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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3 : 베를린은 언제나 흐림 -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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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시간 전

 

1989년 5월 9일

 

(CEST; 중부 유럽 여름시) 20:25 PM

 

* * *

 

  글라디쉐프가 자리에 복귀했음을 보고하기 위해 몰래 연락을 취하자 마자 GSFG 스테이션에서 보인 첫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 - 씨발 새꺄! 왜 이렇게 늦었어?! ]

 

  “진정 해요. 아저씨.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이 후끈 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장 신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비운 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점은 CIA의 그에 대한 신용도에 약간의 악영향을 줄 것이 틀림 없었다.

 

  “고첩이 나대다가 무슨 꼴 나는지 아저씨도 잘 알잖아요.” 빅토르는 변명을 하거나 변명을 듣는 것 모두 자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의심을 안 사려면 잠수를 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구요. 하필 그런 순간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은 미안하지만, 씨발 나도 설마 하룻밤 새기도 전에 전쟁이 날 줄은 몰랐다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빅토르는 지난 몇 시간 사이 벌어진 일을 상기했다. 몇 시간동안 이야기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 것이 많지도 않았다.

 

  차로 얼마 안 걸리는 위치에 소재한 관사에 도착해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날 밤 까면서 쭉 신경을 곤두세웠던 게 풀리면서 피로가 쏟아져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연대장의 호출을 받고 시계를 들여다 보니 어느덧 일곱 시 오십 분. 벙커에 이제 막 도착해서 GRU쪽 일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개인 집무실로 살짝 도망쳐와 전화를 건 것이 방금 전이다.

 

  수화기를 내려 놓고, 한숨을 내 밷으며, 빅토르는 집무실에서 통신대 장교로서 필요한 개인 서류 몇 장을 서류철에 철한 뒤 방을 나섰다. 복도는 혼돈이 따로 없었다.

 

  “본대에 정시 보고 마치고 왔습니다. 연대장 동지.”

 

  “다른 동무들한테는 잘 말해뒀으니까 기 죽을 필요 없다네, 동무. 동무가 두 군데서 일을 하는 바람에 내가 일이 좀 바빠지긴 하겠지만, 군에서 시키고 당에서 시킨 일이니 내가 감수해야지. 정보국 일은 마무리 지었나, 동무?”

 

  “내부 파견 인원 몇 명에게 아직 볼 일이 있지만, 급한 일은 아닙니다.”

 

  “여기도 자네가 급하게 필요하진 않아. 그쪽 일 매듭짓고 오게.”

 

  “감사합니다. 연대장 동지.”

 

  다행인 점은 벙커 생활 중의 유일한 직속상관인 신호연대장이 아주 인격자라는 점이었다. 사실 GRU의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CIA의 일까지 떠 안고 있기에 바쁜 셈이었다. 지금의 일도 결국은 CIA의 업무이기도 했다.

 

  “근무 중 이상 무.”

 

  성큼 성큼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한번 타고, 다시 조금 더 걸어서 GRU의 군 사령부 파견대 상황실에 들어서자,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텔렉스의 기분 나쁜 전문 수신음, 전화 벨소리, 무전기의 잡음…….

 

  그 와중에 빅토르를 발견한 몇 명이 부동 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였지만, 정말 바쁜 녀석들 몇 명은 실질적인 사령부 내 GRU의 최선임자인 그가 들어 온 줄도 모르고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물론, 빅토르는 그것을 책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쉬어, 모스크바는 어때?”

 

  명목 상 파견대장인, 실제 계급보다 두 계단을 더 밟은 소령 계급장을 달은 똘똘한 상위 녀석이 바로 서류철 하나를 건네주며 브리핑이라도 하듯이 대답했다.

 

  “아직 크게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동지. 다만, 시내에서 공수군의 장갑차까지 동원된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는 미확인 첩보가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모스크바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던 게 이해가 갑니다.”

 

  “알 만 하군. 모스크바가 난장판이니 여기도 난장판이 되는 거지.”

 

  “이제 와서 사령부를 자제 시키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사실 제 생각엔, 사령부의 판단이 옳은 것 같지만요.”

 

  “KGB는 어때?”

 

  “주무시기 전이랑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그쪽도 군 사령부의 판단에 동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KGB의 특작이 군 사령부 작계에 따라 행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긴 이 마당에 걔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거밖에 없죠.”

 

  “젠장, 벌써 거기까지 일이 진행 된 거야? 각 군 특작부대 작전 현황 좀 보고해봐.”

 

  “따라 오십시오. 동지.”

 

  발걸음을 조금 옮겨, 전황도 앞에 섰다. 꽤 큼지막한 테이블은 그 전체가 거대한 유럽 지도였다.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우랄 산맥까지 나와있는 거대한 지도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지도 위의 장기말 몇 개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 놓여 있었다.

 

  “KGB의 특전팀 이동은 조금 애매합니다. GSFG와 CGF 예하 작전팀들은 전부 전시 작계 위치로 이동 중인데, 루비앙카에서 직접 통제하는 나머지는 부동 자세거나 아예 행방이 묘연한 판입니다. 따라서, 서독 괴뢰정부와 군에 대한 사보타주 효과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으며, 작전 자체가 전략적인 수준에서 시행되지 않고 있기에 실행 중인 작전도 효과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파견대장을 빙자한 부관이 한숨을 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적당히 맞장구 쳐 줄 때다.

 

  “미국을 건드려야 대어를 낚을 텐데. 이놈의 전쟁 제대로 풀리기는 글렀구만.” 어느새 그의 머리 속은 다시 쥐새끼로서의 음흉함이 발동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은 어때? 아이샤가 안 보이는 걸 보니 벌써 기대 되는 걸.”

 

  “걱정 마십쇼. 걔 지금 베를린에 있습니다.” 어느새 부관으로 돌아간 팀장이 살짝 웃었다.

 

  “하지만 크게 돌아가는 모습은 KGB 애들이랑 비슷합니다. 우리 통제 아래 있는 녀석들은 다들 전시 작계 대로 움직이는데, 우리 선을 벗어나면 다들 갈팡질팡 하고 있습니다. 아마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죠.”

 

  “모든 작계는 시작하고서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다고 누군가 그랬지. 40년간 세워둔 작계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군.”

 

  “그 말, 파시스트 돼지 새끼가 한 말 아니었습니까?” 

 

  살짝 웃으며 이야기하던 ‘부관’은 담배를 꺼내 물은 빅토르에게 재빨리 불을 붙여 주었다. 눈치를 보며 담배를 꺼내 물은 명목상 파견대장이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황공하게도 빅토르가 불이 올라온 라이터를 들이밀었다. 앞으로 몇 달 간은 흡연량이 크게 늘 것이었다. 

 

  ‘부관’은 불리하게 시작된 이 전쟁이 끝난 뒤에 자신이 피우게 될 담배가 미국인들이 던지고 간 말보로 꽁초가 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며, 말을 이었다.

 

  “군 특작부대 역시 돌아가는 꼴이 비슷합니다. 현재 전선 후방의 주요 지점과 일부 기간 시설에 대한 타격 작전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통제 바깥의 부대들은 조용한 것 역시 비슷하지만,이쪽은 그래도 소재 파악은 잘 되고 있습니다.”

 

  “베를린은 어때? 가슴에 흉기를 두 개나 달은 체제 우월의 표본이 벌써 가 있다면서.”

 

  빅토르가 음흉한 눈빛을 띠며 화제를 조금 더 좁혔다. 지금 본사 직원들 중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은 바로 서 베를린에 상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신용도 회복을 위해서라도, 그쪽 이야기를 전파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이샤 동지는 교두보 확보가 끝난 뒤에 서 베를린 영내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으니 아직 체제 선전의 기회는 없습니다. 다만, 베를린을 위시한 독일 전역에 대한 특수 공작은 예정대로 진행 중이니 그것도 시간 문제입니다.”

 

  “베를린의 기관원 놈들은 KGB에서 처리하기로 되었지?”

 

  “예, 동지. 다만 예정과 다르게, 육군 애들도 일에 끼어 든 모양입니다.”

 

  “우리도 아니고 육군? 걔들 소속이 어딘데?”

 

  “제 3충격군 예하의 제 792특수목적중대 입니다.”

 

  “썩 대단한 녀석들도 아닌데. 이상하네. 하긴, 걔들이 우리보다는 널럴하긴 할거야. 근데 뭔 짓을 하려고 육군에서 애들을 빌려간거야? 걔들은 뭐 한다는데?”

 

  “아시다시피, CIA랑 NSA 화이트들을 가로챌 생각이잖습니까. 근데 NSA쪽에 사람이 한 명 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군에서 팀 하나를 빌려 왔는데, 얘들 작계가 골 때립니다.”

 

  “의외의 창의성이라도 발현된거야? 뭐가 재밌는데?”

 

  “작전 차량으로 25톤 트레일러를 요청했답니다. 큼지막한 컨테이너까지 세트로요.”

 

  이제 암기력을 총동원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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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소련군은 2차대전 이후에는 전투병과에 여군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본 팬픽션의 세계관을 제공해주신 Dutchko님을 생각해서 약간 무리수를 뒀습니다. '맑은 날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분이 만든 캐릭터중 하나라서요. 원작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라고 해야하나...?

 

  델타의 여군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한 꼼수는 챕터 1의 첫편에 적어놓았으니 기억이 안 나시는 분 계시면 다시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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