12월 22일부터 USSR 최고 회의 간부회 칙령으로 전투 종결 이전까지 전투에 참가한 70만명에게 "스탈린그라드 방위를 위하여" 메달을 수여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붉은 군대의 승리는 모든 소비에트 인민의 광대한 정치적 및 노동적 열정이 수반되었다. 이들은 갈색의 전염병으로부터 USSR 영토의 조속한 해방을 위한 신념을 지녔고, 전선의 투사들의 정신적인 영을 강화하며, 후방에서 적과 싸우며 전선에 모든 필요품을 보장하였다.

1943년 2월 2일의 날은 1995년 3월 13일 연방 법령 제32-F3호 "러시아의 군사적 영광의 날 및 추모일에 대하여" 에 의해 러시아의 군사적 영광의 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비에트 군이 독일-파시스트 군의 격멸하는 날로 기념되고 있다.

 

세르게이 아프트레이킨, 역사 과학 석사, 부교수,

러시아 연방군 총참모부 군사 아카데미 (군사사) 과학-연구 기관 수석 연구원,

삽화는 http://www.stalingrad-battle.ru 에서 출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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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폴라리스 2016.05.12. 20:48
러시아어로 된 원문 링크나 발췌한 도서 이름을 알려주시면 출처 확인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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