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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이 보기엔 천사가 따로 없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께서 일을 꾸미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 브레즈네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군.”

 

  양 손목이 의자에 결박된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서방측의 그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를 차분히 전개해 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당신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소련 체제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소. 요 근래 들어 생긴 그러한 문제들의 태반은 과거 브레즈네프 동지 시절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수습 불가능할 지경으로 커진 것들이 대부분이고 말이지.”

 

  사상성이 투철한 KGB의 공작원 입에서 나올 이야기라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는 소재의 신선함을 한껏 살려주었다.  어느새 마티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볼로쟈는 이제, 무어라 묻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현 서기장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런 서기장이 대 숙청을 계획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체르노빌 원전 사고였지.”

 

  “대숙청? 지금 고르비가 스탈린 놀이를 계획 중 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왜, 믿어지지 않는 건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지. 지금의 서기장을 중앙 정계에 데뷔 시킨 인물이 바로 누구였는지.”

 

  “유리 안드로포프 전 공산당 서기장…….”

 

  “전 KGB 국장이기도 했었고 말이야.” 볼로쟈가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마치 고르비를 ‘대화가 통하는 민주적인 지도자’로 보고 있던 서방 정계의 시선을 조롱하는 소련을 대표하는 듯 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체르노빌.’ 볼로쟈는 다시 이야기를 곁다리에서 본론으로 돌렸다.

 

  “그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중대한 환경 재앙이자 비극이었지. 고르비는 이 때부터 이상한 생각을 갖기 시작 했고 말이야.” 지금, 고르비에 대해 볼로쟈가 말하는 내용은, 서방 측의 그 어떤 기관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중요한 내부 동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그 무렵에 무슨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위 말하는 보수적인 위치에 있는 주요 인사들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한 게 이 때 즈음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하더군. 겸사겸사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정적들까지 손을 볼 계획이 그렇게 만들어 졌소. 아마 이런 감각은 유리에게 배워 온 거였겠지. 다만 제대로 배울 틈도 없이 유리가 죽었을 뿐이고.”

 

  점점 마티의 표정에서 비릿한 미소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세탁실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델타의 서베를린 HRT 인원들을 포함해서,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홀린 듯이 의자에 단단히 결박된 KGB 소령의 진술을 경청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된 지하실 입구의 두 해병대원의 뒷통수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GRU를 이용해서 군 내부와 KGB, 그리고 일부 정계 인사들까지 몽땅 당원 명부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계획은 그 원대한 야망에 비해 허술한 구석이 좀 있었고, 오래지 않아 우리 국장 님의 귀에 들어가게 된 거야. 여기서부터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모스크바 쿠데타가 시작된거지. 제거 대상으로 살생부에 이름이 실린 자들 끼리 상부상조 하면서 훈훈하게.”

 

  “그 결과가 간밤의 모스크바 총격 사태라, 그 말이군요? 그러면 현재 소비에트 연방의 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쿠데타 세력은 서방에 대한 군사 도발의 의도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러면 GSFG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사실을 알려야죠. 당신들이야 내부 정치 사정으로 혼란스러워진 안보 확립을 위해 이 정도 조치를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측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구요.”

 

  볼로쟈가 기다린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자신의 진술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윗대가리들의 계획은 단순했지. 간밤에 고르비를 강제 연행한 뒤, 다음날  남들 보기엔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고르비의 사임 절차를 진행 시킨 뒤 후계자로서 우리 쪽의 입장을 대변할 적당한 간판을 세워서 전광석화처럼 일을 끝낸다는 것이었지. 다만 그 과정에서 생각 외로 일이 시끄러워 진 게 문제였던 것이고.”

 

  “붉은 광장에서의 대규모 교전을 말하는 것인가?”

 

  “거기에서 뿐만이 아니었지. 그리고, 그 바람에 잠깐이면 충분했을 모스크바와 외부와의 통신 차단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이고,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총참모부와 KGB가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는 사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거야.”

 

  “잠깐만, 그래봤자 결국 GSFG가 실행에 옮긴 것은 < 작계 V >잖아. 결국 당신들 통제에서 벗어난 녀석들도 방어 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뿐인데. 이 정도는 이제 서로 대화하면서 풀어나가면 오해가 풀릴 문제 아닌가?”

 

  “ … < 작계 V >를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지금 이러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볼로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냐. 당신들, 당신네 CIA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면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 해. 멍청한 미국 놈들… 배때지에 기름만 낀 아둔한 자본가들 같으니라고!”

 

  “지금 당신 무슨 말 하는 거야? < 작계 V >는 방어 작전 계획…….”

 

  볼로쟈의 떨리는 목소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내용에 제시카가 무어라 말했다. 보아하니 이미 제시카가 가지고 있는, 서방 세계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정보임이 틀림 없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방어 작전을 구상한 경우도 가끔 있었지. 하지만 말이야…

 자네는 유태 돼지들이 아랍 전체의 군사력을 붕괴시키고 시나이 반도와 예루살렘 반쪽을 마저 장악한  3차 중동전의 개전 과정을 알고 있는가?”

 

  잠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이 자리의 모두들은 미국이 베트남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던  1967년 중동에서 벌어진, 마치 낮에 작렬하는 사막의 태양빛처럼 짧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일 주일간의 대규모 전면전의 개전 과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군사력에서 중동 각국에게 완벽한 열세에 놓여있던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까지도 각국에서 이것을 침략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논란이 일고 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국가 전략, ‘예방 전쟁’ 뿐이었다.

 

  “대 조국 전쟁 이래 꾸준히 다져진 실전 경험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한 소비에트 군사 과학이 생각하는 ‘방어 작전’역시 이와 유사했지. ‘공격 선취에 의한 주도권 확보!’ “

 

  잠시 열변이 잦아드나 싶더니 다시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국가 단위의 방위전략으로 예방 전쟁 개념을 천명한 이스라엘의 경우는 우리와는 물론 경우가 조금 많이 다르기는 하네.아무튼, 당신들도 < 작계 V >의 개념은 알고 있겠지. 유사시 군 사령부 단위에서 수행하는 국지적인 방어 작전. 이것이 < 작계 V >의 기본 개념이야. 뭔가 지금 GSFG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나?”

 

  볼로쟈는 갈증을 느겼지만 두 손이 결박 되어 있었다. 물을 먹여 달라고 하기엔 가오가 안 살았다. 결국 그냥 무시하고 열변을 마저 잇기로 작정했다.

 

  “지금 GSFG는 군 사령부 단위 이상에서의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완전히 거세 당했지. 모스크바는 전혀 연락이 안 되다가  이 마당에서 서방 측이 명백하게 우월한 타이밍에 군사적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네. 쿠데타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을 듣지 못했던 GSFG 수뇌부는 지금 이 사태를 서방 국가의 명백한 침공 징후로 간주하고 있어. 이들은 자신들 전체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혀 승산이 없는 군 사령부 단위의 독자적인 예방 공세를 실행에 옮겨 조국 방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마련할 작정인거야. 자신들의 화력, 물자, 연료, 그리고 병사에서 장군까지 모두의 육신까지, 모든 것을 갈아 바쳐서라도!”

  

  어설픈 정보력과 억측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정세 및 적 동향 예측,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올 파란을 머리 속에 그려낸 모든 이들이 몸서리를 쳤다. 물론 현장에서 열심히 발로 뛰는 이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들은 본국의 본사들이 명령한 대로 가용 가능한 자원 내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어 보고했을 뿐이고, 결국 국가 단위의 군사력 운용에 대한 마스터 플랜을 수립하고 실행한 것은 본사의 정보 분석을 토대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본국의 군인과 정치가들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급 투쟁의 최전선에서 자본주의자들의 모든 전력이 집대성된 NATO와의 경계를 두고 대치하던 이들 주독소련군의 결정 역시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비장하기까지 한 결론이었다. 

 

  조국이 이미 현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 한 것이 확실한 시점, 서방 국가들의 대규모 침공이 확실시 되는 시점에서, 어차피 일어날 전쟁, 누가 보더라도 최종적으로는 확실히 만신창이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몸뚱이를 던져 조국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겠다는 이들의 각오 역시 나름대로의 냉철한 상황 인식과 군사적 판단이 내린 결론이었다.

 

  마치 1914년의 그 끔찍한 8월에, 철도 시간표가 분 단위로 짜여져 있던 슐리펜 플랜을 위시한 각종 동원 계획을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기던 유럽 각국의 정치가들과 군인들처럼.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20시… 오후 여덟 시네요…….”

 

  푸틴 소령은 고개를 쳐 박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 사이 너무 많이 늙은 것 같았다. 

 

  “손 좀 풀어 주쇼. 담배 좀 핍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군가 주머니 칼을 꺼내 손목의 케이블 타이를 끊었다. 다리는 결박 되었지만, 손은 이제 자유로웠다. 라이터와 담배를 압수 당했던 볼로쟈는 마티의 담배를 빌려, 제시카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쉬듯, 허탈하게 내 뱉었다.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어.”

 

  지금 이 순간, 동서 양 진영 곳곳에, 또 다른 빌헬름 2세(Wilhelm II.)와 소(小) 몰트케(Moltke) 원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8월의 어느 날, 독일군이 룩셈부르크 국경을 넘던 그 순간 그 둘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서베를린 어느 주택가 지하실의 몇 명 뿐이었다.

 

  급조된 심문실 안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던 두 해병의 얼굴빛은 너무나도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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