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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1 : 서베를린은 언제나 맑음 - 003

22nd 22nd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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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떠 진 것은 대략 09시 반쯤. 전날 작전을 하고 오긴 했지만 야전에 나가면 몇 일씩 돌아가면서 쪽잠 자는 걸로 때우는 건 하루이틀도 아니라 짧은 시간에 깊게 자는 건 익숙해져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방을 같이 쓰는 매튜 녀석이 안 보이는 것을 보아 이 녀석은 먼저 일어난 것 같았다.

 

 문을 나서서 바로 마주친 매튜에게 아침 인사를 한번 해 주고, 눈을 비비적거리며 1층으로 내려온 나는 콘푸로스트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먹고 있는 에드 상사를 지냐쳐 식탁에 놓인 우유병을 집어 들고는 머그잔에 졸졸졸 따랐다. 우유를 너무 급하게 먹었는지 머리가 좀 띵 한 가운데, 스스로의 조급함을 조금 책망하면서 샤워실로 몸을 옮기려고 보니,

 

 “어라?”

 

 샤워실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에드 상사가 숟가락을 샤워실 문으로 향하면서 말한다.

 

 “앨런이야. 5분만 일찍 오지 그랬어.”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라고 말하며, 난 냉장고를 열어 어제 맥주 안주로 먹다 일부러 남겨놓은 피자 조각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옮겨 담았다. 어제 R팀 녀석들이 준비한 훌륭한 맥주 안주였다.

 

  다른 사람들이 현재에 충실할 때, 나만 내일을 바라보고 남겨 놓은 피자였으나 혹시나 싶어 조마조마 했는데, 아직 남아있다는 점에 아직 정의는 살아 있음을 실감하며 데우기 버튼을 눌렀다. 신문이라도 볼까 싶었는데 방금 전에는 주인이 없던 신문은 내가 한 발 늦었는지 어느 새 식사를 끝낸 에드 상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혼자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고 신문을 뒤적이는 아저씨같은 모습에 그를 과소평가 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제도, 그리고 그 훨씬 이전부터 모두에게 증명해 왔 듯이, 훌륭한 요원이었다. 그가 델타에 오기 전에도 그랬다. 최소한 델타에 발을 들여놓기 전 약력으로만 비교했을 때, 나를 능가하는 것은 확실하다.

 

 남들은 다들 특전단이나 레인저에서 수소문해서 찾아온 데 비해, 82공수 출신이었던 나는 군 생활을 평범한 녀석들보단 훨씬 빡세게 했다고 자부 할 수는 있을지언정 실전 경험은 전혀 없었고, 그저 베트남 참전 경험자들의 무용담만 지겹게 들어 왔을 뿐 이었다.

 

 모든 경험 없는 잘 훈련된 애송이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실전을 무척이나 염원했었다. 처음 군문에 발을 딛던 순간의 신병교육대에서부터 살인 기술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교육 받아온 우리 같은 녀석들은, 전쟁터에 나가면 남들은 다 죽어도 그것이 우리 이야기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어디서 무슨 난리통이 벌어지던 간에, 자신의 손에 익숙해진 자신의 개인화기와 충분한 탄약만이 있다면, 승리와 생존은 당연히 보장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수 많은 실전의 기회가 있었다. 82공수 시절부터 별러온 실전의 기회는 델타에 들어오면서 훨씬 가까이에 다가왔지만 그것은 손에 잡힐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울 뿐이었다. 델타 전체를 동원함은 물론 여러 부대들을 새로 창설 하면서까지 대대적으로 준비하던 이란에서의 두 번째 구출 작전이 내게 찾아온 첫 기회였지만, 안타깝게도 뭘 해 보기도 전에 인질들이 석방되면서 저 너머로 사라졌다.

 

 라오스 어딘가에 아직 억류되어 있다는 베트남 시절의 일부 아군 포로들에 대한 구출작전 계획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뒤에서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것이 틀림없는 꼭두각시들 몇 놈이 결정적 타이밍마다 언론에다 작전 계획을 누설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대신 척 노리스나 실버스타 스탤론의 영화 소재로 쓰였을 뿐이었다.

 

 경험 많은 영감들은 해외에 군사 고문으로 파견 나가서 꼽사리 총질을 해 본 적이 좀 많은 모양이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던 나의 첫 실전 경험은 아까도 말했던 바로 그곳, 그레나다였다.  에드 상사와 나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곳 말이다.

 

 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나 델타의 선발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좀 해괴한 면접을 치르게 된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면접관들은 교육생이 말하는 답이 정답인지 오답인지의 여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교육생이 무언가 대답을 꺼내면, 말꼬리를 잡고, 사사건건 토를 달아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 뒤, 즉각적인 교육생의 반응을 살피는 고도의 심리 테스트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별별 질문이 다 나온다. ‘니네 기수에서 니가 동기들 사이에서 제일 밥맛 없는 놈이라고 하던데 니 생각에 그 이유는 무엇이냐?’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질문들부터 시작해서, 정계의 최신 스캔들이나 과거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고찰 등등 그들이 던지는 질문의 스펙트럼은 너무나도 넓다.

 

 음, 나의 경우에는 “네 녀석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금일의 날짜는 1944년 6월 6일이고 너는 오마하 비치로 향하는 상륙정의 맨 앞줄이다.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얘기해봐라.”뭐 이런 질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 질문이 83년의 내가 그레나다에서 뭔 일을 겪을지에 대한 예고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푼 가슴을 안고 실전의 공기를 음미하는 것도 잠시, 사악한 공산주의 악당들이 정치범들을 잔뜩 가둬 놨다는 리치몬드 힐 교도소로 강습하기 위해 최신형 블랙호크 헬리콥터에 몸을 싣고 날아가던 우리를 향해 예고도 없이 소련제 대공포들이 불을 뿜었고, 강습작전은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고의 총잡이들이 임무를 포기 할 정도로 많은 기체들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으며, 땅에 발도 못 딛고 부상을 입어 바다의 해군 함정으로 후송된 요원들이 부지기수였다. 내가 그랬냐고? 난 더 심했다. 내가 타고 있던 헬기가 추락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델타 밥을 헛으로 먹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 일 것이다. 아직도 헬기 잔해에 깔린 아군들을 어떻게 거기서 꺼내다가 방어 지점으로 옮겨 놨는지 아직도 내 자신이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 직무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다만 좀 많이 바빠서 성취감을 느낄 틈도 없었다. 상쾌함과는 거리가 먼 끈적하고 피비린내에 타는 냄새, 화약 냄새까지 섞인 후덥지근한 열대의 새벽 공기가 내가 진정으로 처음 마시게 된 실전의 공기였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그것을 음미할 틈 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 헬기에 몸을 싣고 있던 인원이 승무원 빼고도 우리 델타 여덟 명에 브랜드 X의 공군 공정통제사가 두명. 이 중에서 살아남은 건 나까지 합쳐서 다섯에 불과했다. 헬기 승무원은? 도어거너 하나 빼고 다 죽었다. 베트남서 살아온 영감님 하나가 죽은 건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다. 내가 대신 죽었어야 하는데 - 그런 얼빠진 소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대개 이런 경우 사람이 많이 죽으면 예비 탄약이라도 좀 넉넉해지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렇지도 않았다. 전사자 유해를 수습 한다거나 쓸만한 장비를 찾아 볼 겨를도 없이, 생존자들 빼오기도 바쁜 판이라 예비 탄약을 챙기는 것 같은 딴 짓을 할 시간이 없던 것이다.

 

 방아쇠 당길 힘도 없는 환자들의 탄약을 뺏어 쓰며 버티는것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최후가 다가오나 싶었을 때 그가 나타났다. 에드 상사 말이다. 가지고 있던 마지막 크레모아까지 날려버리고(사실 임무가 임무인지라 크레모아를 별로 안 챙겨오긴 했었다.) 이제 이쪽으로 다가오는 적들의 얼굴까지 보이는 판이었는데, 소총을 재장전할 틈이 없어서 1911을 뽑고 더블 탭으로 한 놈을 거꾸러 트린 뒤 다음 표적을 찾아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에드와 그의 작전팀이 나타난 것이다.

 

 한 숨 돌린 뒤, 애드가 데려온 공정통제사가 화력 지원을 유도했는데, 공군이 가지고 있던 지도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도가 안 맞아서 약간 고생하긴 했지만 여차저차 건쉽의 화력을 동원해서 적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같은 스쿼드런의 선후배 사이에 지나지 않았던 에드와 내가 제대로 호흡을 맞춰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목숨을 빛 진 것도 있고 해서 이것을 갚아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는 않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아무튼, 취사병이 따로 없는 안가 생활이라 밥도 우리가 해 먹어야 했다. 다행히 오늘의 나에겐  피자가 있다. 꺼내고 보니 한번 식었던 피자도 피자는 피자라고, 냄새가 제법 훈훈하다. 무언가가 휙 날아오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그것을 낚아채고 보니, 캔 콜라였다. 펩시는 아니고, 코카이다.

 

 “그냥 먹으면 맛이 살겠어?”

 

 “고마워요, 에드.”

 

 기습적으로 날아온 캔 콜라를 제법 익숙하게 척 받아든 나는 가볍게 캔 뚜껑을 땄고,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탄산 거품이 주루룩 흘러나왔다. 앨런을 쳐다보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독일어 신문을 휙휙 넘겨보고 있었다.

 

 목숨을 빚 졌으니, 이런 건 그냥 넘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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