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은 기습을 달성하기 위한 기만에 많은 공을 들였다. 소련군은 만주 작전을 준비하며 거의 모든 명령을 구두로 전달하고 서식명령은 최소화하며, 작전의 전체 내용은 제한된 인원만 알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기밀의 누출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극동으로 이동하는 주요 지휘관들은 가명과 가짜 계급을 사용하여 공세가 임박했다는 징후로 보일 수 있는 핵심인원의 이동을 숨기려 했다. 또한 병력과 화물의 철도를 통한 이동은 주로 야간에 실시해 병력규모를 감추고, 가짜 병력 집결지, 가짜 공세구역을 만들고 실제 병력집결구역 및 공세구역은 여러 위장수단으로 감추고 무전으로는 일상적인 내용만 교신해서 감청을 피하려 했다. 여기에 인근 민간인들을 소개시키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하는 동시에 야전부대의 식량비축과 벌목을 금지하는 등 공세가 임박했다는 모든 징후를 은폐하려 했다.


이러한 기만은 성공을 거두었다. 관동군과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소련 현지의 외교관 및 정보원을 통해 극동으로 대대적인 군수물자가 수송되는 상황을 관측했음에도, 소련군이 극동에 배치한 사단 수가 그들이 침공준비의 척도로 판단한 60개 사단 이상이 되어야 공세를 시작할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일본의 정보 전력은 당시 소련군이 극동에 45개 사단을 배치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60개 사단 이상이 배치되려면 1946년 봄까지 시간이 소요될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관동군이 예측한 소련군의 사단 수와 실제 사단 수의 차이는 거의 2배 이상이었다. 관동군 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이나 제5군 사령관 시미즈 노리쓰네(清水規矩) 중장 같은 주요 지휘관들이 침공 당일에 부재중인 사태는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보실패는 소련군의 기만이 주효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일본군은 19세기부터 형성된 러시아혐오증에 기초하여 소련군을 명령을 문자 그대로 따르고 둔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무능한 군대로 파악했으며 더 나아가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해 보급선만 끊으면 소련군을 단시간 내에 격멸할 수 있으리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관동군의 부대와 장비가 다른 전선으로 지속적인 차출을 당하자 한때 100만에 육박했던 관동군의 전력은 만주국군까지 합쳐 병력 75만에 사단 24개, 혼성여단 9개, 전차여단 2개 수준으로 축소되었으며 실제 전력은 종전의 1/3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 때문에 “일본 본토의 후위적 존재”로 전락한 관동군은 개전 시 소련 극동지방을 공격한다는 공격적인 작전계획을 방어적으로 수정하여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하면 소만국경에 배치한 요새 지대에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주력을 후퇴시켜 만주 중부에 집결시킨 다음 요새지대를 돌파하고 장거리를 진군하여 전력이 소모된 소련군과 결전을 치른다는 개념의 작전계획을 채택했다. 그러나 관동군 사령부는 고비사막과 다싱안링 산맥의 험한 지형에서의 대규모 기동작전 수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아주 작은 규모의 공세를 제외하고는 다싱안링을 넘어 공세를 할 수 없고, 소련군에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관동군은 다싱안링 산맥에 단 1개 연대도 배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소련군은 8월 9일에 공세를 개시했을 때 총체적인 기습에 성공했고 일본군을 혼란에 빠트렸다.


이라크군 수뇌부는 미군이 페르시아만에 직접 상륙하거나 와디 알 바틴을 통해 쿠웨이트의 이라크군을 공격하는 사태를 가장 우선순위로 대비했다. 쿠웨이트전구 내에는 최소한 43개 사단이 강력한 작전 및 전술적인 예비로 종심 깊게 배치되었는데, 상륙공격에 대한 이라크의 우려를 증명하듯이, 해안을 연하여 최소 4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사단이 쿠웨이트시의 해안구역을 강력하게 요새화하면서 지뢰지대와 장애물지대 뒤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 뒤에는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을 따라 배치된 최소 6개 공화국수비대 사단과 육군의 기타 기갑, 기계화 및 보병사단 등 전구 예비부대들 배치되어 쿠웨이트전구 내 이라크군의 중추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군의 주공이 개시될 서부 이라크에는 2개 기갑연대와 1~2개 보병사단만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치에는 다국적군 사령부가 시행한 적극적인 기만이 영향을 끼쳤다. 중부사령부는 다국적군의 주공이 와디 알 바틴 강의 동쪽으로 다가올 것이며, 이 같은 주공을 쿠웨이트 시 부근에서 상륙공격과 쿠웨이트 해안을 따른 해병 공격이 지원할 것처럼 위장하는 기만개요를 만들었다. 기만을 통해 요망한 효과는 공화국수비대와 정규 기갑 전력 및 기계화사단들을 와디와 해안 주변에 묶어 놓는 것이었다. 기만을 위해 미 제1 기병사단이 1월 말에 와디 알 바틴으로 이동했고, 동쪽 해안에서는 미 제2 해병원정군이 1월과 2월에 걸쳐 포괄적인 형태의 상륙훈련과 경로개척 훈련을 감행했다. 이 같은 훈련 상황은 국제사회와 미국의 언론 매체가 지속적으로 보도되었지만 주공인 사막 지역으로의 부대, 장비 및 군수물자 이동에 관한 부분을 보도한 언론인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보도 덕분에 후세인은 다국적군의 기만작전이 실제 작전이라고 보다 확신했다. 많은 미군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언론인들과 대변인들의 발언을 들으며 후세인의 선입견이 보다 강화되었다. 후세인은 1990년 7월 26일에 에이프릴 글래스피(April Glaspie)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당신들의 사회는 한 번의 전투에서 10,000명 이상의 손실을 견디지 못합니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이라크군이 큰 피해를 입더라도 다국적군에 출혈을 강요하고 쿠웨이트를 계속 점령하고 있으면 서구 국가들이 인명피해와 전쟁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이라크의 쿠웨이트 합병을 묵인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이러한 판단아래 전쟁이 발생하면 다국적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소모적인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때문에 후세인은 다국적군이 반드시 기존에 예상된 주공축선으로 공세를 해 주기를 원했다. 여기에 더불어 미 제1 기병사단이 와디 알 바틴에서 기만공격을 실시해 이라크군 5개 사단의 주의를 끌었다. 제1 기병사단은 사격을 주고받고 타격을 조금 주고는 와디에서 물러났고 서쪽으로 가서 제7 군단과 합류해 군단의 작전 예비대가 되었다. 반면 이라크군은 사막 지역을 관통한 형태의 공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군이 관통하게 될 그 지역에서 이라크 군도 예전에 훈련을 시행한 적이 있었으나, 연습 당시 이들은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사막 지형에서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부 지역으로, 즉 이라크 국경을 넘어 다국적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후 콜린 파월 (Colin Powell) 합참의장이 회고록에서 “페르시아만으로부터 쿠웨이트로 상륙할 것 같은 암시를 주웠던 우리의 움직임에 그들은 속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것도 우리의 레프트 훅을 막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다.”고 쓰며 기만작전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고 자평할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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