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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2 :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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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 단지에 자리 잡은 안가는 굳게 셔터를 내렸지만, 바깥의 새 주인을 기다리는 적당히 지저분하고 우중충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안쪽은 형광등 불빛 아래 먼지 하나 없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다.

 

  서 베를린에 발을 들이밀은지 반나절도 안 된 페트렌카 중위와 그녀의 팀장인 대위, 그리고 슈타지의 길잡이와 그들에게 일감을 맞긴 KGB 특작의 고문이 안가로 들어왔다. 

 

  TV를 건성으로 보면서 소파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무장공비’들의 귓가에 무전기가 삐빅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안가의 ‘위병소’인 중고 미니의 근무자에게서 온 무전이었다. “아까 나갔던 네 명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의 볼륨을 낮추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괜찮겠어요?” 고참 상사의 질문에 대위는 차분한 어조로, 약간의 수정 사항이 생겼노라고 대답했다.

 

  “이를테면 어떤 부분을?”

 

  “상사 동무의 도움이 필요해졌지. 이리 와 봐.” 상사가 몸을 일으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위를 따라나선 십여명의 발걸음이 얼마 안 돼 멈췄다. 그들 앞에는 지저분하게 매직으로 필기된 작전 지역의 대축적지도가 걸려 있었다.

 

  “팀의 기동 수단으로 컨보이 앞뒤를 틀어 막기로 한 것은 모두들 기억 하고 있지?”

 

  “예. 대위 동지.”

 

  “상사 동무의 저격조가 힘을 써 줘야겠어.”

 

  대위는 지도 위에 놓인 여러 ‘장기말’중 하나를 건드렸다. 대부분 이미 정위치에 놓인 장기말이라 많이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전방 무장차량을 바리케이드 만으로 제지한다는건 좀 역시 좀 힘들겠어. 차량이 제 타이밍에 정확한 자리에 주차해 있어야 하는데, 타이밍 잡기가 애매하단말야.”

 

  “저희가 발을 묶는 겁니까?”

 

  “타이어에 펑크를 내던, 운전병을 저격하건, 한 자리에서 몇 초만 멈춰있게 하면 충분해.”

 

  “철저한 계획과 연습이 작전 성공의 기본요소이지만,” 대위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그런 걸 부담없이 준비하기엔 이미 세상이 너무 위험해졌어. 사진이랑 비디오로 만족해 주게.”

 

  “어쩔수 없죠, 동지. 그러니까. 여기서 저격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목표가 잘 보이는 자리긴 하네요. 이반. 같이 좀 보자구.”

 

    상사의 저격조가 변경된 작전계획에 따른 세부사항을 점검하는 동안, 부팀장인 상위가 대위에게 말을 걸었다.

 

  “팀장 동지. 그 외에 다른 변경점은 없습니까?”

 

  “나머지는 그대로 간다. 지금 세운 공격 계획 대로면 미제 놈들의 헬리콥터가 문제이긴 한데, 여기 KGB 동무의 말로는 헬기는 떠 보지도 못하고 주저 앉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

 

  “역시… 72시간 안에 두 대는 힘들답니까?”

 

  “그것도 계획 대로일세. 안타깝지만 한 대라도 확보 한 것을 위안 삼자구.”

 

  “뭐, 어쩔 수 없죠. 세상 만사 우리 생각대로 풀릴 거였다면 우리가 베를린에서 이 지랄 할 일도 없었겠죠.”

 

  “전쟁도 없었겠지.”

 

  팀장과 부팀장, 상사와 한 명의 KGB 파견 인원등 이 자리의 모두는 이미 전쟁을 기정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수령한 명령은 다름 아닌, < 작전 계획 V >의 실행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792특수목적중대에서 파견 나온 해당 팀을 비롯해, 서독 전역에서 이미 침투해 있거나 곧 침투할 특전팀들은 해당 명령에 의거해, 특별한 스케줄 변경이 없는 한 20시까지는 모든 작전을 수행할 준비를 마치고 있어야 했다.

 

  “뭐 새로울 것 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람 처음 죽여 보는 것도 아니고. 별 일 없을 겁니다.”

 

  “저, 상위 동지. 저랑 미하일은 아프간 가 본 적 없습니다.”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의무 주특기와 자동화기 사수의 목소리였다. 

 

  “데뷔전이 화끈하구만. 이 짓거리 하면서 언젠가는 겪을 일이야. 아프간보단 여기가 나은 거 같은데. 너무 긴장 하지 말라구.” 대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톤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 해 줬다. 쓰잘 데 없이 분위기를 잡아 줘 봤자 오히려 임무 수행에 지장만 된다. 지휘관의 언행이란 이런 점에서 참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말이지, 자네 둘, 전투를 앞두고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게 무엇인 줄 아나?”

 

  “뭘 준비해야 합니까, 중위 동지?” KGB에서 작전 수행을 도우러 파견 나온 중위 녀석이 한 손에는 빨간 알약을, 다른 한 손에는 파란 알약을 들이밀었다.

 

  “지사제와 하제야. 이따가 바지에 똥 지리기 싫으면 둘 중에 하나 지금 먹어라.”

 

  경험자의 진심 어린 충고를 들으며 그 둘은 새삼 자신들이 얼마나 햇병아리인지를 상기할 수 있었다. 선임자들로부터 아프간 경험담을 그렇게 들었으면서도 이런 쪽의 대책을 세울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니. 역시 짬밥은 똥구멍으로 먹어도 무언가 쌓이는 게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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