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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2 :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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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벌레가 찌르르르 제법 운치 있게 소리를 내고, 하늘엔 별빛 대신 고풍스럽게 생긴 디자인의 가로등이 영 낭만 없는 환한 불빛을 땅에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말 은은한 달빛조차 잡아먹을 그런 영 기분 나쁜 불빛이 뭐가 그리 반가운지, 경박한 가로등 불빛 아래를 이리저리 맴돌고 있었다. 반달인지 초승달인지 애매한 그런 달이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존재감을 빛내고 있긴 했다. 하늘은 아직 시꺼멓다.

 

  “위에는 좀 어떻대요?”

 

  “다 알려주지 않아?”

 

  벤치에 눕듯이 늘어지게 기대고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애매하게 생긴 달을 쳐다보며 말하던 볼로쟈는 콜랴의 말에 피식 웃었다. 

 

  “걱정 말라고만 하고, 제대로 말을 해주는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죠.”

 

  이번에도 장소는 똑같았다. 블리처 가르텐, 같은 벤치, 심지어 한 사람이 쉴 때마다 다른 한 사람이 담배를 입에 무는 식으로 릴레이 하듯 궐련을 입술에 물고 있는 꼴까지 평소와 같았다. 모스크바는 예년과는 너무나 다르겠지만 말이다. 살짝 한기가 느껴졌는지, 콜랴가 부르르 떨면서 옷깃을 여미는 듯 한 소리가 등 뒤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들려왔다.

 

  “알려준 내용이 맞을 텐데. ‘작전은 순조롭다.’ 나한텐 그렇게 왔지.”

 

  “음, 그러면, 콜랴 말이 맞네요. 저도 똑같아요.”

 

  너무 간결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고개를 벤치에 대고 뒤로 젖힌 볼로쟈의 시야에는 콜랴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흘러 흘러 맑은 하늘 위에 구름처럼 보이는 시각 효과를 만들어서 달 주변의 하늘을 제법 그럴싸하게 치장해 주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이야기의 핵심을 잊지는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국장님이 결국 한 건 저지른 것은 확실하고, 일도 계획대로 순조롭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넌 그거 말고 다른 얘기 없었냐?”

 

  “왜, 다른 얘기 없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볼로쟈가 생각한 내용을 콜랴가 입에 올렸다.

 

  “서방 애들 얼마나 쫄았는지 보고하라는 거? CNN만 봐도 알 수 있겠더만.”

 

  “이젠 여기 TV들도 틀어주고 있죠. CNN 영상 제공받아서.”

 

  “웃기는 일이지. 독일 땅에서 나는 일을 미국 방송국에서 영상 받아다가 틀어주고 있는 꼬라지라니.”

 

  물론, 볼로쟈나 콜랴 역시 위에다‘그냥 미국 TV나 쳐 보세요’같은 식으로 보고를 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보도가 서방이 이번 사태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는 할 수 있었다.

 

  말단 전방부대의 대대 지휘부에서 서독 행정부의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양한 방면에 심어둔 이중 간첩들로부터 쓸만한 정보들을 정보의 난로 연통에서 1차적으로 건져내어 분류하는 ‘케이스 오피서’인 콜랴가 보기에도 결론은 비슷했다. 서방은 모스크바에서 누군가 총질을 했다는 것 까지만 확실히 인지하고 있을 뿐, 이것이 쿠데타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눈치였다. 

 

  그나마 급변 사태를 두고 손 놓고만 있어선 안 된다는데엔 생각이 미쳤는지 유럽의 전 병력에 비상 경계를 하달한 것 까지는 충분히 콜랴조차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범위 안의 일이었다. 미국 친구들이 REFORGER를 소집하지 않은 것을 보면 생각보다는 약간 미온적인, 허용 범위 안의 반응이기도 했다.

 

  결국 콜랴의 보고서나, 볼로쟈의 보고서나 그 내용은 비슷했다. ‘서방에서 모스크바 내 교전 상황 인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을 못한 듯. 전방 병력에 경계 태세 하달.’ 작년까지 아프간에서 말단 소총수로 굴렀다는 콜랴의 사촌 동생도 작성할 수 있을 내용의 보고서였다.

 

  “여기서 뭔가 더 터지진 않겠지?”

 

  “쟤들이 먼저 넘어오지만 않는다면, 상관 없겠죠.”

 

  그리고 서방이 지금 전쟁을 시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은 너무나 잘 알 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을 못하고 워싱턴이 혼란에 빠진 하루 사이에, 고르비를 외견상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강제로 사임 시키고 그 자리에 입맛에 맞는 사람, 혹은 아예 국장님이 그 자리에 올라가면 게임 셋이다. 

 

  그 몇 일 간만 국경을 잘 사수하기만 한다면, 저들에게 찾아온 천재일우의 기회는 다시 자본가들의 손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 역시 아니지만, 적어도 저들의 손에 들린 것 보다 낫다는 건 역사의 진보에 대해 잘 학습받은 동무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터이다.

 

  “그래,  자네는 뭐 좀 건진 거 없어?”

 

  콜랴의 질문에 볼로쟈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사진들이 들어있는 조그만 종이봉투를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서 슥, 오른손을 뒷쪽으로 내밀었다.  누군가 그것을 낚아채는 느낌이 들더니 이런 말 소리가 볼로쟈의 귓가에 들렸다.

 

  “캠프 터너?”

 

  “정확히는, 거기 있던 녀석들이죠.”

 

  일단의 M60A3 패튼 전차부대가 선두에 M113 장갑차를 앞에 세우고 주둔지를 떠나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오, 잘 나왔는데? 밤이라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서서히 꺼져가는 담뱃불따위는 잠시 잊은 듯, 타들어가는 궐련의 재를 터는것도 잊은 채 사진을 휙휙 살펴보던 콜랴의 입에서 꽤 호의적인 소리가 나왔다. 

 

  “전기가 끊긴 것은 아니니까요. 가로등 불빛은 언제, 어느 때나, 누구 에게나 공평하죠.”

 

  “사상성이 투철한 불빛이구만.”

 

  별로 재밌지도 않은 농담은 제껴 두면 될 일이다. 볼로쟈가 안주머니에서 고급 담배케이스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치 콜랴를 대신해 교대라도 하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타이밍에 말이다.

 

  “사실 정보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죠. 풀다 갭 쪽에서 기갑사단이 기동하는게 방송 나간 마당에, 이 정도가 무슨 대수겠나요.”

 

  “거기서도 이동하는데, 베를린에 있는 애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으니까.”

 

  잠깐 대화가 멈췄다. 새벽에 다들 너무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피곤했던 탓일까.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말이다.

 

  “그래도 시키는 일 안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뭐, 나쁠 건 없겠지.”

 

  “선배는 뭐 건진 거 있어요?”

 

  “나는  너 같은 애들이 주는 것만 모아도 그림이 나와.”

 

  직접 발품을 팔 일이 그렇다고 줄어드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케이스 오피서로서의 직무에 충실한 콜랴의 말에 볼쟈가 부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절대 말 못 할 것이다. 꼭두새벽에 이 사진 몇 장 찍겠다고 알아서 거동수상자가 되는 일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닌데. 승진에 대한 욕구가 새삼 불타오른다.

 

  “아무튼, 당분간 제때 자기는 글렀구만. 빨리 정치판이 좀 안정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일한다고 돈을 더 줘, 훈장을 더 줘?”

 

  “줄을 못 잡으면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이지요. 아무튼,”

 

  볼로쟈는, 호주머니에서 독일제 금빛 가스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살짝 불을 붙여 깊게, 한모금 빨아들였다.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폐 건강과의 악화와 동맥경화를 감수하고 얻어낸 쾌감. 볼로쟈는 몇 번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하며 담배 대신에 라이터 불에 시선을 두었다. 이번엔 그의 호흡기를 거쳐 나온 유독 물질 연기가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흘러나오고, 곧이어 말을 이었다.

 

   “길어 봤자 일주일이면 문제도 대충 해결 되겠죠. 그럴 자신 있으니까 GSFG에도 얘기 한 마디도 안 했겠지.”

 

  ‘찰칵 찰칵’, 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를 몇 번 반복하던 라이터의 뚜껑이 완전히 닫히고, 라이터는 다시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음.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GSFG에도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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