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은 8월 9일에, 미군은 2월 24일에 공세를 개시했다. 항공전은 소련군과 미군 모두 압도적으로 수행했다. 소련군의 공군 전력이 만주의 비행을 공습하며 공중전을 수행하고 지상군을 지원했을 때, 관동군의 항공전력은 한반도나 일본 본토로 산개되며 유의미한 저항을 하지 못했다. 소련 공군은 당시에 항공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한 장성이 제공권 장악에 투입했던 전투기들도 지상지원에 투입했다면 더 효과적인 작전수행이 가능했을 거라는 아쉬움을 남길 정도로 압도적인 공중우세 달성에 성공했다. 미군은 본격적인 지상전역이 개시되기 전에 거의 1개월에 가까운 항공전역을 수행했다. 다국적군 공군은 개전 24시간 만에 적의 통합방공체계, 지휘통제시설 및 통신시설을 비롯한 핵심적 체계를 동시에 타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1개월간의 전역에서 이라크군의 공군전력 및 방공전력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라크 지상군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관동군이 다싱안링 산맥에 최소한의 병력도 배치하지 않던 덕분에, 그 결과로 제6 근위전차군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산맥을 넘었고 곧장 만주 중심부로 진격을 시작했다. 8월 10일에 제6 근위전차군은 이미 100-120 km를 진격했다. 제6 근위전차군은 8월 12일까지 관동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고 총 350 km를 진격하며 다싱안링 산맥을 완전히 넘는 데 성공했다. 제6 근위전차군의 소속 군단들은 원 계획보다 하루 앞서 목표들을 점령하며 진격했다. 8월 18일에 전선군 사령부는 제6 근위전차군에 신징과 평텐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8월 20일에 제5 근위전차군이 신징을, 8월 21일에 제7 근위기계화군단이 평텐을 점령했다. 제6 근위전차군은 8월 24일까지 총 1,100 km를 하루 평균 70 km의 속도로 진격했다.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 또한 고비사막을 건너며 관동군의 소규모 저항만 받았으며, 일본이 내몽골에 새운 괴뢰정부인 몽강자치연합정부의 병력을 주로 상대하며 베이징 인근까지 진격했다. 제39군은 하이룽-아얼산 요새지대를, 제36군은 하일라얼 요새지대를 공격하며 제6 근위전차군의 측방을 성공적으로 엄호하는 동시에 일본군 요새지대를 돌파했다. 의표를 찔린 관동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관동군 사령부가 소련 제6 근위전차군의 진격속도 때문에 신징을 고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퉁화로 후퇴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지만, 만주 서부의 방어를 책임지는 제3 방면군 사령관 우시로쿠 준(後宮淳) 대장은 관동군 사령부의 허가 없이 다렌-신징 선에 제44군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소련군과 결전을 치른다는 독단적인 결정을 했다. 이 때문에 관동군 사령부와 제3 방면군 간에 충돌이 벌어졌고 만주 서부의 일본군 방어에서 혼란을 초래했다.

  
미군의 주공인 미 제 7군단은 2월 24일에 오전부터 16 km 정면에 제1 보병사단의 주도로 24개의 공격통로를 개척했고, 14:30분부터 30분간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이후 군단 주력이 공세를 시작하며 목표 콜린스(Colins) 까지 진출했다. 2월 25일 06:00시부터 제7군단은 사우디 국경을 수비하던 이라크 정규군 병력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여 통로를 개척한 다음 사전에 계획된 작전목표들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제18 공수군단은 제7 군단의 좌측방에서 종심진격을 실시하며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들을 차단하였다. 제18 공수군단은 2월 26일에 유프라테스강 계곡에서의 적 병참선을 모두 차단하였고, 쿠웨이트전구로의 이라크군의 증원을 저지하였으며, 남부 이라크와 쿠웨이트 내에 있는 이라크군의 포위를 완료하였다. 제7 군단은 우측으로 선회하여 이라크 예비대를 공격하고, 공화국수비대를 격멸하기 위한 공격을 계속하기 전에 이라크 영토대로 종심 깊은 포위작전을 계속하였다.  제7 군단은 2월 26일에 공화국수비대의 타와칼나(Twakalna) 기계화사단과 조우하여 흡사 “마그마의 흐름 앞의 풀처럼” 격멸시켰다. 이후 제7 군단과 제18 공수군단은 “사이더 속에 압축되어 있는 공기 방울들이 들끓어 오르듯이” 맹렬하게 동쪽을 향하여 돌격했다. 두 군단은 공화국수비대를 바스라로부터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가로질러 미 공군이 “죽음의 상자”라고 표현한 고립지대로 몰아붙이는데 성공했다.


소련군과 미군은 조공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 제1 극동전선군의 제5군, 제1 적기군, 제35군, 제25군은 일본군 제1 방면군이 동부국경에 구축한 요새 방어선에 총체적인 기습을 라하며 돌파하였다. 제1 적기군과 제5군은 8월 14일에 만주 동부의 중심지인 무단장을 포위하고 소탕하며 일본 제5군을 섬멸했다. 제35군은 후터우(虎頭) 요새를 비롯한 관동군의 주요 거점들을 고립시켜서 작전수행에 변수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소련 제2 극동전선군은 쑹화 작전에서 아무르 분함대의 지원 아래 자무쓰(佳木斯) 일대의 제4 독립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아무르 분함대는 모니터함, 어뢰정, 초계정 등의 연안전력을 통해 지상군을 함포로 지원하고 지상군 및 해군보병 병력을 쑹화 강과 헤이룽장 강을 통해 수송하였다.


미군의 제1 해병구성군은 기만작전인 동시에 조공작전이기도 했던 “임박한 천둥”(Imminent Thunder)이라는 작전명이 붙은 작전계획에 따라 쿠웨이트로 조공을 실시하며 쿠웨이트에 진지를 구축한 이라크군을 어렵지 않게 돌파한 뒤 쿠웨이트시티로 진격했다. 다국적군 해군전력은 페르시아만의 재해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해상발사형 정밀무기들 및 항공모함의 함재기들로 육군과 해병대의 작전수행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소련군과 미군의 진격에서 가장 큰 적은 관동군과 이라크군이 아닌 군수보급이었다. 제6 근위전차군이 다싱안링 산맥을 넘었을 때의 유류 소비량은 소련군 병참장교들이 예측한 수치를 훨씬 뛰어넘어 버렸다. 제6 근위 전차군은 작전 3일차에 다싱안링 산맥을 넘자마자 자체 유류 비축분이 다 떨어져 버렸고 전선군 사령부에서는 급한 대로 수송기들을 투입해 유류를 공급해 주었다. 8월 11-16일 동안 제6 근위 전차군은 연료를 차량보다 수송기로 더 많이 받았으며 자바이칼 전선군은 제6 근위 전차군에 항공기로만 2,456톤의 유류를 보급했다. 미군 또한 예상보다 많은 연료를 소비했다. 미군의 주력전차인 M1 에이브람스(Abrahams) 전차의 연료소모량은 전쟁 전의 예측치를 웃돌았다. 그리고 전투부대의 고속진격을 보급이 뒤따르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의 본질적인 이유는, 전투부대가 필요로 하는 보급물자의 종류와 양을 보급부대에 연락할 통신망이 제때에 구축되지 못하였으며, 동시에 후방에 주둔 중인 보급부대도 전투부대에 무엇을 얼마만큼 보급하여야 할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 전역에서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었다. 일본제국은 8월 15일에 항복 선언을 했고 관동군 사령부 또한 8월 17일부로 소련군과 항복교섭에 들어갔다. 관동군 사령부가 항복을 결정했을 때는 아직 소련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이었지만, 한반도로 철수에 성공한 관동군 단위부대는 없었다. 소련군은 실질적으로 완벽한 포위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미 제7 군단과 제18 공수군단에 포위될 위기에 처한 이라크군은 2월 28일에 사막의 폭풍 작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을 때 포위망 탈출에 성공한 병력이 거의 원 전력의 반 이상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본디 조공이었던 해병원정군의 공세가 지나치게 강력했고, 그 결과 이들과 맞서던 이라크군은 교전 대신 점차 쿠웨이트 영내로 철수작전을 감행하더니, 급기야 2월 25일 밤에는 주력부대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라크군은 슈워츠코프의 중부사령부가 의도한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다른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또한 군종간의 충돌이 다시 일어났다. 적 섬멸의 주체가 누가 될 것이냐를 둔 육군과 공군의 갈등관계 속에 상호간의 화력지원협조선(Fire Support Coordination Line, FSCL) 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지상군의 포위망이 미완성인데 공습이 시행되지 않는 공백을 틈타 이라크군의 탈출이 시작되었다. 제7 군단의 공세를 정면으로 상대한 타와칼나 사단은 궤멸되었지만, 함무라비(Hammmurabi) 사단과 메디나(Medinah) 사단을 비롯한 공화국수비대의 다른 사단들은 2월 26일부터 조기철수를 개시하며 포위망 탈출에 성공했다. 슈워츠코프는 파월에게 적이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고 보고했지만, 파월은 이런 상황은 백악관도 알고 있고 괜찮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실패는 종전 직후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1990년대 후반에 후세인이 반대 세력을 진압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더 나아가 이라크가 중동에서 반미 세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며 사막의 폭풍 작전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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