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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1 : 서베를린은 언제나 맑음 -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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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를 마치고 우리는 어둠침침한 너구리굴에서 슬슬 기어 나왔다. 영미 양국의 ‘회사원’들과 베를린 경찰서장이 회의실 안을 너구리굴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비흡연자들인 3국의 특수부대원들은 기분이 영 안 좋았지만, 다윗 왕의 반지에 씌였다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신으로 버텨내었다. 여자임에도 남자와 동일한 기준으로 산악 구보를 통과했을 때 사용했던 자기세뇌법중 하나이다.
 
  계단 위로 올라가보니 검문하는 해병은 낯이 익긴 했지만 아까 전의 그 해병은 아니었다. 거지도 멋있게 보이게 한다는 기밀 취급 인가자용 패찰을 도로 돌려주고, 신분증을 받은 뒤 나서며 나는 함께했던 H팀의 부팀장, 레스터 상사에게 말했다.
 
  “마지막 회의는 어땠어?”
 
  “저런 게 어째서 기호품으로 취급되는지 모르겠어.” 앨런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안됐네. 넌 저기를 1년은 더 가야 하잖아.”
 
  앨런의 말 대로, 난 여기서 1년을 더 새로운 팀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지금은 ‘R팀’이라고 불리는, 교대를 위해 새로 온 팀원들이랑은 한참 손발을 맞춰나가는 단계. 이 녀석들도 다들 좋긴 하지만,
 
  “정들자 이별이네. 니들 꽤 괜찮았는데. 팀장도 구면이라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고 말야.”
 
  그 말에 앨런은 운전석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에드 말이냐. 베이루트에서 같이 작전 뛰었던 게 에드랑 매튜라고 들었었는데. 그러고보니까, 궁금한게 있어.”
 
  “뭐가?”
 
  “탄창 하나 빛 졌다는게 도대체 뭔 소리야?”
 
  85년 레바논에서도 조수석에 있었지. 탄창을 빌렸던 때와 같이 조수석에 앉아, 그때와는 달리 안전벨트를 차면서 말했다.  별 일 아닌데, 하도 입버릇처럼 나불대니 다들 좀 궁금했나보다. 슬슬 사건의 진상을 알려 줄 때가 되었다.
 
  “아, 그거. 별거 아냐. <닥스훈트> 잡을 때처럼 연극 하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냅다 납치하고 차로 튀었거든. 근데 걔들이 쫒아와서 카레이싱 하다가 총알이 떨어져서 빌렸지.”
 
  “정말 별거 아니었네.”
 
  “맞다면 맞고, 아니라면 아니고. 몰라. 집에 가서 운동 좀 해야겠어. 작전 나간답시고 어제 쉬어서 그런가, 몸이 찌뿌둥 하다.”
 
  “맞다. 그 운동 말인데, 사람들 없을 때 좀 하면 안돼? 뭐 자고 있을 때라던가.”
 
  “왜?”
 
  “다들 남자들이잖아. 보기 민망하더라.”
 
  그 말을 듣고 나니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숏 팬츠에 ‘육군’이라고 써진 보급 티셔츠 하나 걸치고 이런 저런 근력 운동 하는 모습을 보는 남자들 기분이 어땠을까. 남자들이 자기들 끼리 여자 관계 이야기 하는 걸 무심하게 흘려 넘긴다던가, 집구석 곳곳에 흘러다니는 플레이보이 같은걸 무시하거나 그런걸로 같이 농담하는 정도라면 남자들에 대한 배려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뭐야, 다들 신경 쓰였어? 진작에 말 좀 하지 그랬어.”
 
  조금 민망해진 내가 아무렇잖은 척 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앨런은 주택가 골목에서 한번 커브를 돌면서 말했다.
 
  “말 잘못했다가 이상한 오해나 듣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얘기 해도 될 만큼 친해 질 때까지 기다렸지. 조셉은 나만 믿고 있었고, 예전부터 알던 에드나 매튜가 뭐라고 해 줘야 하는데 매튜는 나쁘진 않지 않냐는 눈치였고, 에드 녀석은 뭐 그런데 신경쓰냐고 그러고. 나야 뭐 딴 애들이랑 곧 본토로 돌아갈 입장이지만, R팀 애들 생각나서 그래.”
 
  본토라. 나는 지금 일에 전혀 불만은 없고 오히려 재밌다는 생각을 해 왔다. 베를린의 경우는 근무 조건도 굉장히 좋은 편이라 오히려 운이 좋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미국에 가 본지 너무 오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몇 년 간 미국에 들렀던 것은 레바논에서 독일로 근무지를 옮기기 위한 서류 작업 때문에 한 일주일 포트 브랙에 들렀던 게 전부였다. 집에는 전화로 자주 연락 하니까 별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가족들 얼굴 본 지도 오래 됐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게 언제였는지는 이젠 기억도 안 난다. 
 
  “아, 엄마 보고 싶다.”
 
  “왠 일이냐? 집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살던 녀석이.”
 
  “니가 생각나게 만들었잖아. 오늘 따라 싱숭생숭 하네.”
 
  영화 생각났다. 졸지 않고 끝까지 보는데 끝끝내 실패한 그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거기 보면 막 얼굴 보면서 전화 통화 하던데. 올해가 89년이니까 12년 남았다. 
 
  갑자기 12년 전의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빠처럼 군대 가겠다고 집 나왔을 때인데, 그 무렵의 내가 생각하던 군 생활은 지금의 내가 하는 군생활이랑 많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타포스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니까.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아무튼, 그럼 운동은 열두시 넘어서나 해야겠네.”
 
  “그래. 이제부터라도 좀.”
 
  “근데, 넌 에드랑 뭔 일 없었냐?”
 
  궁금했다. 다소 싱거운 이야기였지만, 궁금해 하는 거 말 해 줬는데 못 물어볼 거 있나. 심심한 차에 잘 됐다. 재밌는 얘기면 앞으로 귀국할 때 까지 두고두고 놀려먹으면 되고.
 
  “뭔 소리야?”
 
  “니들 동기였잖아. 같이 SFG 들어갔고, 델타 들어간 건 니가 더 빠르고. 니들은 뭐 재밌는 거 없어?”
 
  그 이야기에 앨런은 차 속도를 늦추고는, 집 안에서 문을 열어준 차고 안으로 후진을 하면서 과거를 되짚어나갔는데, 별 이야깃감은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글쎄… 일단 동기긴 한데, SFG땐 거의 떨어져서 지냈거든. 난 10특전단이고, 걘 1특전단에 1년은 한국에 파견 갔었으니까. 델타 온 뒤로는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굵직한 작전 때 몇 번 빼고는 별로. 그레나다 때는 내가 병원 실려가서 별 얘기할게 없고, 이란에서 얘기는 내가 말 했나?”
 
  “구출작전 하러 가서 제일 먼저 한 게 민간인 억류였다는거? 솔직히 재미 없었어.”
 
  “그랬냐. 그럼 할 얘기 없다.”
 
  그냥 운동이나 할래. 싶었지만, 아까 앨런이 해 준 말이 생각나서 오늘 운동은 눈치 봐서 모두 자면 그 때 하기로 하고, 이번 인수인계 기간 동안 새로 1년을 함께할 팀원들과 운동 할 시간까지 조율을 해 둬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새로 온 팀의 팀장과 운동시간 이야기를 해서 스케줄 조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근력 운동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몸이 찌뿌둥하진 않았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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