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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제공 및 편집  : Dutch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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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직 근무는 참 피곤한 법이다. 단순히 밤을 새워서 피곤한 것이 아니다. 서 본 사람은 안다. 일이 터지면 일 처리 하느라 피곤하고, 일이 없으면 따분하고 심심해서 피곤한 것. 사실 군 생활이라는것이 이런 것 일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경례를 붙이는 육중한 철문 앞의 당직근무자에게 출입증을 건네주고, 당직병은 출입증을 제 자리에 놓고선 그 자리에 있던 그의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신분증을 확인도 안 하고 대충 주머니에 쑤셔박은 그는, 철문을 나서면서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는, 기지개를 한번 쭈욱 펴고서 머리에 쓰고 있던 정모를 들어올리고는 다른 손으로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머리에 기름기가 좀 있다. 찝찝했다.

 

  아래의 지하 벙커랑은 전혀 매치가 안되는 가정집의 지하실로 내려가는듯한 인테리어의 계단을 올라 1층의 방 곳곳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기중인 게이트 경비병력들의 경례를 건성으로 받아치며 현관문 밖으로 나선 그는 뒤를 돌아 그가 나섰던 건물을 한번 바라보았다. 

 

  아직 태양빛이 덜 들어 시퍼런 느낌을 주는 새벽녂의 하늘을 배경으로, 그냥 평범한 가정집 하나가 그의 눈 앞에 있을 뿐이었다.

 

  베를린 근교의 죠센 - 뷘츠도르프에 소재하고 있는 GSFG(주독소련군, ГСВГ) 본부의 핵심 시절중 하나인 ‘니켈’(Никель) 벙커를 나선 제 197독립신호연대의 통신장교, 빅토르 글라디쉐프(Виктор Гладышев) 소령은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최전선에서 복무하는 중이다. 소속은 방금 전에 언급했던 GSFG. 유사시 서방 제국주의자들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제일 먼저, 제일 많은 피를 흘리게 될 독일이니 최전선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이게 최전선 근무라는 건 잘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과장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최전선에서 살짝 후방의 펜대나 굴리는 탁상물림이라 결국 그의 일은 본국에서의 업무와 크게 다를것이 없었다. 외국 구경이라도 하니 나쁜 경험은 아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GSFG 사령부 근처의 사람 사는 곳들은 소련 사람들이 다섯 자리로 거주 중이라 제 2의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같은 느낌을 주는 판이니 그냥 예전의 키예프 근무 시절이랑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느낌이다. 

 

  라다(Лада, 러시아의 승용차 브랜드)에 몸을 실은 글라디쉐프 소령은 몇 분 정도 차를 움직여서 니켈 벙커와 인접 군사 시설들을 벗어나 그의 관사를 포함한 여러 군인들의 집이 있는 거주구쪽으로 향했다. 다만 바로 집에 갈 것은 아니었다. 잠깐 들를 곳이 있었다.

 

  “여어, 그동안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어.”

 

  아침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종업원 말고는 아무도 없는 가게에 들어오니 이 근방에서 그가 아는 몇 안되는 독일 현지인인 주인 양반이 얼굴에 영업용 미소를 띠면서 그를 반겼다. 그의 단골 술집이었다. 

 

  운치있는 적당히 어두운 조명의 기운이 사람을 절로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혀 감상에 젖어있지 않았다. 아까 전의 기름에 떡진 머리칼을 벅벅 긁을 때의 피로한 느낌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차가운 눈빛이 그의 눈가에 맴돌고 있었다.

 

  “항상 하던 걸로, 한 잔 주세요.”

 

  칵테일 같은건 여자들이나 마시는거다. 얼음조각은 커녕 맹물 한 방울도 안 탄 스톨리치나야(Столичная)가 나오고, 그는 천천히, 하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우고는, “한잔 더.”라고 말했다. 주인장은 익숙한 솜씨로 따라 주더니만, 

 

  “그러고 보니까, 부탁했던 보드카가 있었지? 그거 찾으러 왔나?”

 

  “예. 이맘때쯤이면 슬슬 도착 했을 것 같아서.”

 

  참 능청스럽다. 이바닥 밥 하루이틀 먹은 사람이 아닌게 맞다 싶다. 실은 바로 술집 주인이 그에게 먼저 얘기했다. ‘물건 찾아가라고.’ 날짜까지 통보해주지 않은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부탁 받은 물건이라 구하긴 했는데, 술 맛은 지금 내가 준 게 더 낫지 않아?”

 

  찬장 구석을 뒤지던 술집 주인 아저씨가 그의 눈 앞에 보여준 것은 포장지도 안 뜯은 한 병의 영국제 스미노프(Смирнов) 보드카였다.

 

  “뭐, 만든 사람은 러시아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가끔 다른 것도 마셔 보고 싶어서.”

 

  별 이유야 있겠나. 저쪽 녀석들의 이상한 취미일 뿐일 터였다. 쓸데없이 티를 내는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라서 조금 맘에 안 들었다. 즉석에서 트집 안 잡힐 이유를 만드는데는 익숙해서 문제 없지만, 자기들이 일 벌려놓고 굳이 갖잖은 연기를 겾들여서 내게 뒷수습을 맞기는 저런 행태는 조금 맘에 안 들었다.

 

  “다른 게 마셔보고 싶으면 슈납스를 마시라구. 독일까지 와서 보드카가 뭐야.”

 

  “어차피 여길 봐도 저길 봐도 고향 사람들 뿐인데요, 뭐. 여기서 말 섞어본 독일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어요.”

 

  라고 말하면서, 주인 아저씨가 꺼내준 종이 봉투에 역시 주인 아저씨가 구해준 보드카를 담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용건은 없다.

 

  “ 이제야 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전 이만 갈께요. 다음에 또 뵙죠.”

 

  “술값은 내고 가야지!” 미적 미적 가게 현관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빅토르의 등 뒤에서 주인 양반이 말했다. 워낙 조용한 술집이라 크게 소리를 지를것 없이 조곤조곤 말해도 똑똑히 빅토르의 귀에 들렸다. 빅토르는 항상 그랬다는 듯, 오른손을 살짝 흔들며 맥빠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외상. 곧 월급 들어오잖아요.”

 

  “이런, 개자식! 다음에 또 오라구. 이자까지 쳐서 술값을 두 배로 받아주마.”

 

  “왜 그래요, 참. 자본주의자도 아니구.”

 

  설렁설렁 술집 밖으로 기어나와보니 하늘은 푸른 빛은 거의 사라져가는 것이 이젠 ‘아침’이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보드카 봉투를 조수석에 던져놓고, 다시 차를 몰고 몇 분을 더 달린 그는 다른 집들과 똑같이 생긴 그의 관사에 도착했다.

 

  차를 대충 주차시키고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온 그는 상의를 대충 소파 위에 던져넣고, TV를 틀은 뒤 셔츠 바람으로 보드카 봉투를 가지고 식탁으로 가져갔다.  포장을 뜯고, 보드카를 종이곽에서 꺼낸 뒤 종이곽 안에 아무것도 없음에 살짝 의아해진 그는 보드카 병 바닥을 살펴보았다. 테이프로 종잇조각이 하나 붙어있었다. 이제서야 안심이 된다. 메세지는 확실히 수령했다.  

 

  ‘비화기의 비화 코드를 변경. 적혀있는 코드로 수정할 것.’

 

  심드렁한 눈빛으로 독일어로 적혀있는 쪽지의 내용과 비화기의 비화 코드를 확인한 소령은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다가, 벗어둔 상의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코트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서는 불을 붙이고 쇠로 된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위치를 보니 일반 전화나 종이쪽지를 전해준 쪽의 전화는 아니었다. 그럼 이 전화의 주인은 하나 뿐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수화기를 들고서, 입을 열었다.

 

  “정시 보고. GSFG 본부 내 특이 동향 없습니다.”

 

  주독소련군 제 197독립신호연대 통신장교, 주독소련군 파견 GRU 방첩 및 감찰 담당요원, CIA GSFG 스테이션의 끄나풀. 모든 것이 그의 진짜 신분이다. 소련 육군 통신장교 빅토르 글라디쉐프 소령. 올해 나이 서른 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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