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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3 : 베를린은 언제나 흐림 -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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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만 열면 ‘씨발’소리만 나왔다. 복귀 할 때만 해도 하루 만에 휴가 복귀 했다고 놀리며 스콧 일병의 앞에서 깐죽거리던 패트릭 일병 역시 더 이상 그에게 장난을 치지 않았다.

 

  “야. 어쩌겠냐. 나도 이렇게 겁 나는걸. 그래도 저기 행정반에 전역이 코앞이던 서무계 메이슨 상병(SPC)보단 덜 억울하지 않겠냐. 열 받는건 빨갱이들한테 풀어 새끼야. 지금 부대에 기분 좋은 놈 아무도 없어. 넌 그래도 바깥 공기라도 쐬고 왔지만 우리는 그냥 영내에 쳐 박혀 있다가…….”

 

  “씨발놈의 흰둥이 새끼야. 알만큼 알아 들었으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라.”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가 잠깐 짬이 나서 스콧을 붙잡고 위로해준답시고 씨부리던 패트릭은 “알았다 새끼야.” 라고 말하고 그냥 자기 할 일을 보러 갈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짜증 났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도시의 공기는 온데 간데 없고 군바리들 땀냄새만 가득했다. 무슨 놈의 날씨는 5월이 다 됐는데도 이리 쌀쌀한지, 도로를 쌩쌩 지나가는 비좁은 트럭 짐칸에서 군장을 풀어 야상을 꺼내게 만들 지경이었다.  

 

  이야기 나오니 이놈의 트럭도 짜증 났다. 공수부대원은 모름지기 낙하산이나 헬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움직여야 했다. 베를린으로 오고 나서 부터 타게 된 이놈의 트럭 짐칸은 영 마땅치 않았다. 빠른 것도 아니고, 전차만큼 튼튼한 것도 아닌 주제에 승차감마저도 거지같은 트럭은 블랙호크에 비해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어우 씨발, 전차랑 같이 간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들의 반대 차선에서, 큼지막한 궤도차량 몇 대가 끼릭끼릭거리는 궤도음을 사방천지에 울리면서 덩치에 걸맞지 않은 빠른 스피드로 다가 오고 있었다. 몸을 뒤로 돌려 그것들을 직접 시야에 넣은 스콧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듯 말하자, 맞은 편의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포스터(Foster) 상병(CPL)이 그쪽으로 고개를 잠깐 돌리더니, 바로 대꾸했다.

 

  “저거 전차 아냐 짜식아.”

 

  “예?”

 

  “자주포! 제 94야전포병 찰리 포대! 포병이다 포병! 같은 편이 뭐 타고 다니는지는 구분 할 줄 알아야지!” 끼릭거리는 궤도음과 귀청 떨어지는 엔진 기동음 탓에 잘 못 알아 들은거라고 생각한 그는 스콧에게 ‘조금 더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이 스콧 일병에겐 조금 다르게 받아 들여진 모양이었다.

 

  포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스콧 일병은 그것이 정말 전차인 줄 알았다. 지금 엉뚱한 병사 붙잡고 아는 척 하는 건지, 부아가 치민 스콧의 눈에 오늘 따라 유난히 짜증나게 구는 이 동양계 상병 녀석이 걸렸다.

 

  “그거나 그거나 똑같이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구분합니까! 상병님이야 말뚝 박았으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지만, 저한테 무슨 불만 있으십니까?”

 

  “그래 씨발, 아까 전부터 혼자만 좆 됐다고 대놓고 툴툴대는 거 좆 같아서 그런다 새끼야.”

 

  부대가 전시 상황을 앞두고 워낙 분주했던데다가, 스콧 일병 자신도 누가 말을 걸지 않는 한 티를 내지는 않았기에 많은 이들은 그런 스콧 일병의 저기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포스터 상병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목숨을 건 실전을 목전에 두고, 저런 녀석을 분대에 두고 있으면 멀쩡한 분대도 무너질 것 같았다. 

 

  “잘 들어 이 깜둥아. 넌 그렇게 니가 비행기 타고 여기를 못 뜬 게 좆같냐? 넌 휴가 나갔다 짤려서 들어왔다 치자. 여기 처음부터 붙박혀 있다가 이 꼬라지 된 나나 다른 애새끼들은 다들 마음의 준비 끝난 줄 아냐? 혼자서 애새끼마냥 삐쳐있지 말고 니 밥값이나 해라, 일병!”

 

  무어라 항변하려던 스콧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것을 그만 두었다. 같은 흑인들 조차도 ‘Nigger’라는 표현을 걸고 넘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소 그와 같이 포스터를 두고 칭챙총이라고 뒷담을 까던 녀석들 역시 지금은 ‘칭챙총 상병’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내 말 알아 들었나, 일병? 대답을 듣고 싶다.”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기집애처럼 튀어나온 입술부터 집어 넣도록.”

 

  자연스런 기회를 통해 분대 내의 사기 저해 요소 하나를 교정한 포스터 상병은 기분이 조금 풀렸다. 3일 전에 휴가를 나가 공석인 분대장 자리까지 책임지고 있는 터라 가뜩이나 몸과 마음 모두 복잡한 포스터 상병에게 스콧의 돌출 행동은 그야말로 짜증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출타를 나갔다가 복귀 당한게 억울한건지, 아니면 자기에게 분대장의 책임을 떠넘기고 휴가를 나간 빌어먹을 멕시칸 병장(SGT) 새끼처럼 제 때 이 포위된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쉬운 건지 콱 쏘아 붙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런 질문은 같이 짐짝처럼 크럭에 실린 다른 병사들의 사기에도 좋지 않을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여기서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포스터 상병은 자신의 중대가 맡은 임무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들이 속한 4대대의 임무는 서베를린의 미군 담당 섹터의 남서쪽 방면의 경계였다. 

 

  거기다, 남쪽에서 전차중대와 작전에 나선 녀석들과 달리 숲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병력들이 맞딱뜨릴 적이라고 수 시간 내에는 동독의 준군사조직인 국경경비대밖에 없는 데다가, 그들이 담당한 지역은 하펠 강(Havel River)이라는 천연 장애물로 경계를 두고 있는 터라, 시내쪽이나 도시 남쪽에 비하면 현저히 그 위협이 적은 곳이었다.

 

  하지만, 스콧과 포스터가 4대대 예하 알파(Alpha) 중대의 임무는 아주 위험한 임무였다. 군사 문제의 문외한들이 보기에는 참 안전한 임무였다. 적 후방에서 서베를린의 유일한 미군 포병 전력인 8문의 자주포로 구성된 포대를 엄호하는 임무였다. 

 

  위협의 본질은 그들이 후방에 있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이 포병의 뒷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동베를린 시가지를 사정권에 넣고 있는 이 한줌의 연합군 포병은 누가 보더라도 공산군의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될 것이 뻔했다. 

 

  개전 초기 상황, 아직 시내에서의 약간의 총격전과 장벽을 둔 대치 상태가 전부인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그들 4대대 알파 중대가 훨씬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차라리 전방으로 가는 쪽이 생존에 유리할지도 몰랐다. 포병대와 더불어 겸사겸사 1개 경보병 중대를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가공할 대포병 사격, 공군의 집속탄이나 네이팜 폭격, 인간병기 스페츠나즈의 기습 등등…….

 

  미 본토 근무 시절, 포스터 상병이 82공수에 있던 시절에 딱 한번 한국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연합훈련의 일환으로, 미 본토에서 수송기에 몸을 싣고 논스톱으로 공중급유를 받으며 한국까지 날아가 곧바로 낙하산 점프를 하면서 치렀던 빡센 훈련이었다. 

 

  그 곳에서 목격했던 현대적인 대량살상무기들의 가공할 파괴력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포스터는 겉으로는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계속 되뇌이고 있었다. ‘넌 좆됐다. 좆됐다. 완전 좆됐다.’ 그를 붙잡아 주는 것은 오직 하나, 직책에 따른 책임감 뿐이었다.

 

  포스터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자기 나름대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스콧 일병 역시 돌이켜보니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지고 쪽팔렸다. 아쉬운 감정을 접어 두지는 못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게 옳음 것임을 뒤늦게 자각한 스콧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괜히 짜증나던 쌀쌀한 날씨도 겨울이나 초봄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니 선선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차들이 숲 속으로 난 좁은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멈추고, 하차명령이 떨어 진 것도 그 때 쯤 이었다.

 

  “외딴 숲 속에 왠 별장이야? 그럴싸 한데.”

 

  먼저 트럭에서 내려 대충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있던 어떤 녀석의 감탄사는 반어법에 가까웠지만, 순수한 호기심도 섞인 발언이었다. 눈 앞의 거주물은 물론 호화로운 별장이나 아담한 산장과는 거리가 멀은 꽤 흉물스런 콘크리트제 구  막사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포병 예비진지라고는 하지만 숲 속에 결코 작다고는 못할 건물이 있다는 것은 제법 신기할 노릇이었다. 스콧이 지나가는 포병 애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옛날에 지은 구막사라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긴 하지만 훈련때 CP 차릴 요량으로 헐지 않고 내버려 뒀다더라. 최소한 화장실 걱정은 굳었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잠깐 구막사에 과연 들어가보니, 과연 흉물스런 겉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그래도 가끔 사람 손이 탄 듯 크게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소변기 물도 잘 내려갔다. 좌변기간 칸막이가 없는건 좀 아쉬웠지만, 나뭇등걸에 주저 앉아 반토막으로 자른 드럼통에다 일을 보는 임시 화장실보다야 훨씬 깔끔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소변기 앞에서 거시기를 몇 번 털고 건물 밖으로 나온 스콧과 패트릭이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그들 앞으로 인사계 오닐 상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공병삽을 하나 든 모습으로.

 

  “꾸물대지 말고 가서 개인호나 파고 있지 그래?”

  

  고대 로마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인과 작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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