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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로쟈는 자신의 몰골이 엉망일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양 눈가는 시퍼렇게 멍이 들다 못해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을 터였고, 아까 입 안에 감돌던 이물감과 잇몸의 통증, 침을 뱉었을 때 같이 나온 물체를 보아 이빨도 두어 개 날아 간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정신은 멀쩡했다. 사실 그가 몸을 희생하면서 신분을 끝까지 털어놓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저 자신의 신분이 기밀 사항에 속한다는 1차원적인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자신의 신분 노출과, 서방측의 오해를 풀어 전쟁을 막는 것의 가치를 저울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잃었다 전혀 모르는 곳에 떨어진 것이 조금 문제긴 했지만, 심문하는 녀석들의 솜씨가 영 서툴은 탓에, 그럭저럭 계산을 마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역으로 알아 볼 생각이었다. 설령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들어 가자고. 당신들이 진짜 알고 싶은 게 내 진짜 신분 따위 일리가 없잖아? 어디 내가 그 녀석이라고 가정 해 보고,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직접 물어 보란 말이야.”

 

  제시카는 살짝 당황했다. 이 녀석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거지. 하지만 이 녀석의 눈은 아까 전의 자신을 놀리고 이빨이 나가도록 두들겨 맞을 때의 눈빛이 아니었다.  일단 한번 대화의 물꼬를 터 볼까. 

 

  심문이라는 것도 결국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이고, 빠져나갈 길이 없이 계속되는 폭력과 고문은 취조 대상자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보단 적개심만 높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슬슬 대화를 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 제시카는 잠시 세탁실에 다녀왔다. 이번엔 다시 제시카가 먼저 시작했다.

 

  “그래, 할 말은 정리 했어요?”

 

  “뭐, 대충. 그쪽은, 이쪽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듣자 하니 -  날 족치고 싶은 녀석들이 아주 많다면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과 우리이죠.”

 

  “쓸 데 없는 말은 집어 치우자구, 제시카.”

 

  볼로쟈, KGB의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소령은 냉소하며 쏘아 붙였다. 영어로 쏘아 붙였다. 갓 정계 입문한 정치 초년생 하원 의원이 구사하는 것 같은, 동년배의 교양 있는 사회 지도층이 구사할만한 깔끔한 미국식 영어였다. 

 

  상대방의 정체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순간부터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베를린 오피스 주재 NSA의 선임 정보분석관. 물론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대 달라고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진심 섞인 농담이었다. 물론 그것이 이뤄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는 것 역시 익히 일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실명을 언급 당한 제시카가 당황하는 것이 빛과 그림자의 장난이 빚어 낸 시야 장애로 인해 보이는 어렴풋한 실루엣 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보아하니, 지금 저 쪽엔 딱히 밥값 하는 전문가가 없다. 여기서 한방 더 먹여 주면 보다 편안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 내가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사람 맞아.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1952년 7월 10일생, 현 KGB 소령. 서류로는 드레스덴 지부의 연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로 이 도시에서 정보 수집과 서방 혁명 동지들에 대한 연락 업무를 겸임하고 있지. 나는 내 정체를 정확하게 당신들에게 밝혔다. 당신들도 대화를 하고 싶다면, 저 빌어먹을 스포트라이트부터 끄고 사람답게 전등불을 켜는 게 어떻겠나? 지금 당장!”

 

  마티는 고민하다가 명령했다. 심리적 위압감을 위해 준비한 장난감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일반적인 형광등 불이 들어왔다. 볼로쟈의 눈에 아직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검은 생머리의 미인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리가 조금 누추한 것 같지만, 반갑소. 방금 말한 대로요. 내가 볼로쟈. KGB의 푸틴 소령이요. 많이 분위기가 상했지만… 동업계 종사자로서, 반갑구만.”

 

  “…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 해 줄 수는 없어요.”

 

  “순순히 대답해 줄 거라고 말 하지도 않았지. 나도 이유가 없었다면 여기서 당신들이 하루 종일 두들겨 패도 내 정체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소. 다른 방에도 사람들 있지 않나? 내게 치과의사 소개해줘야 할 그 썅놈의 상판때기가 조금 궁금하구만.”

 

  “그 썅놈 바로 여기 있다. 내가 누군지는 이미 잘 알고 있겠지?”

 

  “당신이나 제시카나 근본은 화이트니까, 그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지. 마티, 네놈이 날 직접 두들겨 팼다니 이거 황송하기 짝이 없구만. 나 KGB의 푸틴이오. 일단은, 대화를 좀 해 봅시다. 당신들도 서 있지만 말고, 의자라도 가져다 놓고 말이야. 그 쪽은 사지 멀쩡하잖아?”

 

  해병 몇 명을 시켜서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왔다. 비록 손이 뒤로 묶인 상태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은 볼로쟈는, 눈탱이 밤탱이가 된 얼굴에 슬쩍 영업용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좀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일단, 지금 몇 시요? 내가 정신을 잃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

 

  마티와 제시카가 서로를 쳐다봤다. 약간의 시선 교환 이후, 마티가 입을 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당신은 우리가 잡아 온 뒤로 3일 동안 잠만 잤어. 지금은 오전 11시 조금 넘었고.”

 

  볼로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오, 그래? 그 동안 전쟁은 없던 거지? 그렇지?”

 

  “쿠바 미사일 사태 저리 가라는 긴장 상태지만,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지. 핫 라인은 지금 불이 나고 있을걸. 아무튼, 당신들도 안 넘어오니 우리가 넘어 갈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리고 볼로쟈는 다시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개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씨부려. 방금 네 녀석이 한 말 두 가지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니까.”

 

  볼로쟈, 푸틴 소령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열 받기 시작했다. 이 병신들은 기껏 멍석을 깔아 놓아도 같잖은 장난질이나 하고 있었다. 이런 말장난이나 할 요량이었다면, 그는 차라리 일주일 내내 구타 당하는 것을 견디는 편이 속 편했다. 두 손이 멀쩡했다면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쾅  후려쳤을 것이다. 볼로쟈는 애써 자신을 진정 시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정말 뭐가 궁금한 지 말 할 생각 없는 거지? 물어만 보면 내가 아는 건 전부 말 해 준다는 데도 왜 이런 식이지? 이건 그냥 시간 낭비야. 당신들이 귀중히 여기는 돈보다 더 귀중한 시간! 당신 말대로 3일이 지났다면, 이미 전쟁이 시작 됐겠지만, 어떻게든 협상 테이블을 준비할 수라도 있을 테고, 만약 아직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아직 내가 끌려온 지 네 시간도 안 지났다는 이야기니까!”

  

  미국인들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알고 있는 < 작전 계획 V  >는 엄연한 방어 계획이었고, 지난 몇 년 간 GSFG만의  단독 군사 도발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가 일부의 입에서 오가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서방 국가들이 전부 정신을 차리고 미국마저 동원령 선포를 고민하는 단계 에서면 그들만의 기습 공격 역시 전혀 전략적, 전술적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KGB 소령은 모두가 바라지 않는 전쟁을 기정사실로, 그것도 구체적인 시간까지 언급하며 현실적인 위협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음, 이봐 볼로쟈. 일단 거짓말을 한 점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내가 도대체 왜 빨갱이에게 미안해야 하는 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봐 아메리끼, 난 고르바초프같은 철부지가 아니야. 당신들이랑 대화를 해서 우리 조국이 얻은 게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지금은 그 양반이 좋아하는 대화를 안 하면…….”

 

  “아, 진짜. 개소리 좀 그만 하면 안 되겠어? 무슨 잔꾀를 부려서 우릴 엿 먹일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지금 24시간 동안 너희 빨갱이들이 벌이는 정치 싸움질 뒤치다꺼리 하는 것 만으로도 피곤해 죽겠으니 말이야.”

 

  마티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배려 해 준 것 만으로도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상대가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것 같아 기껏 호의를 보여 줬더니 결국 애매한 말장난으로 사람을 농락하려는 것이 틀림 없어 보였지만,

 

  “미안하지만 나도 네 녀석 상대로 말장난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이러다간 24시간 뒤에 내 고향에 핵폭탄이 떨어 질 지도 모르니까!”

 

  “대단한 사명감을 품에 안으셨구만. 그래, 방금 궁금한 게 생겼어. 네 녀석은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우릴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는거지?”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 소비에트 연방과 너희 파시스트 돼지새끼들의 전면전을 막고자 함이지. 사실 당신들까지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윗대가리들은 꽉 막혔고, GSFG에 말 해 주기엔 이미 시간도 장소도 영 글러 먹은 듯 하니 말이야.” 이미 무언가 각오를 한 볼로쟈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나는 이번 사건에 관련해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설령 조국에서 나를 반역자라고 부를지라도 말이야.”

 

  마티와 제시카는 주제를 모르고 너무나 당당한 빨갱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다. 제시카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지금 본사에서도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모스크바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쿠데타의 주체는 누구죠?”

 

  잠깐 주저했지만, 결국 볼로쟈는 입을 열었다. 

 

  “… 쿠데타라는 점 까지는 파악 하고 있군. 좋아… 이번 불장난을 기획한 것은 KGB와 붉은 군대 총참모부, 그리고 공수군과 전선공군, 육군 일부 장성들이야.”

 

  복잡한 마음 속을 들여다 볼 방법이 없는 제시카와 마티는 일단은 들어나 보자는 느낌으로, 차분히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과 그들의 상전이 예상한 것과는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벌인 이유는? ”

 

  “글쎄… 생존 본능이란 표현이 정확하겠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먼저 한번 뒤엎어 보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자, 첫 번째 이유였으니까.”

 

  현 정권의 대화 노선에 반발한 군 내 강경파 일부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라는 본사의 추측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련의 미국인들에게는 발상의 전환과도 같은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였다. 제시카는 질문의 깊이를 조금 심화시켰다.

 

  “그런 이유 뿐인건가요? 다른 정치적인 이유는 없고?”

 

  “당장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나?”

 

  볼로쟈, 그러니까, 블라디미르 푸틴 소령은 어느새 본인의 포커페이스를 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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