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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요, 그 사람들이 여기 떠날 때 챙기고 가겠죠.”

 

  NSA의 정보 분석관, 레너드 길버트의 ‘위장 신분’과 비슷한 직급의 문화원 말단 공무원 하나가 그렇게 안심시키듯 말했다.

 

  “길버트 씨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설마 두고 가겠어요?”  라고 말하고 그녀는 길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살짝 텀을 두더니 말을 마저 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 지금 처음 알았어요.”

 

  “아 예, 보안은 보안이니까요. 사실 지금 말하는 것도 원래는 안 되는 건데…….”

 

  “어차피 월급 날 지나면 공개할 사실이었다면서요. 조금 일찍 안 셈 치죠, 뭐.”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지은 길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차창 너머 가로등 불빛 아래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여기 남아 있다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라고 말하고서 검고 긴 생 머리를 흩날리며 문 바깥으로 사라졌던 제시카 선배.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한동안은 별 일 없었다. 같이 일하면서 적당히 안면을 튼 CIA쪽 말단과 그냥저냥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만 해도 한가했다. 그러다가 오후 8시가 되자, 상황은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창 밖에서 폭발음과 총성이 아련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밀문서를 파기하던 각 처부 직원들의 손길이 조금 더 분주해졌다. 간발의 차로 사무실 ‘정리’를 끝내 놓았던 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제시카 선배에게 온 전화였다. 대피 계획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고 이야기하자 당황스러워 하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다.

 

  [ -  아직? ]

 

  “저 아직 여기 온 지 한 달도 안 됐잖습니까.”

 

  [ -  제기랄. 쫄지 말고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긴장 하지 마. 알았지? 이따 보자. ]

 

  “예 알겠습니다.”

 

  길은 시키는 대로 사무실 마무리를 지었다. 시키는 대로 헌병들을 따라 사무실 바깥으로 나서서 인원은 재분류하는 모종의 장소에 모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서서히 뭔가 잘못 되어감을 느꼈다.

 

  “저기, 군인 아저씨? 저도 기관원인데 왜 저는 여기서 기다리는 겁니까?”

 

  “아, 서류에 이름 제대로 적혀 있으니까, 걱정 하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선생님은 CIA 아니잖아요.”

 

  “아 뭐 그렇긴 한데…….”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조금 전까지 같이 붙어 다니던 CIA의 폴을 쳐다 보았다. 그도 조금 당황스러운지 고개를 갸웃 했지만,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글쎄요, 길버트 씨, 저도 퇴출 계획은 제 이야기 외에는 잘 몰라서… 이 군인들이 이 방면은 전문가들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겠죠.” 그리고 멀어지는 발소리, 길의 기분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었다.

 

  그렇게 죽치고 있다가 버스에 몸을 실은 뒤, 불안함이 더욱 커졌다. 당장 그의 옆자리에 앉은 문화원 강사 베티(Bette)부터 시작해서, 비서실의 아줌마, 안내 창구의 안내원 등등 깔끔한 직업을 가진 말단 직원들만 자리에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그는 출발하려던 버스를 억지로 세우고는 차 밖으로 나서서, 헬멧에 조금 큰 계급장을 달고 있는 사람을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분명히 명단에 이름이 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혹시 제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 같은 게 있으십니까?

 

  “말씀 드렸잖아요. 아직은 비밀이라서 그런 식으로 제 존재를 드러낼 서류는… 아 잠시만요. 이 가방을 한번 보세요.”

 

  하지만 그 군인이 깔끔하고 다소 싱거운 디자인의 서류 가방의 정체를 알아 보는 데는 수 분의 시간이 지체 되었다. 상급자의 급한 지시가 있다며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시 돌아왔고, 그렇지 않아도 바빠 보이던 그의 안색에 약간의 피로함이 더해져 있었다.

 

  위성 안테나와 연결해서,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본사와 직접 연락이 가능한 고성능 무선 비화 장비를 보여주면서, 길은 자신이 무언가 행정적인 착오로 버스를 잘못 배정 받은 것 같음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그러니까 선생님. 지금 가지고 계신 기계가 많이 복잡한 물건인 것은 알겠는데, 이게 선생님의 신분을 증명해 드리는 장비는 아니잖습니까.” 그 지휘관의 미간이 찌푸려져 피곤한 인상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정말 그렇게 중요하신 분이면 설마 이런 버스에 배정 해 드렸겠습니까? 저희도 기관원들 대피 계획은 따로 잡아놨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절차 잘 알고 있어요. 보아하니 여기 오신지 얼마 안 되신 거 같은데, 본인은 위급 상황시 어떻게 대피하는지 알고 계시긴 해요?”

 

  “아, 그게 아직 교육을 못 받긴 했ㄴ…….”

 

  “거 봐요, 모르시잖아요.” 이제 그는 자신의 기분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지금 선생님 때문에 움직임이 얼마나 지체된 줄 아십니까? 그쪽에서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으니 이 버스에 탈 사람 명단에 선생님 이름을 올려 둔 거겠죠. 그러니까, 제발 좀 그냥 닥치고 버스에 타세요!”

 

  ‘씨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다들 나만 갖고 지랄이야.’ ‘소대장님이 만만해 보이나 봅니다.’ ‘ 닥치고 인원 통제나 똑바로 하도록, 일병.’ ‘닥치고 있겠습니다.’ 군인들이 궁시렁댔다. 짜증도 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군인들이 하는 말도 맞는 거같아서 괜히 민망해지기도 하고, 자기 때문에 출발이 늦어진 터라 남들이 다 자기를 쳐다보는 것 만 같고, 복잡한 심정으로 다시 버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이 쭉 빠졌지만, 천천히 걸어갔다간 누구 때문에 늦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린다고 뒤에서 수군거릴 것 같아,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바른 걸음으로 버스의 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공부도 잘 했고 직무 수행 능력도 꽤 받쳐 주는 사람이었지만, 레너드 길버트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그의 옆자리에 앉은 것이 여직원들 중에서도 꽤 예쁜 축에 속하는 베티라는 점을 조그만 위안거리로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실례합니다.’ ‘어쩔 수 없죠. 좌석표에 나온 자리가 창가이신걸요.’ 약간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투박한 미 육군 재산인 군용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시내버스 기사들보다 부드럽게 운전을 하는 지라 크게 흔들리는 일 없이 무사히 착석했다. 

 

  심정이 복잡해진 길은 창문에 고개를 박은 상태로 바깥을 내다 보았다. 운전을 하면서 느껴지는 차량의 진동이 유리창을 통해 신체로 전달되었다. 조금 어색해서 그랬던 걸까, 심심해서 그랬던걸까, 베티가 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게 아무런 깊이도 없는 대화가 무의미하게 이어졌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두어번 쯤 중간에 멈춰서 새로운 사람들을 몇 명 태우고 나니 조금은 여유가 있던 버스 좌석은 어느덧 만원이었다. 입석은 없어서 분위기가 경망스럽진 않은 터라 다행이었다. 그리고 사거리에서 행렬은 신호등에 걸려 다시 멈춰 섰다.

 

  “그렇다면, 길버트 씨는 이 도시에서 나가는 건가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화이트. 자세한 교육은 못 받았지만… 위에서 생각하기엔 저까지는 빼 올 생각인 것 같더라구요.”

 

  “그것 참 부럽네요.” 베티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전 이 일을 하면서 러시아인들 수용소에서 몇 년씩 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부럽네요.”

 

  “에이, 당신같은 말단 직원들은 아마 외교관들과 같이 금방 본국으로 송환 될 거에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문제죠.”

 

  대화가 멈춘 것은 그 직후였다. 신호가 바뀌어 다시 출발하던 행렬이 갑자기 멈췄다. 그냥 멈춘 것 도 아니었다. 두 번의 연속적인 총성이 들리더니 멈춘 것이다. 

 

  총소리는 이미 얼마 전부터 간간히 들려 오긴 했지만, 이번엔 매우 가까이서 들린 소리라 누구나 심상찮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급정거의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베티가 복도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좌석은 버스에서도 꽤 앞자리에 속하는 터라,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버스 앞의 앞의 자리에 있던 군용 차가 커다란 트레일러에 받쳐 날아가듯 시야에서 벗어나더니, 콘보이의 대열 전방을 빨간 색의 컨테이너가 가로막는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서 보였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할 말을 잃은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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