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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1 : 서베를린은 언제나 맑음 -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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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이야, 볼로쟈.(Володя)”
 
  서로 등을 대고 있게 설치된 두 벤치. 그의 6시 방향에 앉아있던 영감 하나가 비교적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요즘도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어떻게 알았어?”
 
  잘 못 지내면 여기 있지도 못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볼로쟈는 슥 상체를 뒤로 돌리고 그에게 말했다.
 
  “얼굴만 봐도 알죠. 근데 무슨 일이시죠? 이렇게 직접 만나자고 하시고.”
 
  볼로쟈는 다시 몸을 바른 자세로 고치고선, 기운을 조금 빼고 느슨하게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템펠호프 공항 남쪽에 위치한, 블리처 공원(Britzer Garten)에서 봄볓 햇살을 받으며 사방에 널부러져있는 자본주의 인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구들과는 다르게 참 속 편하게 보였다.
 
  “전에 말해줬던 거, 기억 나?”
 
  “말 해 주신게 한 두개가 아니잖아요, 콜랴.(Коля)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건데요?”
 
  “전화 말고, 두 달 전에 여기서 내가 말 해준 거 있잖아.”
 
  라고 운을 떼더니, 번잡한 시내에 비해 많이 조용한 공원이라 그런지 고개 너머에서 ‘콜랴’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 후, 상대 쪽 에서 ‘후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확 밀려왔다. 볼로쟈 역시 흡연자인지라 목구멍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두 달 전에 여기서 말해줬던 이야기라, 그때 볼로쟈와 그는, 같은 벤치에서, 같은 자세로 앉아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서기장이 뭔가 꾸미고 있어.”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콜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철부지 서기장 말씀이십니까? 자칭 개혁 개방 말고도 더 벌일 짓거리가 있다니 그게 더 궁금한데요.”
 
   솔직히 또 무슨 철없는 망상으로 자신들을 엿 먹이려길래 이러나 싶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 볼로쟈의 반응에, 콜랴는 지금처럼 담배를 물고 또다시 한참 뜸을 들이더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역시도 사태의 심각성을 대충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고 말이다.
 
  “놀라지 마, 서기장이 스탈린 이래 최대 규모의 숙청을 준비 중 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어. 브레즈네프 시절의 실책을 자신이 떠안고 금방 실각하긴 싫다 이거야. 우리 KGB를 포함해서 군부, 내무부 등 사방에 깔린 눈에 밟히는 녀석들을 다 정리할 계획이라는구만.”
 
  “그 양반이 혼자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런게 우리 없이 가능하다고요?”
 
  “놈은 GRU를 통해서 일을 저지를 생각이야. 꼴에 군 정보국이라고 군 내 인사들에 대한 작전 계획은 이제 실행 명령만 기다리는 상황이고, 지금은 내무성이랑 루비앙카에 대한 준비 작업을 진행중이라는군.”
 
  그런 살벌한 이야기였다. 아직은 코트를 입고 나와야 하는 쌀쌀한 3월 초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동안 뭐 달라진거라도 있습니까?”
 
  “그동안 꾸준히 준비하던 것일 뿐이야.”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볼로쟈가 담배를 꺼냈다.
 
  “찰스 다윈 동지의 진화론은 알고 있지?”
 
  “물론이죠.”
 
  담배를 입에 물고 금도금이 된 독일제 고급 가스 라이터를 꺼냈다. 지포는 너무 미국 물건 냄새나서 대용으로 그가 애용하는 라이터였다.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에 대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일반 상식이죠.”
 
  담배에 불이 붙고, 깊게 들이마셨다. 폐 속으로 들어간 니코틴과 유독물질들이 온 몸에 쫙 퍼지고, 니코틴은 혈액을 통해 전신에 퍼져 몸을 기분 좋게 해 준다. 바람의 방향은 바뀌지 않아서 콜랴에게 연기가 날아가진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두 종류의 원시 인류야. 다들 알다시피 크로마뇽인이 우리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고,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지. 그런데 그거 아나?”
 
  “무엇 말이죠?”
 
  “네안데르탈인의 체격은 크로마뇽인이나 그 후예인 현생 인류에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어. 오히려 더욱 튼튼했지. 뇌 용적 역시 우리와 동등, 혹은 근소한 차이로 우리보다 더 컸고 말이야. 지능으로 보나, 신체적 특징으로 보나 크로마뇽인들은 열세했지. 그런데 그들은 멸종했고, 크로마뇽인은 살아 남아서 우리의 조상이 되었지. 그 이유가 뭘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감이 온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만…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의 경쟁이 있었고, 크로마뇽인 쪽이 결국 이겼다는 가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가설들 중 하나 일 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게 진짜라면… 과연 크로마뇽인들이 전투 중에 자비를 구걸하는 네안데르탈인들을 살려 뒀을까?”
 
  어느새 궐련의 반을 빨아 들였다. 보는 경찰도 없겠다. 길바닥에 대충 담뱃재를 털었다. 지나가던 아가씨 하나가 눈쌀을 찌푸리며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져간다.
 
  “그럴리가 없죠.”
 
  “대조국전쟁때 파시스트 돼지새끼들이 했던 것 같은 대 학살이 벌어 졌을거야. 그럼으로서 그들의 개체 수는 급속도로 감소했고, 크로마뇽인들이 승리자가 될 수 있었겠지.”
 
  늙은이가 젊은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비밀 공작을 준비 중이야. 상부에선 그 어느 때 보다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어. 작전 개시는 내일 새벽. 대조국전쟁 기념 행사를 위해 모스크바에 간 106공수사단의 공수 연대 녀석들은 545에서 대전차 미사일까지 편제 화기에 필요한 모든 실탄을 전부 준비 했다는군. GRU 본부를 급습하기 위한 특작부대도 이미 도착한 지 오래야.”
 
  “알파입니까?”
 
  “그 친구들은 반 쯤 서기장 경호 부대라서 일부러 빼놨지. 대신 내무성에서 별도로 준비했다네. 그러고보니까, 위에서는 크레믈린 경비연대에게도 말을 안 하고 진행중이더군. 우리 식구라도 사실상 적으로 간주한다는 이야기지.”
 
  어느새 담배 한개피를 다 날려버렸지만, 몸은 더 많은 니코틴을 원하는 것 같았다. 다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켠 볼로쟈는 불을 붙이고는 잠시 불꽃을 들여다 보았다. 바람에 흔들려 꺼질 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그냥 먼저 뚜껑을 덮었다.
 
  “한동안 시끌시끌 하겠군요.”
 
  “당분간 그쪽도 혼란스러울 거야. 그래서 미리 알려 주는 거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모두의 모가지가 걸린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갑자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슬슬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된 것 같았다. 대화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그가 결정 했으니까.
 
  “뭐, 제가 할게 있을까요. 다 모스크바의 동지들이 해 줄 텐데.”
 
  “오히려 자네의 역할이 더 중요해 질지도 모르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시점에서,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불장난을 벌일 텐데, 나토 놈들이 가만히 있겠어? 위에서는 서방 국가들의 동원령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
 
  “흠. 병신 같은 서방 좌파 애들이랑 말 섞는 것보단 재밌겠네요.”
 
  “하하. 그 돈키호테들이랑 너무 친해지면 정신 건강에 해롭지. 쓸만한 장난감들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오랜만에 직접 만나서 한다는 이야기가 너무 삭막해서 미안하구만.”
 
  “맨날 이런 얘기밖에 안 했잖아요. 여기 파견근무 끝나면 같이 술이나 먹죠. GSFG 본부에 술집 괜찮은 데 있던데.”
 
  “아, 거기 좋지. 근데 자네 다음 근무지로 발령 난 곳이 드레스덴 지부였나? 좀 멀텐데.”
 
  “봐서 짬 내면 시간 나겠죠. 거기 있는 GRU 녀석이랑도 언제 한잔 해야되고 말이죠. 개 모가지가 계속 붙어 있다면 말이지만.”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들도 별 것 없었다. 적당히 인사하고, 헤어진 뒤, 볼로쟈는 트라반트같은 쓰레기는 물론이고 본국에서 타던 라다보다 훨씬 좋은 독일제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걸고 전자시계에 눈을 향하니 표시된 시간은 오후 2시 41분. 주차장에서, 그는 잠시 고개를 핸들에 쳐박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처음 본 사람들이 언제나 겁을 집어먹는다는 눈빛이 오늘따라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KGB( КГБ) 소령. 1989년 현재 37세. 임무수행을 위해 서베를린에서 산지 대충 일년정도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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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푸틴은 서베를린에 갔다는 근거는 없지만, 89년에 대조국전쟁 기념 처레이드를 하고 고르비가 음험한 권력욕을 드러내는 세계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평행세계고 대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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