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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트루파노프,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의 제51군>

PKKA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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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군사사 저널 1982년 10월호에 기고된 예비역 상장 N. 트루파노프의 기사 겸 회상입니다.

 

스탈린그라드 반격 직전에서 당시 내가 지휘하던 제51군은 도시 남쪽의 사르파 호수 사이의 110 Km 정면의 방어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반격이 임박하자 제51군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르 받았다. 차차 호수와 바르만차크 사이의 좁은 틈에 기본적인 병력을 집중함으로서 루마니아 제4군의 방어를 돌파하애 제4 기계화 군단과 제4 기병 군단이 침투할 돌파구를 열고 플로도비토예, 베르흐네-차리친스키와 소베츠키 축선으로 주력을 투입해 나서 전선군의 기동 제대들과 함께 공세를 확대해 스탈린그라드의 적 집단을 포위하고 피시코바 강에서 아브하넬보를 따라 내부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제15 근위 소총병 사단이 제57군으로부터 와서 사르파 호수와 차차 호수 사이의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같은 야전군 소속의 제143 소총병 여단과 합세하여 루마니아 제4 군단을 두보비 오브라그 지역에 포위하고 전멸시켰다. 

 

공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특징이 나왔다. 이미 우리가 알듯이, 1942년 10월에 스탈린그라드의 적은 제62군과 제64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며 도시를 점령하려 했다. 이런 이유로 전선군에서 새로 오는 신병들은 제62군과 제64군에만 집중되었다. 그 결과, 제57군과 제51군의 부대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결정한 진격 지역에서 그 전력이 현저히 낮았다.1 제302 소총병 사단은 고작 2개 연대로만 구성되었고2 제91 소총병 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되 있었지만 각 연대 전력은 대대 수준이었다. 

 

 

사실 적도 스탈린그라드 남쪾에서 벌어진 전투 과정에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9얼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계속된 제51군과 제57군의 공세 작전의 특징은, 부족한 전력을 가지고 야간 작전 능력이 부족하며, 전투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루마니아군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마니아 제4 보병 사단에서 보낸 보고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 "병사들의 사기가 낮습니다. 병사들과 장교들은볼가 강에 벌어지는 전투에 왜 참여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3 이 때문에 나치 사령부는 루마니아군 사단들 뒤에 감시를 위한 분견대를 하나씩 붙여야 했다. (에라이 잉여들 -_-)

 

야전군 수준의 공세 작전은 10월 21일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전선군 사령관 예레멘코 상장은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스타브카의 계획을 숙지시키고 명령에 따라 기습을 달성하라고 지시했다. 이 날부터 우리 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올라갔다. 10월 초에 우리 제51군은 완편 사단이라면 모를까 야전군이라고 말하기 힘든 전력인 13,765명만 보유하고 있었다. N. V. 칼리닌 소장의 제91 소총병 사단과 Ye. F. 마카르추크 대령의제302 소총병 사단은 전력이 2,100명 이하였다.4 전력 증강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야전군에 D. S. 쿠로파텐코 대령의 제126 소총병 사단이 제64군에서 옮겨 왔고 Ye. I. 바실렌코 소장의 제15 근위 소총병 사단이 제75군에서 옮겨 왔다. 이 제대들은 각각 7,000명과 5,000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는 두 사단이 야전군의 주력이 되야 했다.

 

우리 군의 제1168 평사포 연대는 겨우 152 mm 포 4문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5문을 추가로 받았다.5 우리 군은 1105 평사포 연대(152 mm 36문)와 제85 근위 곡사포 연대(122 mm 36문)를 증강 받았고 제125 박격포 연대(120 mm 23문)도 증원받았다.6 제1246 대전차 연대(대전차포 14문)와 다른 두 대전차 연대(제491 연대와 제492 연대)도 대전차포 20문을 보유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티모페이 티모페예비치 샤프킨 중장의 제4 기병 군단과 스타브카 예비대인 바실리 티모페예비치 볼스키 소장의 제4 기계화 군단도 도착했다.


 

 

대규모 전력이 집결했다. 그 전력을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전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선 주 돌파 지역을 설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제126 소총병 사단과 제302 소총병 사단은 차차 호수와 바르마차크 호수에 전개되었고 기동 집단인 제4 기병 군단과 제4 기계화 군단이 제1105 평사포 연대와 제1168 평사포 연대로 구성된 포병 집단과 제80 방사포 연대와 제90 방사포 연대로 구성된 방사포 집단과 제2 제파를 형성했다. 

 

야전군이 주 돌파 지역에서 사단들은 차차 호수와 바르만차크 호수 사이의 적 방어를 돌파하여 전방 6~7 Km 일대이 구릉 지대를 점령하여 야전군 기동 집단이 교전에 들어가는 걸 지원할 것이었다. 이후 제302 소총병 사단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웃한 제91 사단의 좌익에서 적 제4 보병 사단을 패퇴시킬 것이었다. 

 

제4 기계화 군단은 공세 첫날 적 방어를 돌파한 후 공세를 소베츠키로 확대하며 내부 포위망을 형성할 것이었고 그 동안 제4 기병 군단은 블로도비토예와 아브가네로보를 향해 진격하며 외부 포위망을 형성할 것이었다. 

 

제126 소총병 사단은 전차 연대와 대전차 연대, 방사포 대대로 증강되었고 제302 소총병 사단도 전차 연대와 대전차 연대와 방사포 대대, 그리고 제85 근위 곡사포 연대의 2개 대대를 지원받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6 Km의 돌파 지역에서 Km 당 근접 지원 전차 13대가 배정되었고 Km 당 야포와 박격포 42문이 집중되었다. 이 지역에서 적이 방어 전면에서 Km 당 야포를 6~7문밖에 배치를 못하고 전차는 한 대도 없던 덕에, 우리는 루마니아 제1 사단의 제5 경보병 연대를 상대로 막대한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제51군이 루마니아 제1 보병 사단과 제4 보병 사단을 상대하기 전에, 그 전선에는 루마니아 제5 기병 사단, 제18 보병 사단, 독립 전차 연대와 독립 기병 연대가 있었다. 제18 보병 사단은 루마니아군 사단 중에서도 전력이 강력했는데 1942년 11월 7일에 막 전선에 배치되어 아군 제51군과 제57군의 전투 지겨언 사이에 배치되었다. 그 사단의 각 중대 전력은 200명이 넘었다.7 다른 사단들의 중대 전력은100~120명 수준이었지만 각 연대는 2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11월 20일의 아군과 적군의 상호 전력은 아래 표와 같았다.


 인력과 장비

제51군 

적 

비율 

 인력

50,561 

26,000 

1.9 : 1 

 전차

198 

80 

2.5 : 1 

 화포

255 

183 

1.4 : 1 

 대전차 화기

175 

111 

1.6 : 1 

 박격포

885 

199 

4.3 : 1 

 기관총

1,534 

960 

1.6 : 1 

* TsAMO, folio 22, inv. 451, file 163, sheets 9~10.

** Ibid., inv. 453, file 7, sheets 277~278

 

그러나 지형은 도상 연습을 해본 결과 적에게 유리할 수 있었다. 사르파 호수 서쪽의 문제는 적이 80~90m 고지의 구릉 지대를 점령하여 볼가 강 일대의 우리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작전의 첫 번째 국면은 모든 움직임을 밤이나 안개낀 날에만 새항하고 둘째로 우리가 공세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공세 동안 전차가 기동하기 적합한 길 사이의 두 고지를 적이 화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아군의 준비 포격에서 적 화점이 몇개라도 살아남으면 제4 기계화 군단의 교전 돌입이 강력한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기계화 군단이 실패하면 작전 전체가 실패할 것이었다.

 

이 때문에 상황을 확대시키기 위해 야전군 사령부는 신중히 작전 준비를 했고 적 화점 하나 하나를 찾아내 화력을 투사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 방어를 돌파할 방법을 찾았다.

 

야전군 참모진은 임박한 작전 준비을 위해 각 제대들을 조직했다.  제38 차량화 소총병 여단을 사르파 호수 남쪽에 전개시키고 제126, 302 소총병 사단을 잠시 예비로 돌려 10일 동안 작전 준비를 했다. 제15 근위 소총병 사단은 자신의 방어 지역에서 공세 준비를 했다. 한개 대대씩을 후방으로 보내 준비를 하게 하는 방법은 성공저이었다. 기병 제대들은 공세 진격로에서 준비를마쳤다. 기계화 군단은 후방 멀찍히 물러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이동했다.

 

공세의 시작에서 우리는 충분한 양의 탄약과 평소의 다섯 배가 넘는 유류를 확보해 지속적인 보급에 성공했다.

 

11월 19일 밤 동안 돌격 집단이 도약점에 도착했다. 제126, 302 소총병 사단은 제38 차량화 소총병 여단과 자리를 바꿨다. 그 날 동안 야전군 군사 위원회의 여단 정치 위원 A. Ye. 할레조프와 나는 전장에서 부대의 공세 준비 상태를 검열했고 저녁에는 야전군 사령부 관측소로 갔다. 여기서 우리는 참모장에게 전선군 정치 위원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와 전선군 부사령관 마르키얀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상장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8


 

야전군 참모장인 A. M. 쿠즈네초프 대령은 공세 마지막 날까지 공세 작전 준비를 감독하고 상황 정보를 공들여 모으고 작전술적 계산을 조율하며 관측소 조직을 심각히 조직한 것에 대한 찬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 덕택에 기계화 군단과 기병 군단은 따로 관측소를 차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선구 사령부 대리들에게 공세 준비 상태를 보고한 후, 나는 군단장들과 함께 관측소로 가며 야전군 참모부 작전과 과장 K. N. 야누시케비치 대령을 통해 참모장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내렸다. 이후 우리는 짧은 휴식을 취했다.

 

관측소에 있던 누구도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모든 것이 잘 되가고 있는 지 확인했고 압박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모두 다 갑자기 짙어지기 시작한 안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이걸 칼로 자를 수 있을 겁니다."

 

한 참모 장교가 안개에 대한 걱정을 농담 속에 감추며 말했다. 

 

안개는 갑자기 나타난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11월 20일 0600시에 정기적으로 확인하던 야전군 관측소와 볼가 강 사이의 통신이 갑자기 끊겼다. 야전군 통신감은 이런 상황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통신망이 끊기는 사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군단들과의 유선 통신이 끊겼고 전선군 사령부와의 통신도 끊겼다.

 

문제가 잔뜩 일어나고 있었다. 군단들은 감청당할 위협을 무릅쓰고 무선 통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0700시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제1 제파 사단들을 통제하는 건 가능했지만, 전선군 사령부와 통신이 끊기는 바람에 전선군의 결정을 알 수 없어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 포격 예정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포병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즉시 군사 위원회를 소집했다. 문제는 하나였다. 준비 포격을 계획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연기할 것인가? 누군가는 전선군 부사령관인 포포프 상장의 결정에 따르자고 주장했다.

 

우리가 전선군 부사령관에게 명령을 요청해야 하는가? 이건 논리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뜻은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지휘관과 더 상급 제대 참모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전쟁 경험은 상급 제대의 대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우선 지휘관은 자신의 계획을 보존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대리는 물론 계획을 취소할 권한이 있지만 이건 지휘관이 계획에서 완전히 없어진다는걸 뜻했다. 이런 상황은 로코솝스키 원수의 회고록 <군인의 의무>에 잘 나와 있다.9

 

그리하여 나는 군사 위원회 의장으로서 결정을 내렸다.

 

"준비 포격과 보병 공격은 각각 0730시와 0830시에 시작한다."

 

나는 군사 위원회 위원들과 기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명령은 할레조프 동지가 배포했고 나는 포포프 상장에게 결정을 보고했다. 포포프는 내 결정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포포프와 나는 전선군 군사 위원회 위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안개가 우리의 행동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적의 화력도 경감시킬 것임으로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포포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이 부대 지휘관이 누구요?"

 

"저, 트루파노프 중장입니다."

 

"그렇다면 지휘관으로서 결정을 내리시오."

 

할레조프와 나는 관측소로 돌아와 참모장과 각 지휘관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계획대로 준비 포격을 시작한다고 명령했다. 나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0730시가 되었다. 우리는 서서 포격 소리를 들었지만, 전장 전체가 너무 고요했다. 오직 포대 근처에 있던 1개 대대만이 포격 소리를 듣고 화광을 봤는데, 포격은 흡사 박수 치는 소리처럼 들렸고 화광은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포병 지휘관이 포대를 전부 통제하고 있는지, 그리고 모두 포격을 시작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야전군 포병 지휘관 N. I. 텔레긴 대령은 모두 계획에 따라 준비 포격을 하고 있지만 안개가 너무 짙어서 포격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수백문의 아군 포화가 적진을 때리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명중했는지 관측이 안되어 포격이 효과적인지 최소한의 판단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사단장들은 준비 포격 시간이 끝나 가자 포격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하면 되는지 결정을 내려 달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었다. 

 

이 몇분 간은 내게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만약 공격 명령을 내리면 나는 수천 명의 우리 병사들을 아직 제거되지 않은 적 화점 앞에 노출시킬 수도 있었다. 이것은 높은 손실을 뜻했고 작전을 전부 망쳐버릴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지휘관이 책임은 이렇게 막중하다. 지휘관은 적의 총탄을 직접 마주 대하지 않는 대신 자기 스스로를 의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 승리 믿음을 유지시켜야 하는 또다른 장벽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작전 준비를 한 만큼 그것이 헛되지 않았으리라고 믿었다. 공격은 계획대로 시작했다.

 

나는 사단장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나는 보병들이 공격 중이라는 건 알았지만 각 사단장들도 사단이 어디 까지 진격했는지 관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격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연대장들은 적의 최전방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병들의 보고로 확실한 것이 되었다. 

 

전선군 사령부 대리들도 걱정하고 있었다. 포포프 상장과 흐루쇼프 위원은 나와 작전 장교들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걱정은 이해할 만 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우리가 돌파구를 성공적으로 열고 있으며 우리의 사상자는 상당히 낮다고 보고했다. 실제 고작 전차 9대만 지뢰 지대를 돌파하다 손상을 입었다. 제302 소총병 사단의 손실은 작전 첫날 겨우 부상자 33명밖에 되지 않았다.10

 

0930시, 나는 사단장들에게 관측소를 전방 연대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 시간 동안 전선군과의 통신이 복구되어 나는 예레멘코 상장에게 즉시 상황을 보고할 수 있었다. 

 

상황 보고를 들은 예레멘코 상장은 격노해 내게 화를 퍼부었고 1시간 내에 공세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포포프 상장이 전화를 바꿨다. 포포프는 예레멘코와 어려운 대화를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선군 참모진이 이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계획대로 공세를 계속 하고 기계화 군단과의 조율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관측소로 돌아왔을때, 나는 안개가 옅어지고 있는 걸 봤고 우리 전차들의 진격선을 볼수 있었다. 한 사단장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는데 고지 점령 전투가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조만간 적의 감제고지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1100~1200시까지 소총병 사단들은 기계화 군단이 돌입할 돌파구를 만드는 임무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계화 군단의 돌파구 돌입은 지연되었고11, 1700시에야 기계화 군단은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1월 23일, 제 기계화 군단은 소베츠키와 카라치에서 남서 전선군 전차 부대들과 합류했다.

 

제15 근위 소총병 사단도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적을 완전히 포위하면서 제15 근위 소총병 사단은 제57군으로 소속이 전환되었다. 제52군은 완전히 외부 포위망을 형성했다.

 

11월 23일까지, 루마니아군이 지속적으로 손실을 입으며 허겁지겁 도망친 덕택에 미시롭카 강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원래 계획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12 전선군 사령관은 우리 군에 아스카이 쿠르모야르스키 강으로 이동해 코텔니코보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격은 200 Km 전면에서 시작했고 몇일 밤을 세워 가며 진격했다. 

 

12월 첫 열흘 동안, 우리 야전군은 계속해서 코텔니코보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과를 내지 못했다. 적은 새로운 부대를 보충받고 후퇴한 루마니아군 2개 군단을 동원해서 울의 포위망을 뚫을 강력한 돌파를 준비했다. 12월 10일, 우리는 방어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전군은 140Km 전면을 방어해야 했지만 3개 소총병 사단과 1개 기병 사단은 계속되는 전투로 약화되 있었다. 때마침 제8 전차 군단이 도착해서 도움이 되었지만, 제8 전차 군단도 전차 70대로 전력이 약화되 있었다. 방어 조직의 어려움은 우리가 성공적인 공병 운용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

 

12월 12일 아침, 적 집단은 중전차 대대로 강화된 제6 기갑 사단과 제23 기갑 사단으로 코텔니코보-스탈린그라드 철도를 따라 공세를 시작했다. 제302 사단은 공세를 막으려 했지만 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적의 주 돌파 지점을 추측하자, 나는 제8 전차 군단을 제302 소총병 사단에 합세시켰다. 아군은 3일 동안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후퇴하고 또 투회하다가 마침내 적을 아스카이 예사울롭스키 강에서 멈춰 세웠고 베르흐네-쿰스키 축선으로 방향을 돌리게 강요했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제대들은 위치를 지키거나 서서히 후퇴하여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적의 측면을 때리기 좋은 장소를 찾았다. 전체적으로 적은 한 주를 낭비했다. 베르흐네-쿰스키 지역의 제대는 전선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후퇴하며 적의 진격 속도 측전에 좋은 자료를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침내 안개가 모두 걷힌 미시코바 강에서 제2 근위군을 전개하는 걸 보장했다.

 

12워 24일, 제2 근위군과 제51군은 코텔키코보를 향해 총공세를 펼쳤다.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12월 31일에는 지모브니키의 살스크-스탈린그라드 철도선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42년 1월 1일에는 남부 전선군이 로스토프 작전을 개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제51군의 제대들은 스탈린그라드의 역사적인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제51군 병사들은 적 방어를 급격히 돌파하고 적 종심 깊숙히 침투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고 방어에서 과감함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다른 영웅적인 도시 방어에서처럼 뛰어난 군사 기술과 조국과 당에 대한 충성이 뭔지 가르쳐 주었다. 


  1. Voyenno-Istorichesky Zhurnal, No 11. 1978 p 27을 보라.
  2. TsAMO, folio 405, inv. 9848, file 3, sheets 50~52
  3. Ibid., folio 220, inv. 451, file 163, sheet 2.
  4. Ibid, folio 405, inv. 9848, file 3, sheets 2~10
  5. Ibid, file 3, sheets 15.
  6. Ibid., file 3, sheets 62-72.
  7. Ibid, folio 228, inv. 507, file 1, sheets 53.
  8. 이것에 대해서는 Voyenno-Istorchesky Zhurnal, No 2, 1961, pp 67-98을 보라.
  9. K. K. Rokossovsky, "Soldatskiy dolg", Voyenizdat, 1968, pp 129-130.
  10. TsAMO, folio 405, inv. 9848, file 53, sheets 487.
  11. 제4 기계화 군단의 교전 돌입과 작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려면, Voyenno-Istorichesky Zhurnal, No 2. 1961, pp 78-79를 보라.
  12. TsAMO, folio 228, inv. 507, file 1, sheets 61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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