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 Sunny day : West Berlin
Chapter 002 :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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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13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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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엔 함박눈은 아닐지언정 가루 눈발이 휘날리고 있고, 시민들은 저마다 옷을 두껍게 챙겨 입고 나왔지만 생각 외로 다른 날에 비해 많이 춥지는 않은 날이었다.

 

 시립도서관 1층 로비 한켠에 부스를 차리고 있던 나는 심심하지는 않았다. 잊을 만 하면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와 책을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쓴 책을 말이다.

 

 “선배님, 책 너무 잘 읽었습니다. 여기다가도 사인해 주실 수 있나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이신가요?”

 

 책 말고도 자기가 가져온 보급 티셔츠에도 사인을 해 달라는 군인 손님의 주문대로 책을 쓰기 이전엔 은행에서나 종종 했던 사인을 두 번 하고 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요즘 모두들 힘들죠?”

 

 “미국인이라면 다들 힘들겠죠.”

 

 이유를 따로 설명할 필요 있겠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레이건 시절부터 제인 그 아줌마가 추적해오던 중동 테러단체들은 나날이 그 위험성이 커져가더니만, 급기야 몇달 전에는 전대미문의 자살테러를 벌이고 말았다.

 

 “후배님이라면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힘들 것 같은데요.”

 

 지금 나를 선배님이라 부르며 책과 티셔츠를 내민 이 청년의 정복 한쪽 어깨에는 스페셜 포스, 에어본, 그리고 한 자루의 단검과 세개의 번개가 그려진 탭이 붙어 있다. 충분히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 후배이고, 이번 전쟁동안 충분히 고생하게 될 녀석이다.

 

 “건강하시고, 어디 파견나가도 살아 돌아오세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라고 말하고는 경례를 붙이고 나가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에 맞지 않은 훈훈한 날씨다.

 

 “선생님. 한 잔 드세요.”

 

 예전같았으면 무기라고는 허리에 달린 맥 라이트 하나가 전부였을 도서관 경비가 이제는 글락 한 자루를 허리에 매달고  내게 종이컵을 내민다.

 

 “고마워요, 빌.”

 

 여기서 사인회 준비를 하러 몇 번 들락거리면서 알게 된 빌이 그렇게 부스 귀퉁이에 놓인 접이식 의자를 질질 끌고서 내 옆에 앉았다.

 

 내 옆에서 자기 종이컵에다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졸졸졸 따라 담고서는,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따뜻한  싸구려 커피의 맛을 즐기면서 생각해 두고 있던 말을 천천히 준비했다.

 

 “근데, 오늘 뭐 대통령이라도 옵니까?”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티가 딱 나는 구만.

 

 “아무리 테러 이후라지만 경비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까 여기 들어오면서 보니까, 저번에 비해 은근히 경찰차들도 많았고, 도로에 벤 같은 대형 차량을 주차 해 놔도 주변에 쫙 깔린 경찰들은 건드릴 생각을 안 하고.”

 

 나는 단숨에 남은 커피들을 쭉 목구멍 안에 밀어 넣고서 말을 이었다.

 

 “누구 오는 거 맞죠. 못해도 연방정부 장차관급?”

 

 빌은 내가 주저리 주저리 떠들던 그 순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뒀는지,

 

 “알아도 말씀 못 드리는 거, 잘 아시잖아요.”

 

 라고 내게 말했다. 하긴 뭐 안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그럼 어쩔 수 없고’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빈 종이컵을 사인회 부스의 테이블 한 귀퉁이에 놓고서, 다시 빌과 대화 주제를 바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서기장 동지, 사인회는 일 없습니까?”

 

 라는 러시아 악센트의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곱게 늙은 단발머리 아줌마 하나가 엄마를 꼭 빼 닮은 것 같은 여자아이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쥐고서, 다른 손을 흔들면서, 악센트를 평소대로 고치고는 내게 말한다.

 

 “<스탈린>?”

 

 “오, 이게 누구야. 제인, 정말 오랜만인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이에 비해 10년은 젊어 보이는 제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내가 쓴 책을 내밀고서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애 엄마 되고, 선생님까지 하려니까 모두들 만날 시간도 안 나더라구. 건방진 맷은 요즘 좀 어떻게 지내?”

 

 총 쏘는 법 가르치는 것도 일단은 강사 맞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맷의 근황에 대해 말 해줬다.

 

 “걔는 요즘 헐리웃이랑 친하게 지내잖아요. 영화 안 봤어요? TF 레인저, 아이린, 바카라 시장, 슈퍼 6-1, 슈퍼 6-4, Fuck’in 아이디드…….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리고 아직 안 봤어. 망할 놈의 아이디드 새끼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래도 맷 얼굴 생각하면 봐 줘야죠. 그리고 영화 보니까 배우들 얼굴 헷갈리는 거 빼면 잘 만든 거 같던데.  레인저 새끼들 삽질 짤라먹은 건 좀 그렇더라구요. 아, 고마워요, 꼬마 아가씨.”

 

 “엄마가 산 거니까 인사는 저한테 하실 필요 없어요. 헤헤.”

 

 귀여운 꼬마아가씨 클로이(Chloë)가 내미는 스타벅스 커피를 받아든 나는 빌에게 책 속의 <로즈>를 소개시켜 줬고, 빌은  책에 내 사인에 이어 제인의 사인까지 받게 되었다.

 

 즉석에서 부스 한켠의 연필 꽂이에 들어있던 사인펜을 꺼내 마침 뒤이어 오던 두어명의 책에까지 사인을 해 준 제인은 한 숨 돌리게 되자 커피를 빨면서 다시 내게 무어라 말했다.

 

 “근데, 오늘 뭐 대통령이라도 오는 거야?”

 

 “그 소리 제가 아까 전에도 했었던 거 아세요?”

 

 확실히 제인도 뭔가 평소랑은 다른 위화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야 뭐, 맞장구 치는 거 말고 딱히 할 말이 있겠는가. 두 사람의 추궁에 빌은 잠시 시계를 보더니만,

 

 “하긴, 이제 곧 오실 시간이니 보안 유지의 의미도 없겠지. 누군지도 모를 VIP가 우리 도서관에 방문할 예정입니다.”

 

 “엥? 누군진 모르겠지만, 할 일도 많을 양반이 뜬금없이 시립 도서관에는 왜요?”

 

 “잘 모르겠네요. 저희도 들은 건 여기까지 밖에 없어서, 위에서는 대통령 왔다고 생각하고 현장 보안 신경 쓰라고 해서 우리도 이 난리를 피는 거에요. 저야 뭐 쉬는 시간이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만, 요즘 진짜 빡쎘다구요. 진짜 어디 대통령이라도 오나.”

 

 “잠깐, 대통령이라고 하셨나요?”

 

 갑자기 제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로즈>의 눈빛이다. 저 눈빛을 처음 본 빌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예, 위에서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물론 정확 직급과 신상 명세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 정부 사람인가요? 아니면 외국인?”

 

 “어… 이걸 말 해도 되나 좀 그런데…….”

 

 “에이, 어차피 곧 온다면서요. 말 안해도 곧 누군지 알게 될텐데. 아는 대로 말 좀 해 줘 봐요. 누가 듣겠어요, 설마?”

 

 그러자 빌은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외국 정부 고위 관료라고 하던데요. 이 이상은 말을 안 해 줬구요.”

 

 그러자 로즈는 내게 그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서는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감 잡히는 사람, 없어?”

 

 “대통령급 외국 정부 요인… 국가원수… 잠깐 설마, 제인. 좀 지나친 비약 아닐까요?”

 

 지금 미국 땅에 온 국가 정상급 외국 정부 인사가 그 사람밖에 더 있겠나, 싶어서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다가, 아직까진 큰 물증 없는 추측일 뿐이라고 제인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계단 쪽이 웅성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양복을 쫙 빼 입은 건장한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경비들조차도 당황한 모습. 유리 문 너머로 언뜻 뉴욕 시경의 ESU로 추정되는 인원들 몇몇이 보였다.

 

 “아, 씨발 저 새끼 저거…….”

 

 아까 전 내 험한 말버릇 가지고 무어라 말하던 제인도 이젠 내가 뭐라고 말하던 넋을 놓고 그 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독특하게 생긴 면상과 눈매, 본 사람은 누구도 잊을 수가 없다. 저런 새끼가 어떻게 KGB였나 싶다니까.

 

 도서관장과 뉴욕 시장, 그리고 우리 연방정부쪽 사람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로비에서 한참 담소를 하고, 뒤늦게 그들의 전격 방문 소식을 접한듯 기자들이 우루루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광경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제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 좀 제대로 하고 오는건데.”

 

 어쩔 수 없는 여자다 이겁니까. 아니 그거보다 당신, 지금 그게 화장 안 한 얼굴이라 그 말이요?

 

 그 와중에 담소를 끝낸 오늘의 손님은 한번 로비를 슥 훓어보더니, 우리 쪽을 바라보고선 싱긋 웃으면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빌은 아까 전에 우리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는지, 이 자리에는 나와 제인, 그리고 제인의 아리따운 딸래미인 클로이 양 밖에 없다.

 

 “엄마, 나 무서워.”

 

 아까 전에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커피잔이 담긴 봉투를 내밀던 클로이가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며 달라붙자, 제인, 아니, <로즈>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으로 딸아이를 쓰다듬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입가엔 슬며시 미소를 띠고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님. 저래뵈도 엄마랑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은 맞지. 나도 저 양반이랑 아는 사람이다. 제인이나 나나 89년 5월 9일의 오후 몇 시간동안만이긴 하지만, 서로 같은 방 안에서 얼굴을 마주 보던 사이니까. 그 방이 심문실이었고, 잡아온 것은 바로 우리긴 했지만 말이다.

 

 어느덧 그가 우리 부스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잠시간의 시선 교환,

 

 갑자기 그가 차가운 눈빛을 거두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한다. 나도 손을 내밀고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는 나와 제인을 돌아보더니, 악수를 멈추고는 러시아어로 뒤의 수행원을 불렀다.

 

 수행원 한 사람이 가져 온 책은 내 회고록의 러시아어판이었다. 저거 번역과정에서 현지 출판사에서 좀 헤메는 것 같다 싶으면 내가 직접 교정해주곤 했었지. 눈 앞의 사내는 내게 그 책을 내밀면서, 러시아 억양이 전혀 안 나오는 깔끔한 독일어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책은 잘 읽었소. 재밌더군. 옛날 생각도 나고. 나도 그때 이야기로 책을 좀 써 볼까 싶었는데, 방송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준다길래 틈틈이 짬 내서 고증 자문을 조금 해주고 있긴 하지.”

 

 눈 앞의 사내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현재 직업은 러시아 연방 대통령. 2002년 1월 현재 49세. 미-러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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