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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한국과 북한 로켓 개발사

폴라리스 | 조회 수 680 | 2015.05.21. 22:46

방위산업 진흥협회가 발간하는 국방과 기술 2013년 4월호에 기고한 "한구과 북한 로켓 개발사" 입니다.

2년전 원고이며 제가 수집할 수 있는 정보 한도에서 작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주십시요.  저의 허락 없는 무단 전제를 금지합니다

사진은 기사에 나간 것중 몇개만 씁니다..

 

 

1. 북한 - 시작부터 군사적 용도

 

북한이 발사한 은하 3호 로켓은 태양 동기 궤도에 위성을 진입시키기 위해 적도 방향으로 발사하여 1단 로켓의 잔해가 우리 서해에 낙하했다. 낙하한 1단 로켓의 주요 잔해를 우리 해군이 성공적으로 회수하여 분석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 북한의 로켓 기술이 그동안 개발해온 미사일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자주적 우주개발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북한의 로켓 개발은 처음부터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 당시 김일성 주석은 함흥군사대학에 무기관련 학과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면서 전쟁 발발 시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장거리 로켓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등 로켓 개발이 군사적 용도로 활용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1) 북한 미사일 기술의 시작 - 이집트와 Scud 미사일 그리고 이란

 

북한은 무기관련 학과를 설립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부터 구소련으로부터 미사일과 로켓은 물론 관련 기술 일부도 전수받았다. 구소련으로부터 다량의 미사일과 로켓은 물론 관련기술까지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독과 함께 북한이 동서냉전의 최전선에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특히 1961년 한국의 5.16 군사혁명 이후 이를 빌미로 같은 해 7월 구 소련 및 중국과 각각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하면서 군 현대화를 위한 신무기와 관련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구소련에서 SA-2 지대공 미사일을 비롯하여 SS-N-2 “스틱스” 대함미사일, “프로그(Frog)-5/7” 지대지 로켓을, 중국으로부터는 HQ-2 지대공 미사일, HY-1 “새플라워(SAFFLOWER)” 대함미사일 등을 지원받아 전력을 급속히 증강시켰다.

 

북한은 향후 비대칭 무기로서의 미사일의 가치에 주목하고 단순 유지보수 및 정비 능력이 아닌 자체 생산 및 독자개발을 위한 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기술통제로 독자개발에 어려움을 겪다가 1975년이 되어서야 관련기술을 확보하고 독자개발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은 구소련이 정치적 이유로 제공하지 않았던 사거리 300km급 “스커드(Scud)” 미사일과 같은 탄도 미사일 확보를 갈망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17일, 모택동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 주석과 동행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중국에 탄도미사일 기술 제공을 요청했다. 당시 중국은 사정거리 1,000km 이하의 탄도탄 개발을 계획하고 있어 북한과 중국은 이를 공동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을 북한 최초의 탄도미사일 개발 시도로 보고 있다.

 

이때 개발하기로 한 탄도탄은 “DF-61(東風-61)”로 사정거리 600km, 탄두중량 1톤의 액체연료 추진 1단 미사일이었다. 약 1년간 야심차게 개발이 진행되던 미사일 개발은 중국의 문화혁명과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1978년 개발이 취소되었다. 당시 개발을 담당하던 첸 실란 장군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실각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개발 중단으로 이 미사일을 확보 할 수는 없었지만 유도기술 등 일부 기술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기술 이전을 거부하던 구소련의 도움 없이도 탄도미사일의 독자적 개발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DF-61 취소이후 잠시 중단된 북한의 미사일 개발 노력은 중동전쟁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찾게 된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루면서 구소련에서 “스커드(Scud)-B” 미사일을 도입한 이집트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게 되었는데, 북한은 1973년 벌어진 제4차 중동 전쟁 당시 이집트에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하여 함께 이스라엘과 싸운 혈맹관계였다. 전쟁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집트는 1980년 북한과 미사일 공동 개발을 위한 비밀 협정을 맺고 1981년 “스커드-B” 미사일 2기와 MAZ-543P 이동발사차량 등을 비밀리에 북한에 제공했다.

 

북한은 이집트에서 제공받은 스커드 미사일을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방식을 통해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체적으로 지대지 미사일 생산에 들어간다. 그 결과 미사일이 도입 3년 만인 1984년 4월과 9월 함경북도에서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곧 성능개량에 들어가 1985년에는 기존에 역설계로 생산한 스커드-B 미사일보다 사거리를 20~40km 늘린 개량형 스커드-B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게 된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기반이 된 스커드-B 미사일은 구소련의 마카예브 설계국(Makeyev OKE)이 개발하고 1957년부터 구 소련군에 실전 배치된 R-11 탄도 미사일의 개량형인 R-17 미사일로 1961년 실전배치 되었다. “스커드”라는 이름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R-11을 SS-1B “스커드(SCUD)-A”로 명명하면서 붙여진 코드네임이며 A~D까지 명명되었다.

 

스커드-B 미사일은 길이 11.25m, 직경 0.88m, 발사중량 5,900kg, 탄두중량 985kg의 1단 액체로켓 미사일로 사용된 로켓의 추진력은 132kN(약 13톤)이며, 연료는 비대칭디메틸히드라진(UDMH), 산화제는 항부식성 적연질산(IRFNA)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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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스커드B 미사일 노즐-출처-new-factoria.ru

 

숙원이던 미사일 기술 습득과 생산에 성공한 북한에 다시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란이 북한에 개발비와 핵심 부품 수급을 약속한 것. 당시 이란은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에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당시 이란은 회교혁명이후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아 스커드 미사일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은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였다. 1985년 이란과 북한은 ‘탄도미사일 개발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때부터 시작된 미사일 개발 커넥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란의 도움으로 북한은 기존에 복제 및 개량한 미사일 외에 사거리 연장형을 개발하면서 독자적인 명칭을 부여하는데 1984년 사거리 330km의 “화성 5호”, 1986년 사거리 500km의 “화성 6호”가 대표적이며 이들 미사일은 이란에 대량으로 판매되면서 각각 “샤하브(Shahab)-1, 2”로 명명되었다. “화성”은 북한이 자체 개발한 미사일의 명칭으로 1~4호까지는 역설계한 테스트용 미사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란 외에도 1991년 4월 시리아와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 판매 협정을 체결하였고 1991년부터 매월 4~6기를 생산, 이란에 100기, 시리아에 60기의 미사일과 이동식 발사대 차량을 수출하면서 미사일 수출이 주요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로도 북한은 스커드 미사일을 계속 발전시켜 스커드-ER 등 개량형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IRBM “노동” 미사일 - 전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라

 

스커드 미사일의 사거리를 한반도 남쪽 전역 타격이 가능한 500km까지 끌어올렸지만 김일성 주석이 함흥군사대학에서 밝힌 미국의 지원 차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긴 사정거리의 미사일이 필요했다. 즉 미국의 전시 증원군이 집결하고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될 일본을 타격하기 위해 1980년대 말부터 사거리 1,000km대의 IRBM(Intermediate Range Ballistic Missile) 개발에 착수했다.

 

이 시기 북한은 구소련의 붕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구소련 및 우크라이나 출신 과학자들을 북한으로 이주시키고 다량의 미사일 관련 자료 및 부품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미사일 및 핵 개발에 큰 진전을 이루기 시작한다.

 

미국 정찰위성이 1990년 5월 함경북도 함주군 노동리에서 이를 발견하여 “노동(Ro-dong)"으로 명명하면서 알려진 노동 1호 미사일은 1993년 5월 31일 함경북도 화대군 대포동에서 동해로 시험 발사되었다. 북한은 노동 1호 미사일을 ”화성 7호“로 부르고 있다.

현재 우리가 북한의 미사일을 부르는 “노동”, “무수단”, “대포동”이라는 명칭은 미사일이 목격된 북한의 지명으로, 나토가 R-11, R-17에 붙인 “스커드”라는 코드 네임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노동 1호 미사일은 이란에 “샤하브(Shahab)-3”, 파키스탄에는 “가우리(Ghauri)-1”이라는 이름으로 기술과 부품이 수출되었고 이들 미사일에 사용된 부품들을 이란과 파키스탄이 자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전시한 것이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노동 미사일의 기술도 서방 정보당국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노동 1호 미사일은 길이 16m, 직경 1.35m, 발사중량 16톤으로 추정되며 사거리는 1300km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사용된 로켓 기술은 “화성-5/6호”에 사용된 로켓엔진의 크기를 키워 추력을 280kN(약 28톤)으로 높이고 연료와 산화재 탱크의 크기를 키운 정도로 평가되었다.

 

2010년 10월 10일 열병식에는 스커드 미사일에 이어 보다 대형화된 미사일이 선보였는데 일부에서는 이 미사일을 “노동B” 미사일로 판단하고 있다.

 

3) 다단 로켓의 시작 - 대포동 미사일

 

장거리 비행을 위해서 1단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다단 로켓 연구를 시작하면서 개발한 것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이다.

 

1998년 8월 북한 최초의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탑재한 대포동 1호는 1, 2단 분리에는 성공했으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한은 위성이 궤도에 안착했으며 북한 찬양 노래를 전파로 전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북한의 주장을 확인하지 못했고 대내 선전용 주장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포동 1호 개발에는 중국이 1964년부터 개발에 들어가 1971년 발사에 성공한 사거리 2,500km의 1단 액체연료 미사일인 CSS-2 (DF-3)의 기술을 제공하여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CSS-2가 4개의 YF-2 로켓 엔진을 클러스터링하여 사용하는데 비해, 북한 TV 영상 등을 통해 알려진 “대포동 1호”의 1단 추진체는 1개의 로켓 엔진만 사용한다. 이러한 차이가 있지만 두 미사일의 비슷한 사거리를 놓고 볼 때 중국이 북한의 관성유도장치 개발에 도움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추진체 1단은 기존에 개발한 노동 1호를, 2단은 화성-5 또는 6을 사용하여 개발 위험을 줄이려 노력하였고, 3단은 북한이 자체 생산하던 지대공 및 지대함 미사일용 고체 부스터의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은 우주발사체라고 주장하기 위해 미사일에 붙여오던 “화성”이라는 이름 대신 “백두산 1호”라고 명명했지만 한국, 미국 등은 명백히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을 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포동 1호의 제원은 길이 25.8m, 직경 1.8m, 발사중량 21톤, 사거리는 약 2,500km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포동 1호 발사에 실패한 북한은 개량형인 사거리 6,700km의 대포동 2호를 개발하면서 우주개발을 위한 발사체라고 주장하면서 발사체 명칭을 “은하 1호”로 명명했다.

 

4) 무수단 미사일 - 구소련제 SLBM 기술을 입수

 

북한은 소련연방 붕괴기에 잠수함 발사 미사일(SLBM)인 R-27 (나토 코드 SS-N-6)을 입수하여 신형 미사일 개발에 나섰는데 북한의 공식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은 "무수단(Musudan)" 이라고 명명하였고 이를 인용하여 한국에서도 “무수단” 미사일로 부르고 있다.

 

최초로 포착된 것은 2003년 9월 9일 정권수립일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위해 평양 미림 공군기지에 전개된 미사일 및 발사차량을 미국 정찰위성이 촬영한 것으로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북한은 이 미사일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미사일이 대외적으로 공개된 것은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 군사 퍼레이드이지만 그보다 앞서 2007년 4월 인민군 창건일 기념 퍼레이드에서 미국 위성에 외형이 포착되어 R-27 미사일을 기반으로 한다는 한미 정보당국의 판단이 내려졌다.

 

1968년 실전 배치된 R-27은 1단 액체추진 미사일로 2,500km의 사거리를 가지며 1톤의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이지만 2010년 10월 퍼레이드에 공개된 미사일은 R-27보다 길이가 늘어나 사거리가 3,300km로 늘어난 것으로 판단되었다. R-27은 길이 8.89m. 직경 1.5m, 발사중량 14,200kg이며 로켓부는 1개의 225kN(약 23톤) 추력의 주 엔진과 각 15kN(약 1.5톤) 추력을 가지는 2개의 방향조정용 보조 엔진을 사용한다.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ISS)는 이란이 개발한 “사피르(Safir)” 로켓의 2단이 R-27의 추진부와 유사하여 북한을 통해 기술이 공유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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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S-N-6엔진 기술을 사용한 이란 Shafir-1B로켓 2단-출처-FARS News Agency

 

계속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북한은 2012년 4월 열병식에 우리측에서 KN-08로 명명한 신형 미사일을 처음 선보였으며, 이 미사일은 무수단 미사일의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은하 시리즈 - 우주발사체로 포장된 ICBM 기술

 

한국과 미국이 “대포동 2호“로 명명한 ”대포동 1호“의 개량형은 1단 로켓의 직경이 커졌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로켓 엔진을 여러 개 묶는 클러스터링 기술을 사용한 최초의 북한 로켓이다. 북한은 대포동 2호를 “은하 1호”로 부르고 있다.

 

남포시 잠진 군수공장에서 제작된 “대포동 2호”는 함경북도 무수단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2006년 7월 5일 “광명성 2호” 위성을 탑재하고 시험 발사 되었지만 1단 추진체가 분리되지도 못한 채 42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발사일자가 미국 시각으로 7월 4일 즉 독립기념일로써 이날을 노려 발사함으로서 미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대포동 2호는 발사중량 60톤, 탄두중량 700~1,000kg, 길이 35m, 1단 직경 2.2m 가량으로 3단 로켓으로 제작되었고 사거리는 6,000Km 로 추정되었는데 이 거리는 알레스카를 타격 가능한 거리다.

 

“대포동 2호”의 1단은 “대포동 1호”와 같이 노동 미사일의 기술이 기반이지만 엔진 4개로 구성되는 점이 다르며, 직경 1.3~1.5m, 높이 14m의 2단은 무수단 미사일의 추진체를, 3단은 고체로켓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4월 5일 무수단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발사된 “은하 2호”부터는 북한이 명명한 발사체 명칭을 한국에서도 인용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1단 추진체는 동해에, 2단 추진체는 일본을 건너 발사장에서 태평양 방향으로 3,846km 떨어진 곳에 떨어졌지만 위성을 탑재한 3단은 분리에 실패하여 궤도 진입에 실패했다. 하지만 북한은 광명성 2호 위성이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지만 확인된 바 없다.

 

“은하 2호”는 “대포동 2호”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길이 32m, 직경 2.4m, 발사중량 70톤으로 좀 더 커졌지만 기본적인 추진로켓 구성은 비슷한데, 1단의 직경을 더 키워 탑재연료를 늘리는 방식으로 사거리를 연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2010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교 측량학과 헤키 고스케(日置幸介) 교수팀은 “은하 2호”의 추진력이 1998년 발사한 “대포동 1호”의 약 8배에 달하며 추력은 일본의 H2A와 맞먹는 대략 200톤 정도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북한은 2012년 4월 8일 “은하 3호”를 외신에 공개하는 등 평화적 우주개발이라는 선전을 펼쳤다. “은하 3호”를 멀리서나마 참관한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중량 92톤, 길이 30m이며 직경은 은하 2호에 비해 약간 굵어졌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은하 2호”와 비슷하고 추진 로켓 또한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은하 3호”로켓이 “광명성 3호” 위성을 태양동기 궤도에 올려놓을 예정이라고 밝힌 북한은 발사장도 기존에 사용하던 무수단리 발사장이 아닌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발사장에서 4월 13일 발사했다. 하지만 1단이 상승도중 폭발하여 실패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로켓 연소 시험을 가진 북한은 12월 4일 “광명성 3호 2호기”를 탑재한 “은하 3호” 발사를 다시 감행하여 1, 2단 분리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3단 분리과정에서 정상적인 작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위성의 궤도 진입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이번에도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추진체는 “은하 2호”와 마찬가지로 추정되었는데, 우리나라 서해에 낙하한 1단 로켓 잔해가 해군에 의해 수거되어 보다 정확한 기술 수준과 사용 부품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이하 국과연)과 외국의 로켓 전문가 등이 참가하여 잔해물을 분석한 결과 부품은 대부분 자체 생산했고 일부 상용 부품만 외국에서 구입하였다는 결과가 나왔다.

 

확인된 엔진은 27t급의 노동 미사일 엔진 4개와 3t급의 방향조종용 보조엔진 4개가 결합된 120t급이다. 길이 7.45m, 지름 2.4m, 두께 3.8mm, 무게 1.13t의 원통형의 산화재 잔해를 통해 스커드 계열과 노동 미사일 등에 사용된 적연질산이 산화제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고 이를 통해 500kg의 탄두를 10,000km까지 운반할 수 있는 로켓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2013년 2월 4일 일본 아사히 신문은 익명의 소식통을 통해 북한이 작년 평양시에 개관한 박물관의 전략 로켓 전시관에 각종 미사일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중 “화성 13호”이라고 이름 붙여진 장거리 미사일이 길이 관계로 3단이 제거된 축소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가이드가 이 미사일과 동형의 로켓이 4월과 12월에 인공위성을 발사했다고 말했다고 전하였는데 이는 북한의 개발 의도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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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북한과 로켓개발에 협력하고 있는 이란 Simorgh 로켓 1단 엔진-Farsnew.ir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북한이 탄도 미사일 개발 초기부터 협력해왔던 이란과도 지속적으로 기술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로켓 기술을 보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은하 3호”는 이란이 2012년 12월 엔진을 공개한 3단 발사체 “Simorgh”와 유사점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알아본 북한의 미사일/로켓 기술은 그동안 북한이 입수하고 개발한 구 소련제 미사일을 기반으로 사거리 향상을 위해 적절하게 조합하는 방식으로서 아직은 로켓 선진국과 기술차가 아직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기술입수가 쉽지 않았던 우리의 로켓 기술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2. 한국의 로켓 개발

 

한국의 로켓 개발은 북한과 달리 군사적 목적으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로켓은 다양한 파생효과를 낼 수 있는 우주산업의 필수 요소였기에 산업/과학적인 목적으로도 한국은 로켓개발을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과는 지향점이 다른 한국의 로켓개발 역사를 알아보자

 

1) 북한보다 빠른 로켓 개발 노력

 

한국의 로켓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 말부터로 시작된다. 1950년대 설립되었다가 1961년 해체된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서 1959년 7월 27일 인천 고잔동 해안에서 1단 로켓인 5호, 6호, 7호, 2단 로켓인 67호와 3단 로켓인 556호를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부터로 볼 수 있다. 2단 로켓 67호는 길이 4.65m, 직경 22.9cm로 최대 고도 9.5km까지 상승, 26km를 비행하였고, 3단 로켓 556호는 길이 3.17m, 직경 16.7cm로 최대 고도 4.2km까지 상승, 81km를 비행했다.

 

이후 연구소가 해체되면서 로켓 개발 노력은 대학 연구소가 이어 받았는데, 인하공과대학이 1959년 11월 19일 IITO-2A의 완성을 시작으로 1964년에는 소형 로켓인 IITO-1A를 비롯해 IITO-3A, IITA-4MR, IITR-7CR 등을 제작, 발사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공군사관학교도 1969년부터 본격적인 로켓 연구를 시작해 1970년 AXR-55, 71년에는 AXR-55, AXR-73 로켓을 제작하여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1972년 12월 30일에는 길이 4m, 직경 30cm의 AXR-300 시험발사에 성공하는 등 작지만 꾸준하게 로켓 연구가 이어졌다.

 

그 후 로켓 개발은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용으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1971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미사일 개발을 시작했다. 1979년 9월 26일 최초의 국산 유도무기인 NHK-1 “백곰”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첫 결실을 맺었다.

 

개발계획이 시작될 당시인 1971년은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소총 생산이 시작되던 시기로, 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미사일 개발에 나서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국내 및 해외에 나가있던 과학자 등 많은 이들이 피땀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백곰 미사일은 미국의 기술 통제를 피하기 위해 당시 운영 중이던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유도탄의 외형을 모방했지만, 유도 SW, 유도조종장치 등 핵심부품을 국산화하는 개가를 올리면서 대한민국을 세계 7번째 지대지 유도탄 개발 국가로 올라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백곰 개발 이후 1982년 ADD내 미사일 개발팀이 해체되면서 미사일 개발 노력은 끊어지게 되었다가 1983년에 다시 부활, 백곰을 개량한 “현무”미사일 개발에 나서면서 다시 명맥이 이어졌고 1986년 개발에 성공하고 1987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퍼레이드를 통해 공개되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맺은 미사일 지침에 따라 지대지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180km로 묶이고 민간용도 로켓에 대한 개발도 제약을 받게 되면서 80년대 초부터 사정거리 300km급 스커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던 북한과의 로켓 기술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제약이 풀린 것은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위협을 느낀 한국이 강력하게 사거리 연장을 요구하면서 2001년 사거리가 300km까지 늘어났고 2012년 10월 다시 사거리 800km로 개정되면서 군용 고체 로켓 개발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2) 과학관측로켓에서 우주발사체로

 

1980년대, 로켓 개발의 족쇄로 작용하던 미사일 지침의 제약 속에서도 과학 로켓 개발은 꾸준하게 이뤄졌다. 1987년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 우주공학실이 신설되면서 과학로켓 1호 개발이 시작되었고 다음해인 1988년 과학로켓 1호 개발사업이 과학기술처의 특정 연구과제로 선정되면서 개발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89년 10월 로켓 개발을 전담할 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전신인 한국항공우주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과학로켓 개발 사업이 이관되었다.

 

한국의 첫 과학 관측로켓인 과학로켓 1호(KSR-I, Korean Sounding Rocket-I)는 1단 고체 로켓으로 1993년 6월 4일 1차 발사에 실패하고 9월 1일 2차 발사에 성공했다. 최초 임무는 탑재된 자외선 방사계로 한반도 상공 성층권의 오존 분포를 수직으로 측정했다. KSR-I은 길이 6.7m, 직경 0.42m, 총중량 1200kg, 탑재중량 150kg, 최고도달고도 75km이며 로켓 추력은 86kN (약 8.7톤)의 제원을 가졌다.

 

뒤이어 2단 고체로켓인 KSR-II 개발에 도전, 1997년 7월 9일 서해 안흥시험장에서 발사되었다. 2단 분리까지 성공하고 예상 착수지점에 낙하했지만 탑재체로부터 관측 정보가 전송되지 못했다. 1998년 6월 2차 발사에서는 고도 137,2km까지 상승하여 발사지점에서 123.9km 떨어진 해상에 성공적으로 착수하였고 관측 임무도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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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SR-II 과학로켓-출처-kjclub.com

 

KSR-II의 길이 11.1m, 직경 0.42m, 총중량 2.2톤으로 소형 관측 로켓으로 1단 추력은 86kN(약 8.7톤)이다. 한국은 KSR-II를 통해 최초로 단 분리 기술, 페어링 분리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98년 8월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소식으로 인해 북한과의 격차가 더욱 커지자 정부는 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에 2005년까지 우주 발사체 개발을 지시하게 된다.

 

당시 항우연은 2010년 발사를 목표로 고체연료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보다 높은 추력을 필요로 하는 액체연료 로켓을 개발을 추진하게 되지만 미국과 맺은 미사일 지침이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미사일 사거리 격차가 커진 것에 대한 우리측 불안이 커지자 미국도 미사일 지침 개정에 합의하였고 2001년 미사일 지침이 개정되었고 이와 함께 민간용 액체로켓 개발에 대한 족쇄도 풀렸다.

 

첫 액체연료 로켓인 KSR-III는 1단으로만 구성되었고 2002년 11월 28일 충남 태안에 위치한 안흥 시험장에서 발사에 성공했다. KSR-III는 길이 13.5m, 직경 1.0m, 발사중량 5.6톤, 탑재중량 150kg의 제원을 가졌고 상승고도 42.7km, 도달거리 79km를 달성했다. 액체엔진 로켓은 128kN(약 13톤)의 추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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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 최초액체연료로켓 KRS-III-출처-한국항공우주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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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SR-III 구조-출처-yonseicos.subnara.info

 

항우연은 KSR-III를 통해 개발된 기술을 기반으로 2005년 무게 50kg급 저궤도 위성을 발사할 국산 발사체를 개발하는 한국형 우주발사체 KSLV-I (Korea Space Launch Vehicle-I)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2001년 3월 한국이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면서 평화적 목적의 로켓기술 도입이 가능해지자 정부 분위기는 대통령이 지시한 2005년이라는 기한을 지키기 위해 외국 기술 도입을 통한 개발로 선회하게 된다.

 

이런 정치적 연유로 인해 외국 로켓 선진국들과 기술도입을 위해 접촉 했지만 외환위기로 재정난이 극심했던 러시아만이 응해왔고 2001년 5월 기술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비협조로 협력기관 선정이 지체되다가 2003년 9월에야 후르니체프사를 공식 협력기관으로 선정할 수 있었지만 정부가 정한 2005년이라는 시한은 2007년으로 연기되었고 그 후 기술 이전 약속 번복과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협정 체결 요구로 인해 다시 목표 시점은 2010년으로 더 연기되었다.

 

러시아쪽 주계약업체인 흐루니체프사가 체계종합 및 발사/운용를 담당하고, 액체연료 엔진은 에네르고마쉬, 지상장비는 TsENKI사가 담당하기로 했다. 흐루니체프사가 제공하기로 한 1단은 신형 앙가라 로켓 개발을 위해 개발중인 RD-191 엔진을 기반으로 나로호에 최적화된 RD-151 엔진을 장착하게 되었고 실패시 3차까지 발사할 수 있도록 조건을 달았다.

 

2008년 8월 러시아에서 1단 로켓의 지상검증용 기체(GTV)를 인수하였고 2단 비행모델의 조립 및 검사를 완료하면서 본격적인 KSLV-I 개발이 진행되었다. 2001년 1월에는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나로도에 건립하기로 결정된 조립동, 통제센터, 발사대 등이 위치할 우주센터가 2009년 6월에 완성되었고 동시에 러시아에서 들여온 GTV를 이용하여 국내 업체가 개발한 발사대 인증시험을 완료했다. 그리고 로켓 이름이 공모되어 2009년 5월 10일 발사센터가 위치할 외나로도에서 따온 “나로(NARO)”가 확정되어 KSLV-I은 “나로호”로 불리게 되었다.

 

2009년 8월 25일 KSLV-Ⅰ은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과학기술위성 2호를 싣고 우주로 발사됐으나, 페어링 분리 이상으로 궤도 진입에 실패한 후, 2010년 6월 10일 2차 발사에도 실패했다. 그 후 실패 원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3차 발사를 결정하였고 2012년 10월과 11월 두 번의 발사취소 이후 최종적으로 2013년 1월 30일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나로과학위성을 궤도에 안착시켰다.

 

항우연은 우주발사체 기술 국산화를 위해 KSLV-II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형 발사체 개발사업으로 불리는 이 사업은 1.5톤급 실용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독자 발사체 개발을 2010년 3월부터 시작되어 2021년 8월까지 목표로 하고 있지만 최근 정치권에서 2018년까지 앞당기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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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형 액체로켓 발사체별 기술발전도-출처-한국항공우주연구원

 

KSLV-II는 전체길이 약 47.5m의 3단 로켓으로 1, 2단은 액체, 3단은 고체연료 로켓을 사용할 계획이며 3단 고체 로켓을 포함하여 1,2단 액체연료 로켓엔진까지 모두 국산화할 계획이다. 1단에는 2012년 7월부터 1단에 사용될 75톤급 액체엔진의 예비설계에 착수하였고 2018년 시험발사로 성능을 검증할 예정이다.

 

추력 75톤급 액체엔진은 KSLV-I과 마찬가지로 액체산소/캐로신을 사용하게 되며 4개를 묶어 1단에 사용할 계획이다. 이를 위한 선행연구로 추력 30톤급 액체엔진 개발을 추진하여 2006년 12월 연소기 등의 국산화하였고 2007년과 2008년 터보펌프와 가스발생기 연계시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엔진에 연료와 산화제를 공급할 산화제 탱크 및 연료 탱크 설계 제작 기술을 확보했다.

 

한국이 개발중인 우주발사체는 북한이 개발하고 있는 발사체가 미사일 발사체를 기반으로 하여 사용 하는 산화제도 구소련에서 미사일 등에 사용하였던 “적연질산”과 다르게 발사체에 주입 시 장기보관이 어렵지만 추진력이 월등한 액체산소(LoX) 산화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연료는 케로신을 사용한다.

 

이상으로 북한과 한국의 로켓 개발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선군정치를 위하여 미사일에 집중하고 있는 북한과 군사적 목적과 함께 국가 산업적인 면까지 보다 폭넓은 필요성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는 한국은 지향점이 다른 것만큼 틀린 길을 걸어왔다. 한국은 현재 로드맵대로만 추진된다면 몇 년 내에 북한의 로켓기술을 충분히 앞지를 수 있으며 이미 북한을 압도하고 있는 위성체 개발 기술과 합쳐서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내 개발 능력의 부족보다는 단시간에 성과를 내어 정치적 업적으로 삼으려는 정치권의 서두름이 문제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지속적인 투자와 기다림이라고 보여 진다. 그 결과는 “우주강국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스만 2015.05.21. 23:57
ㄷㄷㄷ 대단하시네요...ㄷㄷ 전 예전에 군인 때 간부가 압박으로 쓴 2차대전 요약본이 유일하게 밀리터리 관련 글 쓴건데...ㄷㄷ 내일 다시 정독해야겠다.
Profile image 폴라리스 2015.05.22. 00:27
감사합니다. ^^
하지만 제가 전문가가 아니기에 찾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허락된 시간이 적어서 나중에 보면 쑥쓰러울때가 많네요...ㅠ.ㅠ
볼츠만 2015.05.22. 00:22
은하 3호 발사당시 위성궤도진입실패가 맞나요? 출처마다 성공이라는 얘기도 있어서...
Profile image 폴라리스 2015.05.22. 00:24
궤도에 올라갔더라도 정상적으로 궤도를 돌면서 전파를 송신하지 않았으므로 실패로 보고 있습니다.
ImpMK 2015.05.26. 17:01
궤도 진입은 성공했지만 자세제어가 되지 않아 통제되지 않은 채 회전중인 상황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rofile image unmp07 2015.05.22. 01:34
인하대에 있는 로켓사진 필요하면 찍어드리겠습니다. 필요하면 말씀만해주세요
eceshim 2015.05.22. 07:14
이거 제 모교 교수님도 미사일 쏘니까 스리슬쩍 사라지시더니 다시 스리슬쩍 나타나시더군요.
그때 대충 이야기 하신게
"계네들은 일단 단거리 로켓을 만들어서 성공하면 그걸 묶어서 중거리로 만들고, 중거리 로켓이 성공하면 그거 묶고 2단 로켓 올려서 장거리로 만드는 식이라 아주 조잡하다" 라고 하시더군요.
마셜 2015.05.23. 21:18
와..제가 이런 글 쓰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Profile image 폴라리스 2015.05.23. 22:08
제가 처음 잡지에 글쓴게 2005년 7월 디펜스 타임즈에 KDX3의 MD참여논란 라는 글이네요......
그후로 월간항공에도 쓰고, 국방과 기술, 국방저널에 기고하면서 차츰 글쓰기 연습이 된 듯 합니다.
지금도 맨날 지적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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