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 Sunny day : West Berlin
Chapter 001 : 서베를린은 언제나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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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3 
 
1989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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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나 마나 철야다. 오늘도 철야가 분명했다. 한 달만 있으면 본국으로 떠날 그의 직속상관은 매주 월요일, 일과가 시작되는 주에는 철야를 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었다. 음지를 지향하는 업종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양지에 걸쳐있는 그들의 직업 특성상 주 5일 근무가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정도는 보장되는 처지였으나, 대신 그들의 업무는 워낙 막중하다보니 쉬는 날을 다 챙겨먹다보면 그 다음에는 초과근무를 해야 업무량을 소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징기스칸의 제목 모를 노래가 경쾌하게 쿵짝쿵짝 거리는 라디오를 끄고, 사무실 구석으로 다가갔다. 찬장에서 머그 잔 한 잔을 꺼내고, 바로 옆의 소형 냉장고에서 비품으로 구비되어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한 봉투 꺼냈다. 
 
  야근을 위해 제조하는 특별 레시피의 정체는 사실 너무나 간단했다. 커피를 엄청 많이 들이부어서, 카페인량을 극대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단, 사람의 혀가 견딜 수 있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야 한다. 
 
  나는 커피 숟가락을 남들이 보기엔 무신경하게 푹푹, 그러나 나름대로는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머그잔에 싸구려 커피가루를 투척했다. 그리고 나서야 미리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살짝 후회했다.
 
  “공부 잘해야 엄마처럼 남들 심부름 안하고 남들 심부름 시키면서 살 수 있단다.”
 
  어렸을 때 부터 지겹게 들어오던 말이었다. 다행히 나는 머리는 좋은 축에 속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홀로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께서도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탓에 그럭저럭 괜찮은 학벌을 거쳐 이런 직장에서도 꽤 아는 것이 많은 인재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모양이었다.
 
   나보다 일도 못하고 외국어 실력도 그보다 확실히 떨어지는 동기들은 본국의 사무실에서 여비서들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면서 일을 하는데, 난 부모님 말씀대로 남들을 부려 먹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그 결과로 내가 직접 커피를 타고 있었다. 가끔은 직장 상사 몫도 타 줘야 했다. 퍽 안타까운 일이었다.
 
  본국의 소식이 알고 싶어서 TV를 틀었다. 그는 본국인들이 모르는 소식조차 외국에서 자주 귀동냥하는 직종에 속해 있었지만, 그런 정보와 이런 정보는 다르다. 군바리 냄새 풀풀 나는 군 방송은 제끼고, CNN을 틀었다. 모레 있을 소련의 전승 기념일 기념 퍼레이드를 취재하기 위한 취재진들이 잠깐 모스크바를 연결해서 자유와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붉은 광장의 모습을 잠깐 보여주고 있었다. 
 
  고국 소식보다 러시아 소식을 더 자주 접하는 직업인지라 솔직히 조금 질렸다. 이틀 뒤면 더 질릴거다. 열병식에 신 무기가 하나라도, 아니, 기존 전차에 달린 기관총 하나만 못 보던 걸로 바뀌어도 내가 할 일은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커피 포트의 물은 점점 끓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그에 반비례 하여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슬슬 물이 다 끓을 것 같다는 생각에 벽 한쪽의 시계를 봤다. 독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9시 41분.  아니나다를까, 한 삼 사초쯤 있다가 ‘탁'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일본제 커피 포트의 손잡이를 잡고서, 주둥이를 커피 잔에 가져다 댄다. 문득, 동네 약국에서 지어주던 감기 가루약이 세상에서 가장 쓴 음식인 줄 알았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다. 달콤한 시럽으로 쓴 맛을 중화했었는데, 이젠 아스피린 한 알이면 끝이다.
 
  “짜, 짜잔자짠, 짜잔 - 짜,  짜잔 - 짜, 짜, 짜잔자짠, 짜잔 - 짜,  짜잔 - 짜…….”
 
   요한 스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 왈츠를 흥얼거리면서 손목을 적당히 기울이자, 포트 주둥이를 타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가 쪼르르르 중력의 힘을 통해 흘러나와 커피잔에 떨어져 쓰디쓴 분말을 검고 쓰디쓴 엑체로 변환시켰다. 갈색 분말은 어느새 마치 그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OST로 사용된 어느 SF영화에서 나오는 검은 장막의 별들의 바다와도 같은 새카만 색상의 소우주로 변모하고 있었다.
 
   제법 경쾌한 기분으로 커피스푼을 찬장에서 찾아 잔에 넣고 대충대충 슥삭슥삭 섞은 뒤, 냉장고에서 싸구려 보드카 병을 하나 찾아서, 찬장에서 글래스를 찾아 가볍게 한잔 따라 커피 안에 투척했다. 러시아인들을 잘 이해하려면 그들의 술문화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억지스런 핑계에 의거해 보스가 냉장고에 쟁여놓은 술이었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약간 직장상사의 흉을 보던 바로 그 찰나,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이 사무실 문을 노크도 안하고 이렇게 열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한가한가봐?”
 
  “퇴근 시간에 목메는 헛된 희망을 버리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Boss.”
 
  사무실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문가에 서서 그의 속을 약간 긁는 질문을 내던졌지만, 별다른 악의가 있는 질문은 아니라 적당히 받아쳤다. 그냥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이 직업을 가지고서 남들 쉬는 날에 쉬면서 퇴근 시간을 지킬 수는 없거든.”
 
  아, 어머니. 역시 다른 직장 알아 볼 걸 그랬어요.
 
  “항상 드시던 걸로 드십니까?”
 
  라고 물으면서, 찬장의 다른 빈 머그잔을 들어 보였다. 어머니께서 자주 해오던 것 같은 직장생활의 일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스께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는, 
 
  “새로운 실습이야. 곧 재밌는 곳으로 갈 거니까, 나갈 준비 하고 있어. 난 잠깐 화장실좀 들렀다 올께.”
 
  “예, 보스.”
 
  덜컥, 하고 다시 문이 닫혔다. 나는 머그잔을 잠시 내려다 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하다 못해 펄펄 끓는 데다 도수가 45도는 되는 독주까지 살짝 섞인 특제 야근용 포션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사이에 다 벌컥벌컥 했다간 실습실이 아니라 응급실에 실려갈 것 같았다. 
 
  “에휴.”
 
  냉장고 상단의 냉동실 문을 열었다. 이런 날일수록 얼음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하단의 냉장실을 개봉하고, 그 안에 야근 포션을 넣었다.
 
   블랙커피는 따뜻하게 못 먹을 바에야 아주 차갑게, 라는 내 평소 지론에 따른 행동이었다. 기왕 만든거, 언젠가 는 마실 일이 있겠지. 이런 극약은 다른 사람이 탐 낼 리도 없으니 남이 가로챌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애초에 두 사람밖에 안 쓰는 사무실이지만.
 
  내 책상에 다가가 한구석에 팽개쳐뒀던 넥타이를 꺼내 거울 앞에 서서 고쳐맸다. 장시간의 업무를 위해 뒷주머니에서 빼 두었던 지갑을 책상서랍에서 꺼내 오른쪽 뒷주머니에 쑤셔 박으려다, 문득 캔 커피라도 자판기에서 뽑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안을 열어본 나는 소액권 지폐나 동전이 없는 것을 확인하니 아까부터 조금씩 빠지던 기운이 또다시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듯 했다. 네 시간 전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 심심해서 콜라를 뽑아 먹은 게 이렇게 악재로 다가오다니.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언제 커피 타 주는 여 비서가 붙을까. 이젠 어머니처럼 살기 싫었다.
 
  형광등 스위치를 내리고, 문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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