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그 극복-4

PKKA | 전쟁사 | 조회 수 47 | 2020.04.26. 15:21
편견의 전파: 독일 주도의 2차세계대전사 서술
 
그러나 이후, 우리의 통념에 반하는 일이 일어났다. 서구 세계에 동부 전선은 1943년까지 거둔 독일군의 커다란 전과와 쾌속 진격,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독일군의 효과적이지만 처절한 방어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전후 서구권에서 독일 측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역사서술이 나타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패자가 쓴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독일의 시각이 강력히 반영된 제2차 세계대전사와 그 안의 동부 전선의 역사에 대한 서술은 전쟁 종결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 체제가 시작되던 1946년, 서방 연합군의 최대의 적은 철의 장막 너머에 있는 소련군이었다. 소련군이 새로운 주적으로 떠오르자 연합군은 소련군이 구사하는 군사술에 맞설 군사술과 군사교리가 필요했다. 여기에 대해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세력은 바로 소련군과 직접 전쟁을 치른 당시는 없어진 독일 국방군의 장교들이었다. 그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비롯한 여러 재판들에서 국방군의 장성들은 전쟁범죄에 관해서 기소되어 높은 형량을 받았다 하더라도 몇 년 안가 전후 서독의 미국 총독부라고 할 수 있는 고등판무관실의 결정에 따라 감형되거나 병보석 등으로 풀려나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사회로 나간 전직 국방군 장교들은 미군에 자신들의 동부 전선 경험을 말해 주고 그걸 글로 쓰면서 서독연방군의 창설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46년 6월에 미국 국방부의 역사과(Historical Division)에서 대부분 장성이었던 328명의 독일 전쟁 포로들이 미군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사 서술에 참여했고 1948년 3월에는 1,000건이 넘는, 일명 “국방부 팜플렛”을 비롯한 문건들을 대규모로 작성했다. 34,000권이 되는 분량이었다.  그리고 역사국에서 전직 국방군 장교들을 이끄는 인물은, 국방군의 나치화 시도에 저항하고 히틀러의 군사적 반대자였던, 그럼에도 히틀러의 참모총장직 제의는 끝내 거절하지 않고 1939년에서 1942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제3 제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크게 기여한 인물인 프란츠 할더였다. 프란츠 할더는 15년 동안 역사국에서 근무했고 그곳의 전직 국방군 장교들의 역사 서술을 감독하고 지시했다. 할더는 그곳에서 일종의 정치적 지침과 같은 것을 확정했다.
 
"사람들(역사과의 전직 장교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전쟁에서 거리를 두려 했다. 첫째, 국방군이 수행한 깨끗한 전쟁과 나치 친위대의 더럽고 범죄적인 작전을 구분하는 방법, 둘째, 전략 전술적 실패를 자신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자연 환경과 히틀러의 아마추어적 광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방법. 첫째 것이 도덕 수준의 방법이라면 둘째 것은 군사술 수준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칼루스헤에 위치한 미군의 독일작전사팀의 책임자이기도 했던 할더는 제2차 대전사 분야에서 일인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실제 할더는 국방군의 승리의 시기를 이끈 산증인이었고 자신과 히틀러의 긴장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나치즘 및 전쟁 범죄와 무관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저자들이 할더를 부담 없이 접할 수 있었다. 회고록 작가와 역사가, 전쟁 주제를 다루는 작가, 신문 편집인에 대한 할더의 영향은 상당했으며 역사과 내에서 할더는 전직 장교들에게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장군님”으로 불리며 권위를 행사했다.
 
전직 국방군 장성들의 역사서술 주도에서 전쟁 때 북부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 게오르그 폰 퀴흘러 원수는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지침을 남겼다. 폰 퀴흘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따르도록 했다. "독일의 관점에서 볼 때 기록되어야 할 것은 독일다운 행동이다. 이것은 우리 군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방군 참모 본부가 하달한 조치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명령을 수행하는 자는 어떤 경우든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 국방군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1950년대에 세계대전 동안 군에서 고위 지휘관을 지냈고 전후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역사 서술 계획에 참여한 많은 장교들이 회고록을 저술했다. 그 대표작으로는 프랑스 침공의 주역이자 독일 남부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잃어버린 승리』, 역시 프랑스 침공의 주역이고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를 만들었으며 기갑총감과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의 『한 군인의 회상』, 그리고 아프리카 전선, 동부 전선, 서부 전선을 모두 경험한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의 『기갑 전투』등이 있었다. 이들의 목적 또한 할더 및 퀴흘러의 목적과 비슷했다. 위로는 만슈타인 원수부터 아래로는 전차장 오토 카리우스에 이르기까지, 동부전선 참전자들은 독일 민족주의의 전통적인 러시아관/소련관과 반공주의, 그리고 전쟁이 “무신론자들에 대항한 기독교 국가의 수호”였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서술을 했고 이것은 “반공 십자군” 독일군을 상대한 소련군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찍는데 기여했다. 그럼에도 회고록들은 전후 전쟁사를 이해하는 주요 자료로 쓰였다. 
 
이 움직임에 가세한 인물은 영국의 군사이론가 바실 리델 하트였다. 리델 하트는 전직 국방군 장성들을 전범재판에서 변호했고 그들의 변호인단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어떻게든 깨끗한 독일 국방군의 이미지를 도출시키려고 애를 썼다. 리델 하트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걸 패자에 대한 영국 신사다운 관용이라고 하지만, 리델 하트의 숨겨진 의도는 전혀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국방군 장성들을 변호하고 그들과 깊고 어두운 관계를 맺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종결 시점에서 리델 하트의 군사사상가로서의 명성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리델 하트는 분명 1920년대에 스승인 J.F.C. 풀러와 함께 기계화 부대를 통한 기동전과 기계화 부대의 양성을 주장했지만, 1930년대로 들어가며 자신의 이전 주장을 전부 부정하고 다른 군사이론가들처럼 진지전과 방어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도리어 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리델 하트는 자신이 영국 정부와 군으로부터 계속 무시당했다는 자신의 주장과 달리, 체임벌린 내각에 영향을 주는 주요 군사 조언가들 중 하나였으며, 자신의 간접접근 이론에 따라 유럽 대륙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개입을 자제하자는 의견을 낸 사람이기도 했다. 즉,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정책의 실패에는 리델 하트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1940년 5월에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 프랑스의 완승을 예측하며 조만간 독일이 항복할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래서 결국 거짓 선지자가 되어버린 리델 하트는 영국 정부의 신임을 완전히 잃으며 명성이 크게 실추되었던 것이다. 
 
리델 하트는 그러자 독일 장군들과 야합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에서 큰 성과를 보여준 독일군의 기동전의 모태가 자신의 이론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독일 장군들이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인증해 주기 위해서는 이들을 전범재판에서 도와주고 그들을 변호하는 책과 인터뷰를 출간해야 했던 것이다. 재판을 받던 독일 장군들도 리델 하트를 이용해서 무죄나 가벼운 형을 받아내기 위해 이 야합에 동참했다. 당시의 인물인 영국군의 펄크 중령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 장군들은 감옥에서 리델 하트에게 뭘 말해주고 뭘 말해주지 않을 지를 사전에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펄크 중령이 그 사실은 리델 하트에게 전해주자 리델 하트는 깨끗한 독일 장군들이 그럴 리 없다며 펄크 중령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하여 리델 하트는 하인츠 구데리안과 야합하여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독일군 기갑부대 발전에 리델하트의 영향이 있었다고 쓰게 했고 롬멜의 유가족들 및 프리츠 바이얼라인과도 야합하여 롬멜도 리델 하트의 사상적 제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리델 하트는 독일 국방군의 이론적 스승으로 떠받들어지며 신화를 만들었고 이 신화는 1980년대가 끝나갈 때야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이 신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할더 등이 주도한 역사서술과 만슈타인 등의 회고록들, 그리고 기타 독일의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참전자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제20산악군 사령관을 역임한 로타르 렌둘릭 상급대장이 저술한 "러시아 군인의 전투력"과 앞에서 말한 "소부대 행동"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저술들을 보면 슬라브인에 대한 극우적 관점이 일반화되게 된다. 예를 들어 "특히 아시아적 영향을 받은 슬라브의 정신은 광신적인 확신, 극단적인 용감함, 짐슴같은 잔인함에 갑자기 공포를 느낄 정도로 유치한 친절함과 감수성이 뒤섞여 있다."고 서술했다. 
 
렌둘릭은 다른 저서에서 러시아 군인은 "반(半)아시아적"이며 "스스로 판단할 능력도 없다. 서구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에 휩쓸린다. 러시아 군인은 본능으로 행동한다. 러시아인은 군인으로서 원시적이며, 선천적으로 용감하지만, 집단으로 모이면 소극적이다. (중략) 인명을 경시하고 죽음을 모득하는 것이 러시아 군인의 특성이다. (중략) 러시아 군인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본성 때문에, 그들은 모든 고통에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러시아 군인의 감정은 전반적으로 짐승과 같은 흉폭함과 최고의 친절함 사이를 오간다."
 
 렌둘릭은 책자 "러시아 군인의 전투력"에서 순전히 인종주의적인 주장을 했다. 렌둘릭은 "중세 시대에서 비롯된 게르만족의 피가 러시아인의 피에 약하게 섞여 있다. 하지만 나는 300년간의 타타르의 지배가 러시아인의 피에 몽골 핏줄을 넣었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본다. 그게 러시아인의 민족성을 확실히 결정해주기 때문이다."라며 러시아인이 인종적 잡종이라는 서술을 했다. 렌둘릭이 말한 몽골 핏줄의 혼합이 낳은 결과는 무엇인가? "엄청난 인내심과 고통을 견디는 능력, 인생과 운명에 대한 무기력함과 복종, 낮은 주도권 장악능력,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중략) 잔인함과 가혹함으로 쉽게 기울어진다. 이것들은 아마 그것을 미덕이라고 보는 몽골 전통의 일부일 것이다."
 
할더도 자신의 평가에서 인종주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러시아인이 자주 보여주는 잔인무도함은 집착, 충성, 그리고 적절한 지도 하의 좋은 본성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독일군은 이러한 방법으로 미국인들과 또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공동의 이념적 및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서구인"일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서구인"이었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도 자신의 회고록 『기갑전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다수 러시아 군인은 정신적으로 둔감하며 손실에 대한 감각이 없다. (...) 그들에게 목숨은 값지지 않다. 러시아 군인은 가장 큰 고난에 면역이 되어 있으며,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들은 폭탄이나 총탄과 다를 바 없다." 
 
멜렌틴은 많은 러시아 군인들이 그러한 이유를 " “소비에트 제국 깊숙이 숨어있는 아시아적 특성”에서 찾았다. 멜렌틴은 러시아 군인들이 “근본적으로 원시인이고 천부적으로 무모하며, 감정과 본능에 지배된다. (...) 그들에게는 진정한 정신적 균형도 없으며, 현명한 친절함을 짐승과도 같은 잔인함으로 바꿔놓는다”고 서술했다. 멜렌틴은 러시아인을 "둔감하고, 정신적으로 완고하며, 그 본성이 나태함을 지향한다."고 특징지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인종적으로 우월한 독일군이 열등인종 소련군에게 졌단 말인가? 멜렌틴은 소련군의 대량 인력과 막대한 물질자원을 또 답으로 내놓았다. "독일 병사들이 러시아에서 거둔 성과는 러시아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다. (중략) 1944-45년의 치명적인 해들에도 우리 병사들은 러시아군보다 더 열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보다 약한 독일군은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처럼 적의 인력과 전차의 끝없는 파도 속에 둘러싸여 파도에 맞서 싸우다가 물에 잠겼다."
 
요약하자면, 나치 독일군의 인사들은 소련군의 '스팀롤러'가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딱 세 가지, 히틀러 상병의 무능과 광기,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동장군(과 진흙장군), 그리고 끝없이 몰려오는 러시아의 농민들이었다. 그러한 결과 프룬제, 스베친, 투하쳅스키, 트리안다필로프, 예고로프, 샤포시니코프, 이세르손, 세댜킨, 예데만, 라프친스키, 칼리놉스키, 할렙스키, 바르폴로메예프 등의 세계 최초로 전략과 전술 사이에 존재하는 작전술 개념을 발견하고 이를 종심 작전이라는 기계화된 기동전으로 발전시킨 인물들과, 주코프, 바실렙스키, 로코솝스키, 코네프, 안토노프, 시테멘코, 바투틴, 말리놉스키, 메레츠코프, 톨부힌, 고보로프, 보로노프, 바그라먄, 체르냐홉스키, 카투코프, 보그다노프, 리발코,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크랍첸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모스칼렌코 등 그걸 전쟁에서 실행에 옮긴 사람들의 업적들은 서방에서 망각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군사술을 발전시킨 것이 아닌, 단지 풀러와 리델 하트의 가르침을 받은 독일 스승들의 영향을 받은 아류 제자라는 함의를 담은 가설까지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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