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그 극복-3

PKKA | 전쟁사 | 조회 수 49 | 2020.04.25. 15:03
전간기 독일의 러시아 인식: 편견의 본격적 시작
 
러시아에 대한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적 인식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에 대한 이미지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운 방어 논변을 발전시켰는데, 독일이 볼셰비즘을 막아내는 벽 또는 보루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및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시한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이 좌절된 것을 계기로, 독일의 보수층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그 총본산인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더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독일이 볼셰비즘을 막아내지 못하면 서유럽 전체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는 사악한 공산주의에 휩쓸릴 것이라는 논리가 형성된 것이었다. 
 
1920년대에 신생 폴란드라는 공공의 적을 둔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라팔로 조약을 통해 실시한 두 군대간의 군사교류는 이러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개선시킬 계기가 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장교들은 서로의 군사교육기관에 연수를 갔고, 소련의 리페츠크에 있는 항공기 훈련장과 카잔에 있는 전차 훈련장에서 같이 훈련을 했다. 그에 따라 양국의 장교단 내에서는 서로의 체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장교들이 등장했다. 예컨대 훗날 히틀러에게 충성하고 또 전쟁장관의 자리에 오르지만 히틀러와 충돌하다 재혼한 부인의 포르노 사진 건으로 꼬투리를 잡혀서 해임당한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1928년에 소련에 연수를 다녀온 뒤 소련군의 성과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블롬베르크는 붉은 군대가 단지 인기 없는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경호원이 아니며 소련군이 정말로 국민군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블롬베르크가 보기에, 러시아 군인들의 군기는 놀라웠고 러시아군의 훈련은 실제적이었으며 러시아군의 장비는 계속 향상되고 있었다. 블롬베르크를 비롯해 소련으로 연수를 간 장교들 중 적잖은 인물들은 소비에트가 외국인에 대한 러시아의 전통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나라가 문화와 경제 발전의 희망을 간직한 동적인 국면을 경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심지어 나치 장군으로 유명한 발터 폰 라이헤나우 까지도 소련과의 군사교류 중단을 아쉬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블롬베르크 등의 관점은 소수의 관점에 불과했으며, 그러한 다소 긍정적인 평가 내에서도 기존 장교단의 반소비에트, 반볼셰비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국방군 최후의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제3 제국의 멸망과 운명을 함께한 한스 크렙스는 소련의 투하쳅스키 원수가 1932년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교활한 유대인, 잡종 유대인, 신실하지 못하고 본성상 의심이 많고 불충하며, 확실히 광적인 공산주의자” 그리고 이게 독일 장교단 대부분이 소련 장교단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계속되는 교류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자 가장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고 반공주의와 엘리트의식으로 가득한 독일 장교단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러시아인은 우월한 독일인보다 열등한 민족이고, 공산주의 소련은 기본적으로 사악하고 침략을 지향하여 독일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유대주의가 가세하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의 배신행위로 독일이 패배했다는 주장을 신봉하기 시작했는데, 이 음모론이 더 심화되었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 당의 인물들이 레닌처럼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거나 트로츠키처럼 유대인이니 공산주의 혁명은 유대인의 세계지배 음모의 일환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보수적인 장교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가 유대인의 음모가 만들어낸 산물이고 유대인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유대-볼셰비즘”이란 경멀적 단어가 돌아다녔다.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는 이 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유대인이 절대 호의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대게 당시의 맥락에서 라팔로 조약에 따른 군사교류에서 분명 상호간에 긍정적인 영향을 동등하게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열등하며 멍청한 동쪽의 이웃 나라에 더 현대적인 전쟁 방법을 일방적으로 가르쳐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독-소 군사교류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 신화는 당대의 이념적 적대감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전간기 서구 세계의 어디서나 퍼진 공산주의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문화의 기술과 진보의 발상들에 의존하는 기생충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적대감 말이다. 히틀러의 논리인 “열등한 슬라브인” 주장과 같은 발상이 이미 나치 집권 전부터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내제되어 있던 것이다.
 
전쟁 동안에도 히틀러를 반대한 군 내 세력조차도 1930년대 나치 선전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반볼셰비즘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히틀러 반대 세력조차 소련을 정말로 독일의 적국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반볼셰비즘에 대한 근본적 합의에 따른 것이며 어느 정도는 슬라브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태도에서도 기인했다. 그러므로 국방군 수뇌부의 뇌리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러시아관은 1900년 전후 시기 이래 독일 사회의 어떤 집단 속에 이미 존재한 민족주의적 사조의 전통과 닿아 있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러시아관은 인종주의적이거나 반슬라브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아시아가 서양을 위협한다는 황화론, 일명 “아시아적 야만”의 맥락에서 주조되고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아시아적 야만”에 히틀러는 기존에 존재하던 반유대주의, 반볼셰비즘, 반슬라브주의를 결합시켰다. 나치의 논리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우월한 아리아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유대인이 지배하는 소비에트 연방은 반드시 무너트려야 할 적이자 야만스런 아시아인의 혈통이 섞인 열등인종들의 국가로 받아들여야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의 수뇌부가 보기에, 러시아인들은 풍요로운 동쪽 땅을 차지하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열등한 인종이고, 러시아인들의 땅은 마땅히 우월한 아리아인이 생활권(레벤스라움)으로 차지해야 했다.(어찌 보면 힌덴부르크의 “동부 제국” 주장의 재판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은 자기모순과 기만의 왕국이고, 문을 한번 열어젖히면 대번에 무너질 진흙 발의 거인에 불과했다. 이러한 인식의 나치와 군의 대러시아 인식을 지배했고, 이것은 결국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에 깔린 가정이었다.
 
 
편견의 결과
 
처음에는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독일 국방군은 전쟁 첫 몇 달 만에 소련군에 500만 이상의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갔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독자 여러분도 다 알고 있듯이, 거인의 진흙 발속에는 무슨 철심이라도 숨겨져 있었는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그 거인은 큰 피해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았으며, 거인을 쓰러트리지 못한 결과 무너진 거인은 히틀러와 국방군의 수뇌들이 희망한 것의 반대쪽이었다. 파멸한 쪽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닌 독일의 국방군이 되었고 점령당한 수도는 모스크바가 아닌 베를린이 되었고,  지하벙커에서 자살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가진 소련군에 대한 편견도 짚고 넘어갈까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군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서 유구한 독일 애호 성향을 가지게 된 일본군은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소련군에 대해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에서 자신들보다 유연성이 떨어지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때의 경험 때문에 소련군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교범에서 소련인들은 순종적이고, 유순하고, 권위에 쉽게 복종하며, 외부의 압력만 있으면 소련인들은 쉽게 절망하고 좌절하니 이와 비슷하게 소련 병사들도 그들의 민족성 때문에 명령을 문자 그대로 따르고 둔하게 명령을 수행한다고 적어 놓았다. 즉,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해 보급선만 끊으면 소련군은 일본군의 “속전속결”원칙에 따라 빨리 무너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일본군은 1939년 8월에 할힌골에서 속전속결로 소련군을 끝내려다가 자신들이 속전속결로 포위당했다. 그럼에도 소련군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지 않던 일본군은 1945년에는 결국 만주의 관동군 전체가 속전속결로 한 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보면 독일군과 일본군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전제하에 소련과의 전쟁을 수행했고, 그 결과가 그들의 패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통념대로라면, 전쟁의 승자인 소련군이 어떻게 초반의 열세를 이겨냈는지, 어떻게 잃어버린 국토를 전부 되찾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적국의 수도까지 점령할 수 있었는지의 문제가 조명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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