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폭력 당한 기분

shaind | 기타 | 조회 수 1597 | 2017.03.11. 20:01

일본에서 법은 구체적인 지배의 수단이라는 측면만이 강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법의 집행이 상급자에게는 느슨하고, 하급자에게는 엄하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임팔 작전 중 항명하고 독단으로 퇴각한 사토 코토쿠 중장은 친보직인 사단장이었으므로 정신장애로 판정받는 것으로 끝났고, 츠지 마사노부와 같은 육대 은사의 엘리트 참모는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하여간 법을 지배의 구체적인 수단으로 보고 있으므로, 그 집행이 자의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러한 사회, 조직에서는 억압위양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했다. 이는 "위로부터의 압박감을 아래를 향한 자의의 발위에 의해 순차로 위양하여 전체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이라고 설명된다 (마루야마, 앞의 책). 이를 군대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사단장이 연대장에게 지나가는 말로 주의를 준다. 그러면 연대장은 대대장에게 잔소리를 한다. 대대장은 중대장을 질책하고, 중대장은 부하들을 집결시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결국 최후에는 영문을 모르는 이등병이 구타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물론 사단장이 연대장에게 지적한 문제는 어느 단계에서도 객관적으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적인 의식을 거치면서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얻어맞은 이등병 외에는 모두가 정체모를 만족감을 느끼게 되고, 조직은 다시 원활하게 움직인다. 몹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이등병도 1년만 지나면 그 후에는 때리는 입장이 될 것이므로 참게 된다. 이는 고질적인 '사적 제재'의 원인이기도 했다.

 

후지이 히사시, "일본군의 패인" p.388

 


대개 한국인이라면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의 삽질을 보며 약간의 만족감을 얻기 마련이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오히려 팩트폭력을 당한 기분이 든다. 위 인용문은 우리가, 그러니까 2003년에 입대한 내 세대가 - 요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다 - 흔히 보거나 전해들은 것에서 별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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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서양의 법전통은 그 출발선에서부터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동양에서 법은 주지하다시피 법가가 중국식 법치체계를 완성한 이래로 지금까지 지배자의 통치수단으로서의 법철학을 전수받아왔는데, 반대로 서양(시민사회전통을 말한다)에서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참여에 의한 입법의 전통이 강한 만큼, 사법에 있어서도 재판권에 대한 자발적 복종으로서의 법률의 전통이 강하다. (비록 '사회계약론'은 근대사상의 발명품이라 할지라도.) 동양에서는 상대적으로 공법과 행정법의 발달이 두드러진 반면, 서양에서는 사법(私법, 예컨대 민법)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동양에서 법원 내지 판관, 그리고 재판작용이란 국가의 강압력을 합목적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관료와 그 행정행위인 반면, 서양에서는 반대로 자유인 사이의 합의, 그리고 논리적·법적 정당성과 공정성에 대한 인민대중의 신뢰로부터 나오는 자발적 복종이 사법 재판권의 원천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서양에서 재판이란, 그 공정성과 합리성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바탕에 깔고 양 당사자가 합의로 그 사건을 재판관에게 맡겨 판결에 따르기로 하는 구조를 가지고, 또한 당사자들과 동등한 자격에 있는 '동료 시민'들(배심원들)의 의견을 묻게 되는 것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 오레스테스가 아테나에게 재판을 청하고 그를 뒤따르던 복수의 여신들이 아테나의 재판권에 복종하게 되는 이야기는 이런 서양 재판제도의 원형을 상기시킨다. 그런 문명적 원천에서 탄생한 서양 법문명에서 비로소 고위 법관 출신의 모 민사소송법 교과서 저자가 '설득노력없는 짧은 판결서'를 질타하기도 하는 것이다. (법관의 재판작용이 그저 국가 강압력 행사의 수단에 불과하다면 법관이 왜 당사자를 '설득'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공정성과 합리성에 대한 신뢰와 자발적 복종의 대전제로서, 사법부는 그 어떤 외부적 영향력으로부터도, 더욱이 국가권력으로부터도 최소한의 독립성을 띄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3권분립이 아닌 기초적인 수준의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요구는 몽테스키외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언급해 둔다.)

 

여담이지만 이상과 같은 이유로 최근에 중국 최고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은 서양의 잘못된 사상'운운했다는 최근의 기사는 매우 시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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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군에서 구태스러운 모습, 특히 구 일본군의 병영 폐습과 비슷한 행태가 발견될 때마다 '캬 역시 황군의 후예' 운운하는 반응이 나온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건 문제의 절반에 불과하다. 구 일본군 출신들과의 인적 연속성이 여전히 남아있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고, 특히 병사들의 세대 교체는 간부들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군의 구태스러운 모습은, 우리 군대만이 아니라 사회의 근간으로 되는 몇몇 구성요소들 가운데 구 일본제국과 공통되는 요소 - 사실 병영부조리가 일제의 전유물이 아닌 이상 이걸 이렇게 부르는 것조차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 가 있기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팩트폭력을 느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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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블로그에 쓴 글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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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Baccine 2017.03.11. 21:32

동서고금을 막론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가슴에 새겨야할 글인것 같습니다.

Profile image 네모칸 2017.03.11. 21:47
솔직히 일본군과 접점이 없는 중화민국군의 병영부조리가 국군 못지않게 가혹했다는걸 생각해보면 과연 국군의 병영부조리가 일제의 잔재인지 의구심이 들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아시아권의 문화에서 비롯된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Profile image whitecloud 2017.03.12. 00:20
원래 이상적인 상하란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 이였으나 지금에 이러한 가치는 흔적도 없고 오직 위아래의 엄격함만을 강조하는 이상한 체계가 되어버렸죠....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Profile image unmp07 2017.03.12. 01:00

뒷통수를 한대 떡 맞은 느낌이네요.

오홍이 2017.03.12. 13:38
그러니까 다른 형태의 정신론이긴 한데 하여간 장비고 뭐고 이전에 이기기 위한 조직의 사고방식이 중요하다는 건 최근들어 더욱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천상의기적 2017.03.12. 15:35
그래도 요즘 부모님 세대때 들었던 군대와 비교하면 그때보다 많이 바뀐걸 느끼기도 합니다. 아버지한테 들었던 군대는 정말 심하긴하죠.
k511 2017.03.12. 16:12

일본군의 계승자는 자위대가 아니고 한국군 ㅠㅠ

 

하늘에 계신 무다구치 장군님이 뿌듯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치블렌드 2017.03.12. 18:23
동의합니다. 이는 황군의 후예니 뭐니 하는 문제도 아니고 군대만의 문제도 아닌 동양 사회에 전반적으로 들어나는 동양식 사고관의 영향이라 봐야겠지요.
fatman1000 2017.03.12. 18:53

- 사회 문제나 사법 문제 이런 것을 제쳐두고라도 일단 나부터 구타나 가혹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정색하고 후임들이 그거 따라할지 않할지 모르니 의미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봐서는 황군이고 뭐고는 그냥 스테레오타입으로 주입받은 기억일 뿐 실제 상황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기도 거시기 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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