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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의 軍史世界

 

됭케르크의 미스터리 [ 2 ]

 

스스로도 놀란 진격 속도

 

1940년 5월 10일, 독일군 120개 사단은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페인트모션을 써서 연합군 주력을 유인하는 역할을 담당한 독일 B집단군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였습니다.  이들이 연합군을 기만하여 최대한 안으로 끌어들이면 주공인 A집단군이 마지노선 북부를 우회하여 치고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A집단군 선봉을 담당할 사상 최초의 야전군 급 기갑부대인 '클라이스트 기갑집단(Panzer Group Kleist)'이 조직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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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군 주력이 아르덴 삼림지대를 통과하여 프랑스로 진격하였습니다 ]

 

이들이 침공로로 선택한 곳은 아르덴(Ardennes) 삼림지대였습니다.  산악지대로 주공을, 그것도 기갑부대를 통과시킨다는 계획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 독일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을 만큼 기상천외한 작전이었습니다.  연합군도 이곳을 방어선에서 제외하여 놓았을 정도였는데 독일은 이곳으로 집단화된 대규모 기갑부대를 신속히 통과시킨 후 천혜의 방어선인 뫼즈(Meuse) 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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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즈강을 도하하는 독일군 선봉 부대의 모습 ]

 

이러한 독일의 전략에 철저히 속아 앞에 파놓은 함정으로 빠져 들어가던 연합군 주력은 후방의 전략거점 세당(Sedan)이 독일군 수중에 떨어지자 순식간 배후가 절단되어 대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전략은 이른바 '낫질작전(Sichelschnitt)'이었는데, 당시 제38군단장이었던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이 A집단군 참모장 시절에 입안한 작전으로 처음에 최고 수뇌부가 기각을 하였지만 히틀러가 전격 채택하면서 실행이 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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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낫질작전을 기안한 만슈타인 ]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전혀 예상 밖이었는데 히틀러도 이를 "기적"이라 표현할 만큼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특히 5월 15일에 선봉 부대인 제15, 41, 19장갑군단의 3개 기갑부대가 20년 전에 무려 50만 명의 피를 쏟아 붇고도 넘지 못했던 솜므강(Somme)북쪽을 순식간 돌파하며 작전은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스스로도 놀란 이런 맹렬한 진격은 오히려 연합군의 역 포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들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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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군 진격로 남북에서 연합군이 협공을 실시한다면 위기가 닥칠 수 있었습니다 ]

 

전선 남부의 독일 C집단군이 마지노선 안에 틀어박혀 있는 100여만 명의 프랑스 남부집단군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만약 이들이 밖으로 나와 북진하고 동시에 포위당할 위기인 영-불연합군이 뒤로 돌아 남하하여 연결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A집단군 돌파로는 길게 신장되어 측면이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후위대가 쫓아오지 못할 만큼 선봉 부대의 경이적인 공격 속도를 독일은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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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진격을 마냥 즐거워할 수 없었습니다 ]

 

5월 17일 드골(Charles de Gaulle)의 프랑스 제4기갑사단이 남측 방에 갑자기 나타나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예상보다 작은 규모의 반격이었음이 밝혀졌지만 이처럼 독일군의 놀라운 진격을 독일 군부 내에서도 무조건 반색할 수도 없었다고 항상 뒤를 돌아다보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독일군 지휘부 간에 격렬한 논쟁을 유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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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갑사단장 당시의 드골(右) ]

 

무조건 진격하자는 제19장갑군단장 구데리안(Heinz Guderian)과 역 포위를 염려하였던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의 충돌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이후 사가(史家)들은 구데리안의 판단이 옳다고 쉽게 판정을 내리지만, 당시 앞을 쉽게 내다 볼 수없는 전황 한가운데 서있었던 클라이스트의 판단 또한 잘못되었던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히틀러도 위험한 부대 간의 단절이 없는 안전한 진격을 수시로 명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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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트(左)와 구데리안 ]

 

하지만 이러한 독일의 진격은 됭케르크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니 히틀러의 공격 중지 명령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위망 밖에 있던 연합군의 반격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예이고, 이것은 이후 히틀러가 연합군을 됭케르크에 몰아 놓고도 진격을 중지시킨 이유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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