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은 만주 작전의 준비를 위해 종래의 극동전선군에서 연해주군집단을 분리 창설하고, 자바이칼 전선군을 증강하기로 1945년 3월에 결정을 내렸다. 극동으로 전속 발령된 부대들은 4월 초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4월 30일에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 제39군, 제53군, 제6 근위전차군, 제5군 등을 만주로 배치하기로 결정되었다.  5~7월 사이에 스타브카는 제39군과 제5군을 동프로이센으로부터, 그리고 제53군과 제6 근위전차군 및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을 프라하 근처로부터 극동으로 이동시켰다. 이 부대들은 요새 돌파와 산악전에 경험이 많았다. 이때에 메레츠코프가 사령관인 카렐리야 전선군 사령부와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도 극동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연해주군집단은 제1 극동 전선군으로, 기존의 극동 전선군은 제2 극동 전선군으로 개칭되었다. 극동으로의 병력배치는 1944년 말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으로는 대독전 종전 직후부터 시작되어 8월까지 3개월 남짓한 시간 내에 완료되었다. 
  
소련 극동사령부는 서쪽의 자바이칼 전선군과 동쪽의 제1 극동전선군이 동시에 주공을 개시하고 북쪽의 제2 극동전선군이 조공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골자로 하여 관동군에 대한 양익포위를 계획했다. 특히 공세의 중점은 자바이칼 전선군 소속이자 안드레이 크랍첸코(Andrei Kravchenko) 상장이 지휘하는 제6 근위전차군이었다. 제5 근위전차군단, 제7 근위기계화군단, 제9 근위기계화군단으로 구성되었고 전차 1,000대 이상을 보유한 제6 근위전차군이 맡은 임무는 몽골과 만주의 자연적 경계선인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 최대 속도로 만주 중부로 진입하여 만주국의 수도이자 관동군 사령부가 있는 신징(新京)과 주요도시인 평텐(奉天)을 비롯한 목표들을 점령하고 제1 극동전선군의 기동집단인 제10 기계화군단과 합류해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다싱안링 산맥을 작전술적 수준의 기동부대가 넘는다는 작전은 산맥에 관동군이 최소한의 병력도 배치시키지 않은 취약한 지점이라는 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리고 그에 따른 강력한 기습효과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와 극동사령부, 자바이칼 전선군 사령부 모두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산맥을 넘는 작전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실보다 득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 특히 말리놉스키는 1944년 8월에 실시된 야시-키시네프(Iassi-Kishnev) 작전에서 크랍첸코와 그의 제6 전차군에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을 주공축선으로 삼아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에 대대적인 기습을 가하는 작전을 통해 성공을 거둔 바가 있어서 임무수행에 적절했다. 제6 근위전차군의 우측방은 좌측방은 이사 플리예프(Issa Pliev) 상장의 소련-몽골 기병-기계화 집단이 엄호하며 내몽골로 진격하고, 우측방에서는 제39군이 하이룽(海龍)-아얼산(阿爾山) 요새를 공격하기로 계획되었다. 제36군은 일본군이 소련군의 공세축선이 될 거라 예상한 하일라얼(海拉爾) 요새를 공격해 일본군의 시선을 끌기로 계획했다.

 

미국은 사막의 방패 작전을 통해 제82 공수사단을 사우디아라비아에 긴급 전개시켰고, 그 후속으로 제1 전술항공단, 제24 보병사단(기계화), 제1 기갑사단 및 제2 기갑사단의 1개 여단, 제3 기갑사단 등을 수 주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에 전개시켰다. 미군은 새롭게 구성한 수송사령부(TRANSCOM)에서 군수보급을 중앙통제했다. 2개월 동안 14개의 공군 비행단과 3개 육군사단, 해병원정부대의 삼분의 일이 서남아시아에 전개되었다. 18만 4천여 명의 병력이 베트남에 수송되는 데 만 일 년이 소요되었으나 사막의 방패 및 폭풍 작전 시에는 88일만에 수송을 완료하였으며 걸프전이 최고도에 달하였을 때 수송된 총 병력은 53만 9천여 명이었다. 그러한 대규모 병력이 필요로 하는 군수보급품은 원 소요량의 몇 배를 여유분으로 비축했는데 보급품의 대부분이 탄약이었던 점에서 이를 “철의 산”(Iron Mountain)이라 칭했다.

 

제다이 기사단은 작전의 기획과정에 참여하며 백악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중부사령부에 지속적으로 조언을 하고 작전기획수립에 참여하였다. 슈워츠코프는 1990년 9월 중순에 조지프 퍼비스(Joseph Purvis) 중령이 이끄는 최초의 제다이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항공작전에 이어서 지상공격으로 나가는 것을 전제로 적군의 배비 상황 및 지형을 잘 연구한 다음, 현재 병력을 갖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구축하는 최선의 방법을 검토하여 2주안에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제다이 기사단은 기획수립과정에서 그들을 가르쳤던 SAMS의 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인물들 중에는 소련군의 군사이론으로 작전술을 교육했던 슈나이더와 키프가 있었다. 키프는 전후에 글랜츠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고 밝혔다.

짐(Jim)은 (...) 문제를 연구한 후 해답을 주었습니다. "이라크군의 중점(Center of Gravity)은 어디인가?" 짐과 나는 이라크군의 중점이 공화국수비대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작전의 목표는 만주에서 소련군이 목표를 적의 군사력(관동군)으로 잡고 지리적 지점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과 비슷했습니다.

 

키프와 슈나이더는 문하생이었던 “제다이 기사단”에게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정규군을 포위하고 아군을 구출하고자 그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이라크의 공화국수비대를 측방기동으로 격멸하라고 조언했다. 그리하여 제다이 기사단이 10월 6일에 발표한 초기 기획과 슈워츠코프와의 논의를 거쳐 10월 21일에 발표한 최종작전계획은 2개 군단으로 이라크군 우익을 이라크군의 노출된 우익을 와디 알 바틴(Wadi Al-Batin) 계곡의 서측에서 공격하는 것을 골자로 삼고 있었다. 슈워츠코프는 제다이 기사단의 조언에 따라 1990년 10월 15일에 참모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국경의 와디 알 바틴(Wadi Al-Batin)의 서쪽에서 미 제3군(육군구성군) 소속인 프레더릭 프랭크스(Frederick Franks) 중장의 제7 군단과 게리 럭(Gerry Luck) 중장의 제18 공수군단에 의한 포위작전을 계획하라고 지시하였다. 슈워츠코프가 “레프트 훅”(Left Hook)이라 칭한 포위작전의 목적은 다른 다국적군 군대가 쿠웨이트를 향해 조공을 실시하는 동안, 주공부대가 이라크군 주력부대의 후방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공격의 주목적은 공화국수비대를 격멸시키는 것이었다. 확정된 작전의 기본구상은 이라크군 주력을 쿠웨이트 정면에서 고착 및 견제하고, 미군 주력을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의 이라크군 우측방에 투입하여 일익 포위를 실시, 공화국수비대 및 기계화부대를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즉, 먼저 제1 해병원정군(영국 제1 기갑사단 증강)과 아랍합동군이 쿠웨이트를 공격하여 주공이 쿠웨이트 영내의 이라크군에게 지향된 것처럼 기만한다. 그 다음 육군부대 주력이 이라크 서부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해 공화국수비대를 포위 섬멸한다. 쿠웨이트 해방은 아랍합동군이 담당한다. 공세의 주공은 제7 군단으로 공화국수비대를 격멸하며, 제18 공수군단은 제7군단의 좌익에서 공격을 개시해 유프라테스강변의 국도 8호선을 차단하여, 바그다드로부터의 증원을 저지함과 동시에 공화국수비대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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