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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시내에 주재하고 있다가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과 더불어 쫒겨났던 미국 대사관 다시 독일땅에 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 이후였다. 
 
  그러나 이전의 집터에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새로이 시작된 동서냉전의 구도 와중에서 반으로 갈라진 독일의 서쪽땅에 자리잡은 새로운 나라,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는 서쪽 절반중에서도 상당히 서쪽에 달라붙은 본(Bonn)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덩달아 주독 미국대사관 역시 본에 새로이 터를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무부가 베를린을 완전히 떠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현재 서베를린에 소재하고 있는 국무부의 “베를린 오피스”는 본래의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 터가 어른의 사정으로 영 사용하기 곤란하게 되어서 과거 나치 독일의 루프트바페가 사용하던 건물을 재활용해 자리잡았는데, 원래 미 대사관은 어떻게 됐더라. 소련놈들 점령지역 안에 들어갔던가, 아니면 전쟁통에 박살났던가? 둘 다였었나?
 
   잘 기억나지 않으니 이 부분은 대충 넘어가도록 하고, 아무튼 이곳에서 하는 일은 영사 없는 영사관 비슷하다고 들었다. 독일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을 보면 사실상 준 대사관 취급같기도 하고. 자세한 외교 업무는 잘 모르니 다른 국무부 사람들에게 맞겨두기로 하자.
 
  아무튼, 베를린 오피스의 위치는 우리 안가와 굉장히 가깝다.우리에게 이것은 퍽 괜찮은 지리적 조건이었다. 외교행낭을 통해 날아오는 공작금이나, 각종 장비들을 받아오는 간단한 택배 수령부터 시작해서, 오늘같이 베를린 오피스 안에 또다른 출장 사무소를 차리고 사는 몇몇 먹물들과의 회의가 잡혀도, 이런저런 준비 할 것 없이 설렁설렁 찾아가도 회의에 늦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서류에는 1983년부터 팀의 발이 되어주었다고 적혀 있는 방탄 벤츠를 주차장의 정지선에 딱 맞춰서 세우고, 차 문 밖으로 나선 우리는, 시간 여유를 충분히 가지고 도착한 탓에 수목이 우거진 한적한 교외의 고급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베를린 오피스의 영내에서, 따스한 봄의 햇살을 즐기며 본청 안으로 여유있게 발걸음을 옮겼다. 
 
  경비를 담당하는 해병들의 간단한 신분 확인을 마치고 건물 안에 들어선 우리는 당직 근무자가 4교대로 돌아가면서 24시간 내내 지키고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여, 옷 멋있는데.”
 
  “잊을 만 하면 찾아 오십니다?”
 
  “그만큼 일이 많으니까 말이지. 귀관이 우리 얼굴을 모르는 쪽이 개인을 위해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나 좋을 텐데 말이야.”
 
 
  “그거, 듣기에 따라 엄청 무섭게 들리는 말인 거 아세요?”
 
  새파랗게 젊은 나이를 이제 갓 지난듯 한, 병사용 C종 정복 차림에 산탄총을 휴대한 꽤나 낯이 익은 해병 상병의 인사 아닌 인사에 내가 신분증을 보여주며 대답하자, 그는 살짝 웃으면서 내게 그렇게 대꾸했다. 
 
  계급차이와 직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럭저럭 이야기를 주고 받을 정도로 이미 서로가 서로의 안면을 잘 익혀둔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정은 규정인지라 일련의 신원조회 과정을 생략하는 일은 없었다. 불만은 없었다. 이래야 맞는 것이다. 지킬 것은 지키는게 안전한 임무수행의 첫걸음이지.
 
  인간의 기억력과 사진자료, 문서를 통한 전통적인 교차검증부터, 지문등의 수단을 활용한 ‘과학적인’ 방법까지. 해병은 받아든 신분증을 서랍 한구석에 넣어두고, 출입증에서 1급 기밀 취급인가자의 패찰 두 장을 꺼내주며 해병이 말했다.
 
  “이거 찬 사람들은 뭘 입고 있어도  멋있는 거 같습니다.”
 
  “그냥 그런 핸드백에 브랜드 이름만 붙으면 가격이 달라지고 스타일 있게 보이는거랑 똑같은 이치지. 이따 보자구.”
 
  “옙. 수고하십쇼.” 
 
  이름은 좀 촌스럽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제인이 그렇게 받아치면서 고개는 돌리지 않고 어깨 너머로 손만 흔들었다. 
 
  회의의 멤버는 언제나와 비슷했다. 우리쪽 멤버들은 CIA의 화이트인 마티(Marty)와 NSA의 화이트인 제시카(Jessica), 그리고 우리 둘, 독일쪽 참석자들은 이 도시의 치안 총책임자인 베를린 경찰서장과 GSG9의 베를린 분견대장.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가끔씩 얼굴만 비추던 SAS의 베를린 파견팀장과 MI-6쪽 사람도 나왔다는 점 정도. 평소랑은 상황이 조금 다르니 이친구들도 관심이 생겼나보다. 프랑스인들은 일부러 안 불렀다. 그 녀석들은 따로 노는 것을 좋아하니까.
 
  “다들 알다시피, 어제 우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주독소련군 동향 분석은 GSFG 스테이션의 활약으로 그럭저럭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긴 했지만,  이번 회의의 주제 부분에 있어서는 언제나 영국 친구들에게 밀리는 느낌이던 회의의 주최자인 마티가 이번에는 꽤나 목에 힘을 주고 자신 있게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다들 짐작하고 있듯이 어제 밤의 급습 건 때문이다.
 
  “여태까지 심증이나 간접적인 증거는 꾸준히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제 잡은 <닥스훈트>는 그 정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보시죠.”
 
  슬라이드가 교체되었다. 어제 우리가 잡아 지금쯤 CIA 안가 어딘가 지하의 심문실에서 이런저런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있을 <닥스훈트>를 작년에 제인이 직접 스파이샷으로 몰래 찍은 사진의 얼굴 부분,  그리고 간단한 신상명세와 그동안의 경력이 죽 나열된 슬라이드이다.
 
  “본명은 볼프강 하이든.(Wolfgang Haydn) 적군파 내부에선 슈바르츠(Schwartz)라고 불렸습니다. 80년 2월 입단. 입단 직후 GSG9의 급습으로 해당 지부가 사실상 거덜나면서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고, 81년 라디오 방송국 인질극을 주도한 것도 이 녀석이었습니다. 뭐 결국 전부 진압 하긴 했지만, 알다시피 이 친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죠. 어쨌든 진압작전 결과는 재앙이었으니까.”
 
  정보 수집 미흡 및 작전 요원의 부주의로 인한 부비트랩 확인 실패. 사망자만 작전 요원 두 명과 인질 다섯 명. 부상 당한 인질이야 말 할 것도 없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는 없는 과거에 생각이 미친 GSG9쪽 인원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 것이 언뜻 보였다.
 
  “이 작전의 실행을 주도했던 <닥스훈트>는 이후 조직 내에서 영향력을 급속도로 키워나갔고, 85년부터는 이 녀석이 소련과의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위장 신분으로 서베를린을 번질나게 드나든 것 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녀석의 정체를 알아 채자 마자 이번 작전을 계획한 것이 바로 이 자리에도 나와있는 하코트 준위구요.”
 
  그리고 니네 쫄따구들은 작전 장소가 뭐 하는 곳인지도 제대로 안 알아봐서 작전 말아먹을 뻔 했지. 빌어먹을. 한국인들 좋은 일만 시켜줬다.
 
  “<닥스훈트>가 그동안 우릴 많이 고생시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작전이 새로운 전기가 되는 수준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데요. 뭐 건진 것이라도 있습니까?”
 
  마치 쪽지 시험 100점을 맞고 집에 돌아와 자랑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을 대견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의 인상을 풍기고 있는 MI-6 지부장의 옆에서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SAS쪽 인원이 그렇게 질문했다. 그러자 마티는, 잠시 뜸을 들여 평소 자기를 은근히 무시하던 영국쪽 사람들을 잠깐 약 올려주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1시간 전에 확인한 최신 정보입니다. 녀석이 서베를린 안에 소재중인 KGB 흑색요원과의 접촉을 시인했습니다. 접촉 시기는 작년 말부터 이번 서베를린 방문까지, 지금도 시내에 있을것으로 추측됩니다.”
 
  방금 질문한 영국인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MI-6 베를린 지부장이 차분하게 질문했다.
 
  “그 빨갱이는 어디 있죠?”
 
  “열심히 족치고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좋습니다. 길어봤자 이틀 안에는 불게 돼 있습니다.”
 
  “말씀들 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닥스훈트>의 소재지입니다. 위에서 독일인 테러리스트를 잡아놓고도 왜 미국인들한테 먼저 갖다 바쳤냐는둥, 미국 특수부대의 도움 필요 없이 GSG9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냐는 둥 이런 저런 압력을 제게 주고 있어요. 어디 있는지라도 알고 있어야지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볼텐데 말입니다.”
 
  뚱뚱하고 후덕해보이는 아저씨 인상이지만 같이 일하다 보면 만만한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는 베를린 경찰서장의 짧은 질문에 마티 지부장이 대답했다.
 
  “항상 그랬듯이, 체포 직후 바로 우리 쪽 안가의 심문 시설에 구속 시켜놓은 상태입니다. 베를린 내 치안 총 책임자로서 서장님의 입장이 곤혹스러운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은, 아시다시피 그런 합법적인 곳에 가게 되면 그만큼 필요한걸 알아내기가 힘드니까요.”
 
  “저도 그래서  잠시나마 당신들에게 빌려 준 거지요. 알아볼 것들 다 알아보시면 다시 신병을 우리 쪽에 인계 해 주시기로 한 점,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받아 오라는 이야기를 잊을만 하면 떠들어대고 있어요.”
 
  “저희도 이 문제를 가지고 동맹국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CIA가 쳐박아놓은 <닥스훈트>를 놈들이 다시 꺼내갈 일은 없으니 범죄자 신병의 인수인계 문제는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그 외에 적군파에 대해서 뭐 쓸만한 정보는 나온 것 있습니까?”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GSG9쪽 참석자의 발언에 베를린 경찰서장은 언짢은 듯 표정을 살짝 구겼지만, 그쪽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까전부터 신바람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마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꽤 독한 놈이라 아직까지는 별 이야기가 안 나오거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을법한 이야기들만 슬쩍 던지는 수준이지만, 아까 전 KGB 날파리 건 처럼 쓸만한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걸 보아 슬슬 우리가 궁금해 할 이야기들도 나올 겁니다. 우리는 법 따져가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건 영국분들이 아셔야 할 이야기 같은데,”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마티의 말에 영국쪽 참석자들이 반응을 보였다. 아마, 어제 밤에 제인이 생각지도 못하게 건진 맨패드 거래 이야기일 것 같다.
 
  “IRA 친구들이 뭔가 큰 사고를 치려는 것 같습니다. 적군파 녀석들을 통해서 소련제 맨패드를 구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어제 밤에 입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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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화이트의 이름은 영화 베를린의 그 아저씨에서 따온거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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