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그 극복-7

PKKA | 전쟁사 | 조회 수 97 | 2020.05.09. 16:40
편견의 학술적 극복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학자들의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틀을 짜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가르도프나 말콤 매킨토시, 피터 비거와 같이 미래의 전장에서 소련군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기 위해 소련군을 편견 없이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수지만 이미 50년대 말부터 등장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학자인 존 에릭슨은 당시에 모을 수 있던 최대한 많은 러시아어권 자료들을 동서간 해빙과 데탕트 시기에 축적하고 직접 소련으로 가서 당시의 주요 지휘관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의 목적은 적인 소련을 확실히 알기 위한 연구로, 비록 당시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최대한 편견 없이 소련군을 바라보며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접어들며 데이비드 글랜츠가 나타났다. 미군 장교로 베트남전 참전 이후 NATO에서 정보장교로 일하고 있던 글랜츠 중령은 정보기관들에서 입수한 소련측 내부 간행물들을 계속 번역했고 이 과정에서 서방의 시각으로 고정된 군사사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지속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983년에 포트 레븐워스 지휘참모대학 강사로 부임한 글랜츠는 소련 군사사와 군사술, 특히 소련 작전술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학술논문 저술과 강의를 하며 연구성과를 축적했고 제이콥 킵, 브루스 메닝, 그레이엄 터르브빌, 레스터 그라우 등의 자신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학자들 및 분석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은 갑자기 대두된 소련의 재래식 전력에 대한 대비 수요가 급증하였고, 또한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한 미군의 개혁 과정에서 동구권 군대의 개념인 작전술의 수용 논의가 대두되며 이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미군은 원래 독일군을 본받아서 능동방어 교리와 능동방어 교리 폐기 이후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을 모티브로 삼은 공지전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공지전 교리 또한 한계를 노출시키면서 소련군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미군은 이때 오랫동안 소련군의 개념이자 소련군이 전략과 전술 사이에 억지로 쑤셔 박은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긴 작전술과 작전술적 차원에 대해, 브루스 메닝의 표현을 빌리면 미군은 "악마의 제자"인 적국 소련에 학문적으로 패배했다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미 육군의 훈련과 교리 사령부(TRADOC)는 현재의 미 해외군사연구소인 소련군사연구소(Soviet Army Studied Office)를 창설하고 그 소장으로 이제 대령이 된 글랜츠를 임명하였다. 
 
글랜츠는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어권 자료들을 분석하고, 1986년에는 직접 소련을 방문해 미-소 학자들 간의 군사사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소련 학자들과 교류하고, 미국에서 소련 측이 군사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했으며, 동구와 서구가 어떻게 군사사에서 이견을 좁히고 접점을 찾을지 활발하게 논의했다. 이제까지 서구권의 자국사 서술을 전부 “부르주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며 오직 원색적인 비난만 해 왔던 소련의 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글랜츠가 편집장으로 활동한 『소련군사연구저널』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훨씬 개방된 소련의 학자들까지도 그 성과에 찬사를 바치며 이들에게 소련의 중요한 역사자료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재평가는 결국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의 고등군사교육과정(SAMS)에서소련군의 주요 이론가인 스베친, 투하쳅스키, 트리안다필로프의 저서들에 대한 강의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면서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적성국의 군사이론을 연구해 그 대처법을 찾으려는 목적을 넘어서서 그것을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된 것이다. 이건 편견의 극복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의 연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불가분의 관계인 깨끗한 독일 국방군 전설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의 집권과 동방정책은 오랫동안 독일인들에게 집단망각의 대상이었던 홀로코스트와 나치의 인종범죄들을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학술적 수준에서는 독일 국방군이 나치와 무관한 깨끗한 조직이 아닌 나치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전쟁범죄를 수행했으며 나치와 관계가 없어도 강력한 인종주의와 반민주주의, 반유대주의로 뒤덮인 조직이자 근본적으로 침략지향적인 조직이었음이 드러났다. 
 
학술적 성과의 대중화는 1995년에 관련 문제를 연구한 볼프람 베테, 만프레트 메셔슈미트 등이 주도한 “국방군 범죄 전시회”로 가속화되었다. 전시회는 1998년까지 독일 전국을 순회하며 독일 국방군의 범죄기록, 사진, 명령서 등을 전시하며 깨끗한 독일 국방군의 전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폭로하였다. 극우단체들이 전시회장 밖에서 시위를 벌이고, 참전자들이 주최측을 빨갱이라고 악을 쓰며 전시회장에서 전시품을 파손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있었지만,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독일 내에서 더 이상 영광스럽고 명예로우며 기독교 조국을 무신론자들로부터 지킨 국방군의 이미지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독일연방군은 국방군 시절의 전통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는다. 연방군은 구데리안과 롬멜이 대대장을 역임한 바 있던 고슬라르의 경보병(Jager) 대대본부였으며 현재 초등학교로 사용하는 건물에 건립된 구데리안과 롬멜의 기념비를 치워버리고, 국방군 장성의 이름을 딴 부대명을 라트비아에서 가짜 여권을 발급해 300여명 이상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고 그 대가로 총살당한 안톤 슈미트 상사의 이름을 따서 개칭하는 등 당시의 유산들을 청산하며 “제복을 입은 국민의 군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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