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chosun.com/xqon/7264757

 

august 의 軍史世界

 

됭케르크의 미스터리 [ 3 ]

 

 

 

마른의 악몽

 

대성공이 눈앞에 보였음에도 독일군 수뇌부는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을 떠올렸는데, 바로 26년 전 겪었던 '마른 전투(Battle of Marne)'였습니다.  프랑스가 수도를 보르도(Bordeaux)로 옮겨야 하였을 만큼 제1차대전 초기의 전황도 지금처럼 독일군에게 절대 유리하였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참호전의 늪에 빠져 결국 패전하였던 것은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단 한 번의 결정적인 프랑스의 반격에 의해서였습니다.

 

3-1.jpg

[ 지난 전쟁 당시에 독일은 마른 전투에서 결정적인 실기를 하였습니다 ]

 

이 때문에 훗날 베르덩(Verdun) 전투나 솜므(Somme) 전투보다 규모가 작았음에도 전쟁사에서 마른 전투가 차지하는 의의는 상당히 큽니다.  전쟁 개시 후 계속 독일에게 밀린 프랑스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반격함으로써 역사의 분수령을 만들었지만, 사실 이런 빌미는 독일 스스로가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계속 진격하여도 되는 상황에서 부대 간에 정보가 단절되어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3-2.jpg

[ 한 번의 실책은 참호전을 가져왔고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했었습니다 ]

 

이런 역사를 독일 전쟁지도부는 두고두고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일방적인 진격 중에도 부지불식간 출몰할 수도 있는 연합군의 반격을 항상 염두에 두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에 눈앞의 전과에 너무 고무되어 다음 대책을 게을리 한 대가가 어떠했는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신중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몸소 최전선에서 겪어 보았던 히틀러 또한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3-3.jpg

[ 1940년 프랑스 전선은 승자도 놀랄만한 예상외 결과였습니다 ]

 

당시 독일은 면(面)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체 선(線)으로만 전선을 돌파하고 있어서 의외의 변수에 대해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어느 전쟁 지휘부가 빠른 승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조그만 우려라도 있다면 이를 해소하고 다음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결정은 어쩌면 당연하였고 이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그의 공격 중지 명령은 신중함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3-4.jpg

[ 히틀러의 명령이 신중함의 발로였다면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

 

 

항복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

 

이와 더불어 됭케르크의 미스터리와 관련하여 많이 언급되는 또 다른 주장이 '항복 유도설'입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히틀러는 이점도 걱정하였는지 모릅니다.  고양이를 물어도 쥐가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고양이는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20개 사단 규모의 연합군을 됭케르크 해변으로 밀어붙여 포위를 완성하였지만 그 이상의 압박은 오히려 격렬한 최후의 저항을 불러올 가능성이 컸습니다.

 

3-5.jpg

[ 너무 강한 압박은 극렬한 저항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

 

그러한 상황은 독일군의 출혈도 강요당할 가능성이 충분히 예견되므로 당연히 이 정도에서 총을 쏘지 않고 항복을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였습니다.  당시 포위된 적에게 살포한 항복 권유 전단을 보더라도 그러한 독일의 의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전쟁 중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3-6.jpg

[ 연합군 측에 살포 된 항복 권유 전단 ]

 

항복을 권유하였다면 적어도 최후통첩 전까지 상대에게 생각 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전쟁에서 적을 대하는 도리중 하나입니다.  이처럼 독일은 불필요한 출혈을 막고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공격을 멈추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히틀러의 공격 중지 명령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더구나 당시까지 독일은 단지 프랑스의 5퍼센트만 점령한 상태여서 전쟁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되던 상황이었습니다.

 

3-7.jpg

[ 포위망 밖에는 아직도 많은 프랑스군이 있었습니다 ]

 

프랑스는 이 전투를 끝으로 전의를 급속히 상실하고 얼마 후에 항복하게 되지만, 당시 됭케르크 포위망 밖에는 200여만의 프랑스군이 계속 남아 있어 포위망 안의 30만 연합군을 소탕해도 종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독일도 다음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여야 했고 그것은 전쟁을 지휘하는 자라면 당연한 대응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 |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밀리돔 | milidom 의 저작물은 이용약관에 의거해 이용 가능합니다. 이 라이선스의 범위 이외의 이용허락은 별도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글/댓글 작성 전 이용약관을 숙지는 의무사항입니다. 규정 미준수에 의한 책임은 온전히 작성자 본인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