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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3 : 베를린은 언제나 흐림 -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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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쟤들은 또 뭐야?”

 

  “287헌병 애들 같습니다.”

 

  선두 험비의 선탑자석에서 툴툴대는 컨보이의 지휘관인 소령의 짜증 섞인 말 한마디에 운전병이 나름 머리를 굴려서 대답했지만, 소령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저들이 헌병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다가 저 특수부대놈들과 VIP들을 내려놓고 터너의 여단 CP로 복귀하기만 하면 되는데, 어려운 일들 다 끝나가는 마당에 저 헌병 새끼들은 무슨 꼬장이란말인가. 안 그래도 곳곳에서 적 스페츠나즈와의 교전 보고가 들어오는 판이었다.

 

  게다가 적의 사보타주로 시 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차단 된 데다 밤하늘의 선선한 공기를 가르며 지속적으로 총성이 들려오는 판국이다. 어쩌면 그 스페츠나즈 때문에 치안 유지를 위해 차려진 검문소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무슨 일이야, 대위? 이쪽은 엄청 바빠.”

 

  그의 길을 막는 헌병에게 소령이 말했다. ‘바쁘다’는 말은 충분히 소령이 입에 담을 자격이 있었다. 지금 그가 모시고 있는 손님들은 베를린 오피스에서 반드시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분류해놓은 초특급 VIP들이었다. 자신과 자신 부하들은 물론 지금 저 뒤쪽의 벤츠 방탄차 안에 타 있는 머리나 기르고 다니면서 경례 할 줄도 모르는 경박한 특수부대 개자식들이 다 죽는 한이 있어도 꼭 살려 보내야 할 사람들이라는 정도는 말단 소령에 불과한 그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대가리를 들이민 녀석은 방탄모의 위장포 앞부분에 MP라는 검은 글씨를 정성스레 오버로크 쳐 두었지만, 옷깃의 계급장 덕에 계급을 알아 볼 수 있었던 적당히 노련해보이는 대위 녀석이었다. 짬도 꽤 먹어 보이는 것이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어 먹으리라는 헛된 기대도 품었었다. 물론 그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화물> 발송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미 발송 화물>들 전부 도착 할 때까지 컨보이를 정지 시키고, 현 경비 병력과 함께 방어 태세 갖추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대가리 좀 돌아가는지 경례를 안 붙여주는 점은 조금 고마웠지만 결국 계급장 안 가리는 걸 보아 어딘지 생각이 짧아 보이는 헌병 대위 녀석의  말은 언뜻 들어보면 얼씨구나 고맙다고 받아줘야 정상일 내용이었지만, 소령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조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자신들도 십여분 전에야 알아차린 발송과정에서의 <택배 사고>를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전파받고 여기로 증원병력을 보냈단 말인가. 그리고 그가 기억하기로는 NEO 작전의 이 부분에서 유사시 연대에서의 증원이 계획되어 있을지언정 헌병과의 작전은 없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헌병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오피스에서 인원분류 및 경계임무를 수행하는 해병대원들 보조와, 일반 직원들 호송작전 수행이 전부였다. 

 

  “내가 실 상황 가정해서 훈련만 열 두번도 넘게 해 봤는데 헌병에서 붙을 녀석들은 이미 이쪽에 다 붙어있어. 그리고 택배사고 난거 알아차린게 10분 전이고 이제야 연대본부에 보고 들어갔을텐데 늬들은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데?”

 

  “상부에서 급히 제일 가까이 있던 저희들에게 임시 지원을 명령했습니다. 지시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상부? 아오 진짜 이 개새끼 봐라.”

 

  소령이 제 성질을 못 죽여서 문을 쾅 닫아 붙이고 씩씩대며 나간 뒤, 운전병은 문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긴장을 조금 풀고 있었다.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소령은 저 불쌍한 헌병 대위를 향해 자신의 평소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중 일부는 자신이 보기에도 합당한 지적 사항들이었다.

 

  아까부터 상부, 명령 운운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받은 명령이냐, 책임자인 나도 들은 적이 없는 명령인데 통신 장애 뚫고 CENTAG에서 받았냐, 펜타곤에서 받았냐. 니들은 도대체 개념을 어떻게 밥말아먹었길래 데프콘2 상황에다 빨갱이 특작부대가 활개치고 다니는데도 규정된 방탄복도 안 쳐입고 뽈뽈뽈 돌아다니는거냐. 무겁다고 단독군장도 제대로 안 차려입는 새끼들이 헌병은 무슨 얼어죽을 헌병이냐고 잘근잘근 씹어대는 걸걸한 목소리가 운전석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창 밖에서 헌병 아니랄까봐 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방탄을 쓰고 똥폼 잡는 상병(SPC) 하나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 전에 외박을 나갔다가 모자를 좀 이상하게 썼다는 이유 만으로 징계를 먹어서 헌병에 대해 영 좋지 않은 감정이 컸던 운전병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소령이 밉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소령의 갈굼에 대한 헌병 대위의 말대꾸를 운전병은 처음엔 미처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어디서 들은 명령이냐고 물어보셨습니까?”

 

  “그래 이 븅신 새끼야. 대대본부도 연대본부도 여단본부도 아니면 뭐하는 상부고 어디서 들은 명령인데?” 

 

  “Исходящий,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Комитет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발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국가 보안 위원회.)

 

  갑작스런 러시아어를 들은 소령은 그것이 어느 나라 말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을 버리지 않고, 대위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신형 베레타도, 구닥다리 콜트도 아니었다. 마카로프 소음 권총에서 조용한 격발음이 들렸다. ’소비에트’에 한번, ‘사회주의’에 한번, ‘공화국’에 한번. 소음기의 효과는 너무 훌륭해서, 키득거리는 운전병조차도 그 총성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운전병이 이상을 감지한 것은 소령이 사타구니에 권총탄 세 발을 맞고 서서히 쓰러져 내려 갈 무렵에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선두 방탄 벤츠가 갑자기 후진을 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고 ‘헌병’들이 총을 난사하는 것을 본 운전병이 깜짝 놀라서 창가를 보니 어느새 그의 머리에는 M16소총의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었다.

 

   이 거리에서라면 첨단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드럽게 무겁고 비싼 방탄모도 소용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총에 맞지도 않았는데 인생의 순간이 슬라이드 쇼 처럼 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운전병은 자신 역시 소음총에 맞기 직전에, 그의 뒷편에서 울리는 자지러지는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뇌가 엉망이 되었다.

 

  “팀장님, 제가 모르는 인수인계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자지러지는 총성’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이야기의 서술 시점을 조금 앞으로 조절해보자. 팀 막내인 <데킬라>(Tequila) 라모스(Ramos) 하사(SSG)가 제기한 이런 의문처럼, 컨보이 선두에서 벌어지는 생소한 광경은 방탄차량 안의 경호임무 수행자들의 눈길과 의혹을 사기 충분했다.

 

  “아니, 이건 나도 모르겠는데… 제시카?”

 

  “대피 작전 연습중에 헌병이 끼어든 적은 없었어요.”

 

  소령과 운전병이 사살당하기 조금 전, 차량 컨보이가 정지하기도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데는 제시카가 타고 있던 방탄차의 다섯 명이 모두 합의를 보았다. 이제 그들은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불청객들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분석해 보는 것이다. CIA의 화이트들과 함께하는 특전단 헌병파견대 인원들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거의 동시에 세 대의 방탄 세단 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살짝 내렸다. 

 

  <폭스> 역시 다른 팀원들처럼 그리고 조수석 바로 옆에 붙어있는 녀석을 살짝 훓어 봤다.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폭스>도 살짝 엷은 미소를 띠고 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운전석을 돌아봤다.

 

  “좆 됐다.”

 

  “예, 좆됐네요. 씨발, 아주 그냥 제대로 좆 됐네.”

 

  “아, 니미,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리더라.”

 

  “비관적인 상상들 그만좀 해요. 그러면 꼭 이따위로 개판 나 있더라.”

 

  제시카에게는 따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지만, 뒤의 부팀장 일행이 내린 결론도 그들과 같았다.

 

  전시상황인데도 방탄복 미착용 상태. 거기다 결정적으로 총기가 근본 없는 개족보였다. 총열이 미묘하게 가늘고, 가늠자는 M16A1이나 캐나다제 C7같은 녀석이었다. 누가 봐도 M16A1에 준하는 사양인데, 총열덮개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A2의 그것을 달고 있었다. 거기다 <폭스>가 본 총은 소염기도 진짜 구닥다리인 튤립형 소염기였다. 

 

  헌병들의 어설픈 단독 군장 상태는 심증이 아니라 확증에 가까웠다. 좌석과 문짝 사이 안전벨트 근처에 쑤셔 박아둔 CAR15같은 건 거치적 거릴 뿐이다. MP5K에 실탄을 삽탄한 <폭스>가 뒤를 돌아보니 제시카는 떨고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빛으로 어설프게 조그만 물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비웃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하는 일을 우리에게 시키면 팀원 넷이 모여도 저 사람이 처리하는 양의 반절도 소화 못 할 것이 틀림 없었다. 누구라도 익숙치 못한 일을 하게 되면 다 비슷할 것이었다.

 

   <폭스>는 조수석 앞 서랍을 열고 다른 MP5K를 꺼냈다. <노크>의 것이었지만, 노크가 쓸 수 없는 상태니 큰 상관 없었다. 실탄이 가득 든 30발 탄창 두 개를 클립으로 엮어 놓은 걸 두개. 다시 말해 탄창 네 개와 함께 쥐어줬다. 탄창 묶음 하나는 총에 끼워주고, 제시카에게 물어봤다.

 

  “쓸 줄 알아요?”

 

  “땡기면 나간다는 것 밖에는.”

 

  “음, 제 말 잘 들어요. 총을 다 쏘고 나면 왼쪽에 살짝 튀어나온걸 끝까지 당겨주고, 위에다 걸쳐줘요. 그 다음에 탄창을 꽂고, 아까 위에 걸어둔 걸 살짝 아래로 때려주면 장전이 끝납니다. 쉽죠?”

 

  “당겨서 걸치고, 탄창 꽂고, 때려주라구요?”

 

  “예. 그리고, 총 안 쏠 때는 방아쇠에 손 걸치지 마요.”

 

  미덥지 못한 비전문가에게 쥐어주긴 많이 고급스러운 총이지만 별 수 없었다. 애초에 탄창을 네 개 씩이나 쥐어 준 것도 그래서 였다. 제대로 쏘지도 못 하는 사람에게 총알마저도 모자란다면 120발도 1분이면 금방이다. 그나마 긴장될텐데도 나름 침착하게,  설명을 들어주었으니 다행이었다.

 

  [ - <폭스>, 쟤들 백 퍼센트 빨갱이들이에요.]

 

  “예. 저희도 눈치 깠습니다. 여차 하면 바로 제끼죠.”

 

    [ - 그럽시다. 다른 차들까지 설득할 시간은 없겠는데요. ]

 

  <폭스>가 특전단 팀장 호프만 대위와의 사전 조율작업을 마쳤을 때, 뒷 좌석의 창가자리에 있던 R팀의 부팀장 로드 <스카이랩> (SkyRab) 상사가 입을 열었다.

 

  “<폭스>, 좀 어때?”

 

  “A팀이랑은 얘기 됐어. 여차하면 우리만이라도 빠질거야.”

 

  “닭대가리들까진 힘들겠지?”

 

  “설명할 시간 없어. 쟤들 운전실력으론 따라오지도 못하고.”

 

  “하, 시벌. 존나 꼬였네. 노래라도 틀고 싶은데.”

 

  “하지만 무전에 방해되겠지.”

 

  “그러게나 말이다, 먹고 살기 존나 힘드네.”

 

  이러니 저러니 되도 않는 잡담을 주고 받은 뒤, <폭스>는 특전단 헌병 파견대가 인솔하는 뒤의 방탄차들에 연락을 하면서, 대열 최전방, 다시 말해서 그의 차 앞에 있는, 검문소에 가로막힌 험비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차에서 평소 맘에 드는 구석이 없던 소령 녀석이 성큼 내려와서는 차 문을 쾅 닫고서 ‘헌병’들의 최선임자로 보이는 녀석을 상대로 자신이 훈련소 D.I라도 된 것 처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전신을 자극했다. 그는 본능에 충실했다.

 

  “내가 차 빼라면 바로 허리 숙이고 고개 쳐박고들 있어.”

 

  창문을 닫아서 외부 소음이 많이 차단됨에도 불구하고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 살짝 움찔 했다. 그래도 다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는 않는 눈치라 다행이었다. 그 때, 짙게 선팅한 어두운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시야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가려서 안 보이는 헌병의 오른 손 쪽이 약간 움직이는가 싶더니, 소령의 몸에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차 빼!”

 

  두 대의 방탄차들이 거의 동시에 급 발진 사고라도 난 듯이 급 후진을 해버렸다. 벤츠 뒤에서 알짱거리던 자칭 헌병 녀석 하나가 그대로 고꾸라져 차 아래로 깔리는 감각이 자동차 전체를 통해 탑승자 전원에게 느껴졌다. 제시카는 살짝 움찔 했지만, 다른 둘에겐 몇 번 경험해 본 익숙한 감각이었다. 

 

  차 안 공기가 갑자기 상쾌해졌다. 5.45밀리와 5.56밀리 구경의 구리와 납 덩어리들이 강제로 환기를 시켜준 탓이었다. 2초만 늦었어도 그들의 몸에 박혔을 금속 물질들이었다. 급격한 환기와 급격한 움직임이 시너지를 일으켜 차 안에 꾸준히 축적되던 이산화탄소들이 일제히 바깥 공기를 타고 자동차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컨보이 최 선두의 운전병이 죽기 직전에 들을 수 있었던 총성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고 있던 <폭스>가 어느정도 거리가 띄워지자 바로 기관단총을 꺼내들고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개시했다. 한 명을 잡고 다른 하나를 조준하려는 순간, 차의 방향이 급격하게 틀어졌다. 

 

  상반신을 창가 밖으로 내밀면서 뒷좌석을 언뜻 쳐다보니, 제시카가 상반신을 푹 숙인 채 총만 내밀고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뒷쪽 유리창 너머로 완전자동으로 긁고 있었다. 보아하니 120발도 모자랄 것 같았다. 그는 혀를 찼다.

  

  ‘헌병 대위’, 아니 특작부대의 소령은 자신들이 작전을 잘 짰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대부분 그의 의도대로 풀려 나갔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작전 목표들이 빠져 나가 버렸다. 그게 문제였다.

 

  더 이상 미군 소령 녀석의 말장난을 받아주기도 귀찮아진 그는 슬쩍 컨보이 쪽을 훓어 보았다. 부하들이 제자리에 위치했음을 확인한 나는 신호를 보낼 때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신호였다.

 

  다른 미국 놈들이 눈치를 못 채도록, 그 소령 놈에게 바짝 붙어서 탄띠 오른쪽에 차고 있던 홀스터에서 마카로프 소음 권총을 꺼냈다. 방탄복 미착용을 지적하던 언행에 부끄럽지 않게 튼튼한 방탄복을 착용하고 있던 터라 가장 확실한 급소, 다시 말해 사타구니에 대고 방아쇠를 세 번 당겼다. 

 

  머리가 좀 더 확실하겠지만, 똥 폼 잡으면서 동네 전체에 내가 이 사람 죽인다고 광고할 일은 없었다. 최대한 티 덜 나게 이 녀석을 해치우고,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눈치 못 챌 십여초 남짓 한 사이에 컨보이 전체를 에워싼 부하들이 5.45밀리 소총탄의 향연을 보여준 뒤, 벤츠 뒷좌석에서 얼이 빠져있을 신사 숙녀 여러분 몇 명을 데려가면 되는 쉬운 임무였다. 그런데 그 쉬운 임무가 꼬여버렸다.

 

  대열 선두의 험비야 나와 통신 담당이 직접 처리해버렸다. 중간과 최후미의 2.5톤 트럭 역시 운전석과 조수석, 그리고 호로로 가려진 짐칸 안에 슬려있는 한무리의 병사들 역시 순식간에 영문도 모른 채 픽픽 쓰러져나갔다. 그런데 망할 미제 델타놈들이 일을 망쳐버렸다.

 

  우리의 정체를 미리 알아채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차를 빼고 달아나버렸다. 부팀장이 급발진 사고라도 당한 것 처럼 어이없게 교통사고로 죽어버리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러려고 아프간에서 그 고생을 했었단 말인가. 손에 익은 게 좋다며 구식 AKMS 소음소총을 고집하던 그의 생전 모습이 생각났다. 안타까웠다. 잠깐이나마 안타까웠다. 다시 일에 집중할 시점이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쫒아간다! 차량에 탑승!”

 

  덩치 크고 느린 한 미제 신형 경트럭과 2.5톤 트럭을 버리고, 아까 전에 검문소 부근에 주차되었던 폭스바겐 미니 버스와 피아트처럼 보이게 꾸민 라다 두 대에 몸을 나눠 실었다. 운전석 안에는 현지 지리에 빠삭한 동독 동무들의 슈타지 요원들이 한 명 씩 자리를 잡고 앉아서, 조금 전의 난장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제일 가까운 라다 조수석에 그대로 몸을 던져 넣은 KGB 대위가 출발을 지시하자, 슈타지 운전수는 지시대로 급가속으로 필사적으로 따라붙기 시작했지만 그런 급박한 움직임과는 상관 없는 조그만 의문을 그는 도저히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이 염세적이라거나 패배주의자라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물이 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전쟁이 벌어질 어떤 이유도 없었다. 레이건도 사라졌고, 소련의 새로운 서기장 역시 좀 머리가 많이 돌은 돈키호테라서 세상은 45년 종전 이래 가장 해빙기에 가까운 그런 시대였다. 

 

  냉전이 끝나는게 아니냐는 성급한 이야기마저도 세간에서 입소문을 타고 돌고 있는 이 평화로운 시대에 갑자기 이 지경까지 일이 진행 되었다는 게 그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여튼 자본주의자 놈들은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는 종자들인 게 틀림 없었다.

 

  한편 다른 라다를 잡아타려고 후방석 문짝까지 열었던 어느 중위는 아까 팀장이 직접 처리한 미제놈의 시신이 왠지 맘에 걸려서 그 쪽을 쳐다봤다. 이제 보니 시신이 아니었다.

 

  옆으로 몸을 돌려 누운 상태로, 두 손을 필사적으로 피격 당한 부위를 꾹 눌러 지혈이라도 해 보려는 듯 한 그 생존 본능일지, 아니면 그저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의식인지 모를 행동. 아직 살아있다. 지금이라도 허리에 찬 권총을 뽑는다면 그들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

 

  중위는 라다에 짱박아두고 있던 소음기가 장착된 AKS-74U 기관단총을 소령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5.45밀리 탄약 십여발이 최후의 생존 본능을 불태우던 그의 마지막 남은 의지력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한 발인가는 머리에 맞아 마지막 가는 길의 그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조금이나마 땅에서 떼고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수평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던 머리가 완전히 땅에 닿았다. 상반신쪽에서는 피가, 하반신 쪽에서는 아까 권총을 맞으면서 고환 뒤에 있던 방광과 창자를 맞기라도 한 듯 피 치고는 너무나도 색깔과 냄새가 구리구리한 액체가 흘러나와 아스팔트와 시신을 적셔나가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죽어 나자빠지고 살은 사람들은 전속력으로 내빼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살은 미국인들을 쫒아가고 있었다. 독일 경찰은 아까 전에 러시아인들을 미국인으로 착각하고 이 곳을 떠나버렸다. 시민들은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질 못하거나, 방공호로 피난을 갔다. 

 

  소령의 시신을 수습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소령 외에도 너무 많은 시신들이 즐비한데 그저 차 밖에 끔찍하게 나뒹군다는 이유 만으로 소령의 시체만을 생각하는 것은  다른 전사자들에게 실례가 되는 일일 것이다.

 

  산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망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소리는 살아있는 자의 사치인 듯,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들을 빼면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적막함이 핏빛 거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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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쉬리의 CTX 탈취장면을 오마쥬했습니다. 비슷하다고 느끼시는게 당연한겁니다. 

 

CENTAG이란 CENTral Army Group, 그러니까 나토 육군의 중부집단군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소련 / 러시아군의 계급체계에선 위관급 장교가 소위 - 중위 - 상위 - 대위의 4단계로 나뉘어 있으니까, '헌병 대위'의 실제 계급은 저 고자샷 당한 미군 소령보다 높은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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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nd 글쓴이 2018.09.20. 21:11
점심은평양저녁은신의주

수방사 장병들이 너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긴 했지만, 임팩트 있는 장면 연출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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