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그 극복-2

PKKA | 전쟁사 | 조회 수 41 | 2020.04.24. 20:28
독일의 러시아 인식의 변화와 편견의 형성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들과 달리, 나치 독일 국방군의 조상인 프로이센군의 군인이 러시아를 보는 인상은 원래 나쁜 게 아니었다. 비록 두 나라가 7년 전쟁에서 충돌을 하긴 했지만, 프로이센 군인들은 조른도르프 전투와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보여준 러시아군의 전투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것에 존중을 표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때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국가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1809년의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이 위기에 처한 프로이센을 도와 나폴레옹의 대육군과 맞섰으며,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프로이센군은 영국군,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러시아군의 대프랑스 동맹군으로서 싸웠다.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 모두 빈 체제의 주요 가맹국으로서 활동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러시아에 대한 좋은 인상은 비스마르크의 시대 때 그가 프랑스를 견제하고 유럽에 자신이 구상한 세력균형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에 우호적으로 접근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관계는 삼제동맹의 결성으로 공고화되는 등 독일인이 러시아인에 대한 악감정을 가질 이유는 이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만연했던 러시아공포증은 아직 독일에서 일어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과 러시아가 1870년대 중반부터 마찰을 일으키며 이러한 시절이 끝나기 시작했다. 1878년의 베를린 회담의 결과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러시아가 튀르크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더 큰 이익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자 러시아가 삼제동맹을 탈퇴할 때부터 균열이 시작되었다. 비록 비스마르크의 수완으로 러시아가 삼제동맹에 다시 가입하여 갈등이 봉합되었긴 했지만, 이 때부터 양국 간에 일어난 균열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전 유럽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19세기 후반부터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독일 군인이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유산인 국민국가의 탄생과 민족주의의 발흥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문화와 행동 양식의 구분은 타고난 것이며 뿌리 깊은 특성이라고 보게 만들었다. 빌헬름 2세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과 발칸 반도에서의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 등으로 인한 독일과 러시아간의 정치 및 경제적 대립이 커지면서 독일에서는 러시아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벨린스키, 샬티코프, 네차예프, 차이콥스키, 글린카, 세체노프, 파블로프, 그리고 루먄체프, 수보로프, 쿠투조프, 드 톨리, 바그라치온의 나라가 아닌 전제주의만 존재하는 혼돈의 땅으로 보고 러시아인은 자존심이나 의식도 없고 보드카와 매독으로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원시적인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크게 나타났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두 종류의 사유로 구성되었다. 첫째로, 러시아는 광대하지만 취약하다는 이미지였다. 당시의 독일 선전물들은 러시아를 “진흙 발의 거인”으로, 즉 결점밖에 없는 왕국으로 묘사했다. 둘째로, 러시아는 본래 공격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력을 사용하여 러시아인들에게서 동부 지역을 강탈하려는 독일인의 욕망을 완곡하게 에둘러 표한한 문구, 즉 독일의 “동방으로 질주”에서 잘 나타나 있다. 20세기로 접어들자마자 독일인들은 슬라브인과 독일인 사이의 영토를 둘러싼 "불가피한 최후 결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적 인식의 한 가지 특징은 독일인이 러시아인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슬라브인보다 정치, 경제, 군사, 지식수준에서 우월하다는 가정이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러시아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독일인들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경제 발전의 격차를 줄일 수도 있었던 건설적인 교류를 촉진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고방식은 오히려 호전적인 인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영토가 독일인들에게 불리하게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동방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통치하고 경제적으로 약탈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러시아 제국이 신속하게 붕괴될 것이라는 가정으로 연결되었다.
 
실제 1차 대전의 동부전선은 겉보기에는 그래 보였다.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독일 제국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탄넨베르크, 마수리안 호반, 고를리체-타르노프, 리가 등지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리는 러시아군이 신중하고 광범위한 준비도 없고 병사들이 너무 원시적이어서 현대 전쟁에 적응할 수 없는 취약한 군대로 보이게 했다. 독일군에게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거둔 성공은 그냥 오스트리아가 못나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차르 체제의 붕괴와 구체제 군대의 군율의 붕괴는 러시아군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정형화된 인상을 강화시키기만 했다.
 
여기서 비롯된 러시아의 군사적 열등 때문에 동부전선에서 지휘를 하면서 동부전선에 전략적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힌덴부르크 및 루덴도르프와 전쟁은 서부전선에서 종결될 것이며 동부전선은 부차적인 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참모총장 팔켄하인이 갈등을 일으켰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군의 전략과 정책이 1916년 이전에 러시아 제국에서 식민지를 가져와 일명 동부 제국(Ostimperium)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참모였던 막스 호프만 같은 상대적으로 침착한 장교들은 독일군이 흑해에 다다를 수 있을 지에 심사숙고했지만, 이러한 의견의 맥락에서 최근의 동부 전선의 점령지는 쉽게 점령하고 빼앗을 수 있었다는 결론에는 그들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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