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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2 :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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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나의 영웅, 영광의 그린베레의 여명기를 함께 했던 남자, M2카빈을 들고 정글에 들어가서 CAR15을 들고 정글에서 나온 늙은 노병. 나의 롤모델이었던 아버지, 제이슨 하코트 원사(SGM)님은 이젠 일선에서 물러나 포트 브랙의 어느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친해지려고 노력하시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빨갱이 잡는게 컴퓨터보다 쉽다면서 툴툴대셨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아버지께서 더이상 일선에 계시지 않는다는게 참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께선 그동안 충분히 싸우신 분이니까.
 
  “역시 거기도 벌써 난리 났군요.”
 
  [ - 일반 땅개들은 그냥 저냥 지내는 모양인데, SOCOM 예하 부대들은 모두 비상대기 들어갔다는구나. 영외 거주자들과 출타자들은 전부 원대복귀. 덕분에 이 아버지도 집에 너희 어머니 혼자만 남겨두고 이렇게 와버렸지. 독일도 지금 모두들 바쁘지?]
 
  “솔직히 실감은 안가요. 저희는 항상 실전이고, 일반 부대 사정은 잘 몰라서… 일반 부대들도 독일 주둔부대는 전부 비상대기 체제에 들어갔다고는 하더라고요.” 
 
  평범한 부녀의 대화라고는 할 수 없을 이야기들일 것이다. 아버지는 보나마나 회사에 끌려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일반 국제전화 대신 군전화를 잡고서 교환을 몇 번씩 거쳐가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 - 퇴근하고 씻고 저녁 좀 먹으려는데 갑자기 호출이 와서 당황스럽긴 하더구나. 이런 전화로 뭐 알고 있는 거 있냐고 물어보기도 마땅찮고…….]  
 
  방 문을 닫고 문 뒤에 기대서, 서랍 위에 올려놓은 전화의 수화기를 붇잡고 있던 나는 손가락에 전화선 코드를 감고 배배 꼬면서 돌리다가 풀면서, 잠깐 생각을 하고, 적당히 필터링 해서 말을 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뭔가 터졌다는거야 군 전화로는 말 해도 상관 없겠죠. 그 이상은 저희도 몰라요. 뭐 별 일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거기서 설령 쿠데타가 났어도 설마 오늘내일 갑자기 쳐내려 오겠어요? 전쟁 준비가 그렇게 쉬운것도 아니고.”
 
  [ - 거기도 우리가 아는 거 이상으로 뭘 알고 있진 않은 모양이구나. 아무튼, 몸 건강하고 정신 바짝 차리렴. 회의시간이 곧이라 아빠는 슬슬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도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전화를 끊고, 옆의 무선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삑삑 눌러서 이번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와의 삼십여분간의 수다를 떨다가 마무리를 지을 때 쯔음, 방탄복에 체스트릭을 걸친 상태 그대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워있던 내가 고개를 잠시 돌리자, 시야에 사진이 한 장 들어왔다.
 
  한 장의 독사진. 옷이며 얼굴이며 흙먼지에 살짝 더러워졌지만 표정은 싱글싱글 웃고 있는 금발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상의는 아빠가 베트남에서 선물로 사온 호랑이무늬 상의 맞춤옷, 하의는 청바지. 아홉 살 때 마텔에서 만든 M16 장난감 총을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얼핏 독사진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독사진이 아니다. 통화를 마무리 짓고도 사진이 계속 눈에 들어와 신경쓰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전화를 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접혀서 액자 바깥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진 속의 그 남자에게. 잠깐 고민하다가 숨을 고르고, 다이얼을 삑삑 눌렀다.
 
  신호가 간다. 신호음이 귓속을 거쳐 수백배는 증폭되어 가슴을 쿵쾅쿵쾅 때리는 것만 같다. 살짝 괜히 전화했나 후회되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끊을까?
 
  [ - 너 대체 왜 그러는거야? ]
 
  “뭐 때문에 화 난건데. 좀 차분히…….”
 
  [ - 차분히는 무슨 차분히! 내가 지금 어디인줄 알아?! ]
 
  “지금 어딨는데……?”
 
  [ - 텔아비브야, 텔아비브! 버스타고 오는 길에도 옆골목에서 PLO인지 뭔지 하는 애들이 폭탄테러를 벌여서 뒤질 뻔 했다고! 내가 왜 왔는줄 알아? 너 보러 갔는데! 넌 대체 어디 있는거야! ]
 
  “뭐? 맙소사, 정말 안 다친거야? 지금 어디…….”
 
  [ - 아, 시발, 몰라. 중요한건 그게 아냐. 내가 뒤질 뻔 한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 점에선 나 화 안났어. 진짜 중요한건, 왜 나한테 자꾸 거짓말만 하는건데? ]  
 
  “…….”
 
  [ -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할거 아냐! 뭐? 미 대사관? 미 대사관 직원중에 ‘제인 하코트’라는 여군 준위님은 없다는데? 뭐라고 설명할건데? 너 내가 꼴도 보기 싫은 거냐? 내가 어딨는지 알면 만나러 올 수라도 있어? ]
 
  “…….”
 
  그냥 전화 끊을까. 괜히 주책 부리는건가. 술도 안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받으면 뭐라고 말 할건데. 액자 속 접힌 사진의 빨간 머리 소년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땐 그냥 재밌었는데. 전화도 안 받는거 같아 그냥 전화를 끄려고 했다. 바로 그 때, ‘여보세요.’
 
  숨이 멎는 것 같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답답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 - 여보세요? ]
 
  “어… 저기… 잘 지냈어?”
 
  [ -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니? ]
 
  “아, 응… 뭐 그럭저럭. 직장동료들도 호흡이 맞고, 동네 인심도 좋고…….”
 
  [ - 그렇구나… 다행이네. 아픈데는 없지?]
 
  “그럼! 감기 한번 걸린 적 없지. 아… 음… 맞아, 아저씨랑 아주머니는 잘 계셔? 못 뵌지 너무 오래 된 거 같다.”
 
  [ - 그러게. 너 못 본지 한 십년은 돼 가는구나.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일하니? ]
 
  “아니야. 그러니까… 독일. 그래. 독일이지.”
 
  [ - 그래… 독일이구나. 뭐 ,그렇겠지. 근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
 
  내가 뭐 땜에 전화해서 이렇게 말이나 더듬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5년 전 어느날 녀석과의 전화 통화 때 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기분이다. 내가 뭐 땜에 전화해서 이러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응, 그냥 뭐… 오랜만에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어서. 요즘 뭐 만나는 사람 있어?”
 
  [ - …응. 좋은 여자야. ]
 
  “음… 그래… 다행이다. 다음에 미국 가면 한번 보고싶네.” 
 
  결국 의미있는 대화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쥐어짜듯 이야기하는 내내, 왠지 낮설게 느껴졌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진 속의 그 시절이 왠지 그리웠다.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 뭐 그런건 아니었다. 
 
  그냥… 그때처럼 서로 편하게 이야기 할 수만 있다면. 그냥 둘이 던져놓기만 해도 열두시간은 얘기만 하다 지나갈 수 있던 그때가 그리웠다. 평생의 죽마고우 하나를 영원히 날려버린건 두고두고 아쉽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담없이 한도 끝도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조잘거리고 싶어서. 그런데 그러기엔 너무 늦은 모양이다. 세월의 공백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너무 커서 이야기가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후회됐다. 어쩌면 공백은 그때부터 였을지도 모르겠다.
 
  [ - 너 대체 왜 그러는거야? ]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게 아니라고 말 했잖아.”
 
  [ -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몇 달 동안 갑자기 연락도 없더니, 뭐라고? 이스라엘? ]
 
  정말 화난 목소리였지만, 진심으로 걱정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사실 나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말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나, 내 꿈을 못 이뤘을지도 몰라. 자랑하고 싶었다. 칭찬 받고 싶었다. 
 
  여군은 절대 특수부대가 될 수 없다는 말. 실망해서 의무 복무 기한이나 채우고 떠나려던 무기력한 시절. 어느새 부터인가 슬슬 일에 재미도 붙이고, 나름 경력도 쌓아가면서 자부심도 생겼지만, 업무상 가끔 볼 일이 생기는 사단 LRSU 녀석들을 볼 때 마다 들었던 왠지 모를 부러움과 열등감. 그렇게 꿈을 죽이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던 나를 다시 꿈 많던 십대로 돌려놨던 그들. 
 
  교관들은 나를 찍어 놓은 것 처럼 유독 나를 못살게 괴롭혔다. 울고 싶을 때도 많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로빈 무어의 그린베레를 읽으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던 중학교때가 생각났다. 어른이 되면 그린베레를 머리에 쓰고야 말겠다고 학교 끝나고 돌아와서 몇 시간씩 근력 운동과 달리기를 반복하던 고등학교때도 생각났다. 하지만,
 
  제일 많이 생각난 건 아홉살 때, 아버지가 선물해주신 장난감 총과 군복을 입고, 그 아이한테 검은 옷을 입히고서 전쟁 놀이를 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자기가 왜 나쁜 놈을 해야하냐고 툴툴대면서도 즐겁게 전쟁 놀이를 함께 해 주었던 착한 아이, 중학교 때 우린 첫 키스를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입대하기 전날 밤 나는 소년을 남자로 만들어 주었고 그는 소녀를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 가장 힘이 되어줬던 그이. 만약 내가 ‘델타포스’의 일원이 됐다고 말해준다며, 촌스러운 빨간 머리의 그 아이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다시 바라보더니, 꼭 안아주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고 자기 일처럼 좋아해줬겠지. 하지만 말 할 수 없었다. 이것은 국가 기밀이었다. 그 때부터, 공백은 이미 시작 되었으리라.
 
  나는 결국 5분을 못 채우고 전화를 꺼야만 했다. 그 녀석이 먼저 수화기를 내렸다. 통화가 끊긴 후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나는 천장을 올려다 봤다. 입대 전날 밤 침대에서 올려다 봤던 천장이 생각났다. 다른 천장이었다. 낯선 느낌이었다. 터프하고 화끈하고 쿨한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낯선 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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