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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1 : 서베를린은 언제나 맑음 -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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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대장한테는 어제 신고했다. 마지막 절차로서 중대 행정반으로 향하는 레이븐 스콧(Raven Scott) 일병(PFC)의 발걸음은 전투화를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세 배는 가볍게 느껴졌다. 지금 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오자 그 경쾌한 발걸음이 평소의 두 배 정도로 느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들뜬것은 여전했다.
 
  “Good Morning, Sir.”
 
  2소대 선임하사인 슈미트 클라인(Schmidt Klein) 상사(MSG)는 경례를 받아주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스콧 일병이 생각하기에 그는 뭐 나쁜 사람도 아니고 자기 직무에도 충실한 사람이라 기분 나쁘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내 발목 잡지 말고 그냥 자기 일만 봤으면 좋겠는데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자기 좋을 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다.
 
  “기분 좋겠네, 일병?”
 
  “찢어질 것 같습니다. 얼마만의 휴갑니까?”
 
 그의 기분이 매우 좋으면서도 시간에 쫒기듯 조급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휴가, 휴가, 휴가! 전 세계의 모든 군인들이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지 않고 간절히 염원하는 그것. 바로 오늘이 그가 미국행까지 계획한 꽤 긴 일정의 휴가를 나가는 날이고, 아까도 밝힌 행선지인 중대 행정반으로 가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인사계 데클란 오닐(Declan O'Neill) 상사(1SG)에게 휴가 신고를 빙자한 휴가증 수령을 위한 요식행위를 치르기 위함이었다. 망할 놈의 휴가증만 아니었어도 그는 아침 점호가 끝나자 마자 위병소를 빠져나와 시내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을 터였다. 안타깝게도 비행기는 시간이 안 맞아서 당장 탈 수 없긴 했지만.
 
  “바로 공항으로 가는거냐?”
 
  그런 생각을 하자 마자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바로 아쉬운 점을 치고 들어가는 클라인 상사의 이야기도, 꼭 그런 소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여기서 지체되는 시간이 길어지려는 점도 살짝 짜증나긴 했지만, 그래도 휴가 첫날의 기쁨이 사그라들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었기에 스콧은 그럭저럭 웃는 낯으로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맘 같아선 당장 비행기 타고 싶은데, 비행기표가 잘 안 구해져서 말이죠. 수송기편으로는 오늘 당장 출발 가능하긴 한데, 휴가나가면서 짐짝 취급 받는건 사절이라 그냥 제일 빠른걸로 잡았는데, 그게 내일 비행기라지 뭡니까. 에휴.”
 
  그러자, 언제나 그랬듯이 어떤 소재로든 베트남으로 연결되는 저 영감 특유의 젊은 시절 베트남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 때는…….” 하면서 자신이 ‘남 투어’(Nam Tour)를 갔던 시절에도 본국으로 휴가를 갈 수 있었다면 짐짝 취급 당하는 수송기건, 퀴퀴한 밀항선의 창고 안쪽이건 뭐건 상관 없으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본토로 가고 싶었을 거라는 둥, 쉰 내 풀풀 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그는 슬쩍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몇 분이나 잡아 먹은 거야? ‘시간이 아깝다면서 자기가 시간을 뺏고 있어, 제기.’
 
  “근데 니네 동네가 여기보다 더 위험한 거 아니냐? 러스키들은 모스크바에서 시키기 전에는 방아쇠를 땡기지는 않지만 , 거기는 완전 FFZ잖아.”
 
  “에이, 거기도 다 사람 사는데입니다!”
 
  “농담이야, 일병. 아무튼, 그럼 휴가 잘 -  다녀오시게. 나는 이만 사라져주지.”
 
  “수고하십시오.”
 
  고지를 눈 앞에 두고 몇 분의 아까운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결국 그는 인사계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시간에 중대 행정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휴가증을 수령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위병소를 향할 생각으로 전날 미리 싸 두었던 개인 소지품 가방까지 들고 왔던 그의 행색 탓인지, 휴가증을 손에 쥐고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인사계 오닐 상사님께서는 신고를 하려는 그를 보며 손을 휘휘 내젓고는 바로 휴가증을 내 주며 마치 슈미트 상사와도 같은 태도로 그의 시간을 뺏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허튼 짓 하다가 마약사범으로 잡혀가거나 총 맞고 시체되지 말고 조용히 놀다 오라구.”라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계획상으로는 오랜만의 미국행을 그렇게 찐따처럼 보낼 생각이 없었다.애초에 집에 가는 순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나고 자라온 고향은 뉴욕 시에서도 이름난 슬럼이었기 때문이다.
 
   약이야 한번 하면 끝이 없으니 처음부터 손을 안 댔지만(하지만 레이븐 스콧 일병의 철학에 따르면 마리화나는 약이 아니라고 한다.) 가벼운 일탈행위 정도야 고향 친구들 만나서 술 좀 들어가다보면 할 수 있는 짓 아니겠는가.
 
  “그럼 빨리 나가 봐. 1000시부터 VE데이 기념행사 진행하기로 되어있는데 자꾸 미적대면 너도 행사 참여시키고 점심까지 먹이고 보낸다.”
 
  “잽싸게 나가보겠습니다.”
 
  “잘 다녀 오도록.”
 
  안경잡이 영감님의 엷은 미소가 섞인 협박아닌 협박에 과장된 태도로 잽싸게 행정반 문 밖을 나서고 보니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도 종종 눈에 띄던, 복도 여기저기도 방탄모를 눌러쓰고 서스펜더를 걸친 채 분열 준비로 웅성대는 병사들이 더욱 많이 눈에 띄었다.
 
   스콧은 덩치에 걸맞게 크고 아름다운 SAW 사수여서 분열을 직접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종류의 행사는 안 하는 게 나은 귀찮은 일임은 틀림 없기에 자신이 퍽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을 노리고 휴가를 5월 8일에 떠나도록 짠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 6월에 있을 시가 행진을 빠지고 휴가를 쓰고 싶었지만, 이 점은 다른 사람과의 휴가가 겹쳐서 어쩔수가 없었다. 겹치는 상대가 그냥 SPC(상병)도 아닌 CPL(상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인원들 중에서도 소총을 메고서 중대기를 들고 바쁘게 걸어가는 녀석의 뒷통수가 왠지 익숙하다 싶어 뒤통수를 탁 치고 보니 역시나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재수 좋은 새끼. 얼른 안 나가고 뭐하냐?”
 
  그의 훈련소 동기인 2소대의 패트릭(Patrick) 일병(PFC)이 씩 웃으며 물어봤다. 군대 오기 전에는 별로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는 흰둥이 녀석이지만 적당히 무식하고 적당히 사교적인 게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라 친하게 지내고 있던 터였다. 
 
  “말 안 해도 나갈 거야. 너희 선임하사랑 인사계가 쌍으로 발목을 잡아서 이 모양이다.” 
 
  “난 솔직히 말해서 니가 행사 마치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 휴가는 아주 그냥 더럽게도 잘 썼어요.”
 
  “실컷 뺑이쳐라. 난 간다!”
 
  다시 한번 방탄모를 쓴 동기녀석의 뒤통수를 살짝 탁 치고 위병소로 달려나가는 스콧 일병의 기분은 UH60의 옆 문짝을 열어놓고 양다리를 바깥에 걸쳐놓은 채 즐기는 속력에서 발현되는 쾌감보다도 더욱 짜릿했다. 벌써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도시의 공기가 그의 폐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도 엄연히 서베를린의 안쪽에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일단, 클럽부터 가자!”
 
  베를린 여단에 배속된 502공수연대 4대대에 소속된 자유로운 영혼, 레이븐 스콧 일병. 그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아직 22시간 20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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