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그 극복-5

PKKA | 전쟁사 | 조회 수 61 | 2020.04.30. 17:49
미국에서 유행하는 편견
 
이러한 역사기술 경향은 오랫동안 서방의 역사 기술을 지배해 왔으며 지금도 그 유산이 남아 있다. 특히 미국 사회의 소련관이 극단화되면서 서구 세계에 더 잘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인들에게 소련은 사유재산과 신을 부정하는 사악한 무신론 전체주의 국가였고, 소련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소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가들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서로 직접 충돌할 일이  없어서 신문 국제면에서 소련이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은 대게 소련에 대해서 사전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며 극적으로 변했다. 미국 언론들은 삽시간에 소련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당시의 미국 언론에서 러시아인들은 독일의 야만적인 침략에 저항하는 용감한 사람들로 나타났고, 스탈린은 사악한 독재자가 아닌 현명하고, 강인하고,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 “엉클 조”(Uncle Joe)였으며, 소련군은 야만스런 군대가 아닌 전문적이고 과감한 군대고, 그걸 지휘하는 티모셴코 원수와 주코프 원수는 천하에 둘도 없는 명장으로 나타났다. 동부전선에 파견된 미국 종군기자들은 소련 군인들이 나치가 선전하는 데로 야만스런 사람들이 아닌 인간적이고 문맹이 퇴치되었으며 지적 수준도 좋은 사람들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러한 분위기 내에서 미국인들은 러시아인이 열등하고, 소련군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며 뭐든 것이 바뀌었다. 소련과 미국의 국익이 충돌하고, 조지프 매카시가 광적인 공산주의 사냥을 시작하면서 미국 언론들의 보도 태도는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엄연히 따지면 전쟁 전 미국인들의 소련 인식이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 냉전이 시작될 때의 보도태도는 사실 나치 선전기관들의 반공, 반소 선전의 맥락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현명하고 강인한 소련군은 “아시아인”의 피가 섞이고 독일 여성을 강간하는데 정신이 팔린 포악한 야만인이 되었고, 과감하고 뛰어나다고 보도된 소련군의 체계는 비효율과 무능의 극치로 보도되었으며, 스탈린은 다시 피에 굶주리고 세계적화에 광분하는 독재자로 보도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내에서 서구권 전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러시아공포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기존의 부정적인 러시아관이 반공주의와 소련에 대한 공포와 결함되었다. 그리고 위서 “표트르 대제의 유언”이 어떠한 사료비판도 거치지 않은 채 망각 속에서 부활하여 스탈린의 외교정책을 해석하는 주요 사료로 활용되었다. 이 맥락에서 미국인들은 문화적으로 더 친숙한 독일 장교들의 인식과 서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들에게 강한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독일 국방군의 군인들은 영미 세계에서 나치의 전쟁범죄와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사악한 소련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되었다. 
 
독일 자료의 문제
 
 그러한 맥락에서 형성된 소련군에 대한 인식 문제는 단지 독일 관점의 사료가 역사 서술에 주로 인용되었다는 게 아니었다. 그 자료의 신뢰성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구데리안은 회고록의 대부분을 프랑스 침공에서 제19 기갑군단을 지휘하던 때와 소련 침공에서 제2 기갑집단을 지휘하던 시절에 할애하고 있다. 이 시기는 구데리안과 독일 국방군에게 승리의 시기였는데 특히 소련 침공에 대해서는 1941~1942년 동안 제2 기갑집단의 지휘 경험을 주로 쓰고 있다. 이후 구데리안은 독일의 승세가 기울던 시절의 경험에 대해서는 전체에 비해 얼마 할애하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더 심각하다. 만슈타인의 회고록은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자신이 패배하던 시기인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는 딱 한 장으로밖에 다루고 있지 않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멜렌틴은 소련군에 대한 정보가 없이 소련군의 의도와 기도를 오해하고 서술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치르 강 전투에 대한 서술이 있다. 멜렌틴은 제1 전차 군단을 첫째로, 제5 기계화 군단을 둘째로 투입한 소련 제5 전차군을 상대로 한 독일 제48 기갑 군단의 훌륭한 작전을 기술했다. 1942년 12월 7~8일에 제11 기갑 사단은 제79호 집단 농장에서 제1 전차 군단의 돌파를 막고 19일에 제1 전차 군단을 격퇴하고는 후속한 제5 기계화 군단을 상대했다. 제11 기갑 사단의 전술적 상황에 대한 멜렌틴의 생생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멜렌틴은 전술적 성공 뒤에 벌어지고 있던 작전술적 재앙에 대해 기술하는 걸 회피했다. 사실 소련군 제5 전차군의 목적은 제48 기갑 군단의 신경을 끄는 것이었고 그 동안 북서쪽에서는 소련군이 이탈리아 제8군을 무너트리고 홀리트 분견군에 대타격을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멜렌틴은 소련 제1 전차 군단이 11월 19일부터 지속적으로 작전을 계속해 왔고 치르 강으로의 진격이 시작됐을 때는 그 전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할더의 주도로 작성되었고 오랫동안 소련군을 연구하는데 1차 사료로 쓰인 미 국방성 팜플렛들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에를 들어 국방성 팜플렛 중 《독일군의 소련군 돌파 시도에 대한 방어전술》에서는 1943년 8월 5~24일 동안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지연작전을 다루고 있는데 독일군이 하리코프에서 8월 18일에 철수했다고 쓰여 있다. 사실 독일군의 철수 날짜는 8월 23일이었다. 그리고 세계대전기의 공수 작전을 분석한 팜플렛에서는 실제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과 1943년 드네프르 강에서 수행한 대규모 공수 작전에도 소련군이 대규모 공수 작전을 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오류들이 정확한 사실인 양 섞여있으면 자연스럽게 팜플렛 전체의 정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상술한 바와 같이 독일 측의 자료 지배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할더와 만슈타인을 비롯한 국방군의 주요 인사들은 그들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패배에 길목에 접어들었을 때는 자세한 서술을 줄이거나 모든 것을 히틀러의 무능과 간섭 때문이었다는 좋은 핑계거리를 사용했다. 그리고 전쟁의 상대였던 소련군에 대한 자료는 부재했으며 후에 교차검증을 하면 무지에 의한 오류나 의도성 있는 오류가 모두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 자료의 지배는 서구의 역사서술을 오랫동안 지배했고,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 앨런 클락, 얼 짐케, 앨버튼 시튼 등의 학술적 저작들은 소련측 자료를 제대로 구할 수 없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독일측의 시선과 입장에서만 군사사를 보고 소련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하는 편향을 범했다. 존 키건과 앤서니 비버의 대중적 저작들에는 이게 더 노골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들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당시 서방 군대들의 소련군을 보는 인식을 투영했고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려 했다. 특히 대중에게 영향을 끼친 저자는 폴 카렐이었다. 폴 카렐은 학술적 글쓰기가 아닌 마치 기자가 독일군에 배치되어 전황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것 같은 대중적 글쓰기로 독소전쟁사를 기술한 두 권의 책을 저술했고 이는 서구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카렐의 책만 보면 자연스럽게 독일군 지도부의 인식과 행동에 동감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폴 카렐의 정체가 실은 나치당원인 동시에 일반친위대 대원이자 나치 독일의 외무부 대변인이었던 파울 슈미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슈미트는 독일군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독자를 감정이입 시키며 그 이면에 있던 끔찍한 범죄들을 성공적으로 은폐하는 교묘하고 치밀한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지어 무장친위대조차도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만드는 저서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서방의 인식에 부합하는 저자는 미국에 망명한 소련군 장교인 블라디미르 레준이었다.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총국 출신으로 빅토르 수보로프란 필명을 썼던 레준은 공산당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비효율성, 권력다툼과 암투가 비일비재한 국방성과 총참모부, 능력이 아닌 인맥과 연줄로만 가능한 고위직 승진 등등의 이미 있었던 서방의 고정관념을 재확인시키고 재생산하는 저서들을 출간했다. 그리고 현재는 소련이 1941년에 독일을 선제공격하려 했다는 음모론을 펼치고 있다. 미국 장교단과 안보 싱크탱크들은 펜타곤의 역사를 다룬 미국의 논픽션 작가 제임스 캐롤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충족적 편집증”에 따라 예산을 타내고 예산을 타내기 용이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동시에, 소련군이 실제로는 다양한 약점들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자기위안들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글랜츠는 “기교 없고, 유연성 없고, 예상 가능한 방법만 쓰는 적이 뛰어나고 유연한 적보다 마주 대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이 편견들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역사서술 뿐만 아니라 군의 교리에까지 반영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 미군과 나토군의 교리는 능동방어 교리였다. 이 능동방어를 요약하면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로 우크라이나에서 만슈타인이 펼친 기동방어를 모범으로 삼아 공간을 내주며 시간을 벌며 공세를 해 오는 소련군을 깊숙이 끌어들인 뒤에 측방에서 타격을 가하여 소련군을 섬멸한다는 교리였다. 이러한 교리의 탄생에도 국방군의 인물들이 개입했다. 
 
1981년 백악관 국가안보실의 주도로 열린 워게임에 참가한 인물은 독일 기갑부대의 주요 지휘관 중 한명이었던 헤르만 발크였다. 발크는 일전에 자신의 참모장을 역임한 적 있던 멜렌틴과 함께 워게임에서 NATO군 지휘를 직접 맡았다. 워게임에서 발크와 멜렌틴은 서독을 침공해 온 바르샤바 조약군을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면서 아군 종심으로 끌어들인 뒤, 취약해진 적 측방을 포위해 섬멸시키고 적을 패퇴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며 미군 장교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방어 교리는 결국 비판을 받고 폐기되었다. 
 
능동방어 교리의 문제는 첫째로 서독의 방어종심이 만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에는 너무 좁았다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바르샤바 조약군에 서독 전체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둘째로 능동방어 교리는 소련군에 대판 편견을 반영하고 있었다. 교리는 소비에트 체제의 군대가 기병창을 든 카자크가 되었건, AK-47을 들고 BMP에 타는 차량화 소총병이 되었건 이반은 이반으로 유연하지 못한 존재라는 확신 하에 만들어진 교리였다. 실제 발크가 워게임에서 능동방어를 시연할 때 한 장교가 만약 소련군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이에 발크는 “난 러시아인들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발크에게는 소련군이 전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발전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던 것이다. 군사사를 조금이라고 본 사람은 적이 항상 예상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국방군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싸우고도 결국 베를린이 함락당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나왔다. 그 때문에 결국 능동방어 교리는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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