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주제로 글을 올리는 곳입니다. (단, 이용약관 필독)
기타

P. A. 로트미스트로프, <베를린 작전에 대한 보고서>

PKKA 798

0

0

* 본문은 제5 근위 전차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로트미스트로프가 1946년에 발표한 보고서로 군사사 저널 1985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이 보고서는 1954년 편제 개편까지 유지되는 기계화군 편제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946년 4월 9~12일에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베를린 작전 연구를 위한 군사 과학 회의가 주독 소비에트 군 사령부에서 열렸다. 회의는 주독군 사령관 바실리 다닐로비치 소콜롭스키 대장이 주재했다. 총참모부, 보로실로프 참모대학, 프룬제 군사대학, 제르진스키 군사대학의 고위 장교들과 장성들 349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베를린 작전 참여에 대한 보고는 주독군 참모장 말리닌 상장이 보고했다. 그 뒤로 포병, 공군, 공병, 정치, 군수, 통신 병과 대표들이 보고했고 마지막으로 전차 병과 대표인 주독군 전차, 기계화 부대 총사령관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트로프 원수가 보고했다. 

 

아래부터는 로트미스트로프 원수의 보고를 요약한 것이다.

 

 





베를린 작전에서의 전차 부대 운용


1. 적의 방어 태세 


이미 알려져 있듯이, 베를린 작전은 바르샤바-포즈난 작전과 포메리아 작전의 연장으로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전차 부대가 중요한 역할을 한 작전이다. 독일 사령부는 우리가 퀴스트린 북쪽의 교두보에서 진격해 베를린을 동쪽과 북동쪽에서 타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적 부대 배치의 특징은 전차와 돌격포를 보병 전투 대형에 최대한 근접시켜 배치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적은 전차와 돌격포를 우리의 공세 첫날부터 교전에 돌입시킬 수 있었다. 이런 배치는 나치 사령부가 우리의 공세를 베를린 앞에서 멈춰세우고 싶었던 열망을 보여 줬다.소비에트 군의 대규모 전차 제대의 진격을 예상한 적은 베를린 지역의 방어를 주로 대전차 수단으로 채웠다. 

 

적은 소비에트 군이 대규모 전차 제대를 사용할 것을 예상함에 따라 베를린 지역의 방어를 주로 대전차 수단으로 체웠다. 적은 아군의 수색 정찰 수행을 미리 알기 위해 전차 관측소와 경보 체계를 조직했다. 적은 경계 초소들을 베를린을 둘러싸고 반경 50 Km 일대에 세웠다. 더 나아가, 베를린 방공을 위한 대공포들도 대전차 전투에 썼다. 인구 밀집 지역에는 휴대용 대전차 화기가 넓게 배치되었다. 

 

베를린 시가지 방어는 교차로와 산업 지대 마다 대전차 화점을 세웠다. 골목에 있는 주택은 화점으로 썼다. 주요 거리에는 바리케이트를 세웠고 그 앞에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를 매설했다. 주요 거리와 교차로와 골목 집에 있는 모든 구멍마다 소화기를 배치했다. 

 

적의 전방 방어선과 후방 방어선 양쪽은 대규모 야포와 대전차포, 박격포, 휴대용 대전차 화기가 꽉 들어찼다. 독일 사령부가 방어를 강력히 강화하고 완강히 방어할 만할 요새화를 달성한 상황을 주목해야 했다. 

 

베를린 지역에서 대전차 방어는 기본적으로 야포의 포화, 제1 방어선과 제2 방어선에 특히 많이 설치된 돌격포와 전차가 결합된 인공 장애물들(대전차 참호, 강, 운하와 지뢰 지대), 전차 예상 기동로에 대한 지뢰 매설, 전차 파괴 집단(판저파우스트 및 판저슈렉 사수들)의 전차 예상 이동로마다의 배치, 숲 지대의 방어 구축과 인구 밀집 지역에 대한 바리케이트 구축으로 구성되었다.

 

 

인구 밀집 지역간의 조밀한 통신망과 길에 설치된 수많은 인공 장애물은 전차 제대들이 적 방어를 돌파한 후에도 높은 템포로 기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구릉진 지역, 운하 같은 수로 장애물들, 대부븐 콘크리트로 건설된 건물들, 숲 지대 등은 적이 강력하고 깊게 제대화된 방어를 만들 수 있게 했고 진격하는 아군을 상대로 강력한 저항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베를린 작전은 전차 부대 작전에서 바르샤바-포즈난 작전과 많이 달랐다. 베를린에서는 작전술적 확대가 없었다. 적 후방 또한 우리 전차 부대가 기동하기 어려웠고 통신과 통제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실제 적의 후방은 베를린 서쪽에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작전술적 전과 확대를 위해서는 종심 100 Km 에 이르는 나치의 고착 방어를 돌파하고 작전 목표인 베를린을 점령해야 했다. 



2. 작전을 위한 전차 부대의 준비




1945년 3월 중순부터, 전선군의 전차 부대들은 장비와 함께 신병들을 대규모로 확충했다. 그 신병들은 전투에 참여해 본 적이 없거나 참여 했어도 인구 밀집 지역에서의 전투 경험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부대 전투 훈련은 1945년 1월과 2월의 전훈을 광범위하게 사용해야 했는데 이때의 전훈을 얻은 장소들은 베를린 일대와 지형이 완전히 달랐다. 작전 개시 일까지 남은 시간까지 전차병들과 차량화 소총병들은 강도 높은 소대급, 중대급 훈련을 계속 했다.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의 참모 연습에서는 특히 전투 과정에서의 참모 업무와 각 제대간의 조정 조직에 주의를 기울였다. 더 나아가 스타브카 예비대인 제7 근위 중전차 여단과 제67 근위 중전차 여단은 IS-2 중전차로 장비를 교체함에 따라 신 장비를 가지고 시가지 전투에 익숙해 지기 위한 전투 훈련을 계속 했다. 이 때문에 바르샤바-포즈난 작전에 참여한 바 있는 제11 근위 중전차 여단의 참모들이 제7 여단과 제67 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투 훈련 과정에서 소대-대대급 장교들의 훈련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여기서 주로 강조한 것은 하급 제대 사령부가 어려운 형태의 공세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작전 과정에서 많은 수로 장애물을 통과해야 함을 고려해서 모든 수준의 지휘관들은 교범적인 방법이나 임시변통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제병협동군은 근접 지원 전차들과 보병들의 협동 훈련을 수행했다. 고위 참모들(군단이나 야전군)은 적의 종심 깊이 제대화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상황을 가정한 일련의 지휘 참모 연습을 수행했다.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의 전투 훈련 결과, 전차병들의 전투 기술은 급격히 올라갔고 전투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전선군의 기계화 장비와 물자를 하역하는 역은 슈비부스, 토페르, 레펜 역으로 전선에서 20~80 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역들의 위치는 잘 조직된 하역 작업과 하역 지점에 댛나 항공 엄호를 통해 전차 제대들을 집결 지역으로 급격히 이동시키는 걸 보장했다.

 

기만과 기습을 위해서, 모든 열차들의 전차 운반(5~6량 열차의 첫 번째 차량은 제외)은 프라하-바르샤바 역에서 짚으로 쌓아서 위장했다. 열차에서 하역한 장비들은 근처의 숲에 집결해 주간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역의 검문소에 배치된 장교들은 하역 작업이 계획대로 은폐되고 있나 감독했다. 그룬베르크 북서쪽에 전차들이 집결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위해 제1 근위 전차군의 장비들은 하루 동안 가짜 전차들을 슈비부스 역에서 남쪽과 남서쪽으로 전진시키다 후퇴시켰다. 더 나아가, 가짜 전차를 싫은 열차들은 란츠베르크 역에서 동쪽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2개 전차군의 이동을 완전히 숨기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작전의 시작에서, 2개 전차군 소속이 아닌 군단급 이하 전차 제대들(제6 전차 군단, 3개 장갑 열차 대대, 제244 전차 연대는 아직 장비들을 수리중이었다) 제병협동군 사령부의 지휘에 들어가 근접 지원을 준비했다. 제6 전차 군단은 장비가 끝나는 대로 제3 충격군의 지휘에 들어갔다.

 

제2 근위 전차군과 제6 전차 군단은 포메리아에서 적 바익셀 집단군을 패퇴시키고 있었고 제1 근위 전차군은 적 단치히 집단을 무너트리고 있었는데 작전이 다 끝난 후 베를린 작전을 위해서 도약점에 집결했다. 제2 근위 전차군은 전력을 알트담 동쪽의 숲과 솔딘 남쪽으로 옮겼다. 제1 근위 전차군은 3월 4째주까지 차량과 철도의 혼합 행군으로 그디니아 지역에서 수베린 남서쪽(란츠베르크에서 남동쪽으로 25 Km)로 이동했다. 그디니아에서 도착한 장비들은 란츠베르크 역과 자노히 역에서 하역했다. 제6 전차 군단은 알트담에서 베를링헨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제6 전차 군단은 퀴스트린의 적 집단을 파괴하고 교두보를 확장한 후 퀴스트린 교두보 남서쪽에 남았다. 제병협동군들의 재집결 과정에서 전차 부대들은 교두보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1945년 4월 10일에서 14일 동안 모든 제대들은 근접 지원 집단을 지원하고 교두보에 배치했다. 4월 14일까지 이미 1,273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교두보에 집결했다. (제1 근위 전차군에 임시로 배속된 제4 전차 군단 전차들도 포함한다.) 도하 장비가 아직 덜 도착했기 때문에, 밤에 교두보에서 제대들을 행군시키는 데 정확한 조직을 만드는 게 핵심이었다. 

 

베를린 작전을 조직하며, 전차 부대의 도약적을 준비하는 광범위한 행동이 일어났다. 각 전차들과 자주포들은 밤 동안 전차호로 들어갔고 주간에는 위장한 채 행동을 멈췄다. 여기에 더하여, 지휘소들과 관측소들은 모두 교두보에 배치되었다. 전차군과 전차 군단의 공병 부대들은 최전방 방어선으로의 진격로를 개척했다. 

 

준비 기간 동안, 작전 수행을 위한 군수 지원에도 큰 관심이 쏠렸다. 특히 3개 탄약 수송 연대, 3개 유류 수송 연대, 5개 식량 수송 연대가 배치되어 탄약, 유류, 식량이 주가 되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 군사 위원회의 작전 지침 연구와 작전 지역에 대한 신중한 수색, 정찰이 끝난 후, 전차군 지휘관들은 작전 계획을 짰다.

 

제2 근위 전차군 사령부의 계획에 따르면, 돌파 시 전차군의 구성은 2개 제파였다. 최전선에는 강력한 선견대가 섰다. 전차군 주력은 우익인 제4 근위 전차 군단이었고 좌익은 제7 전차 군단이었다. 제2 제파는 제1 기계화 군단이었다. 전차군은 접근로 4개(군단 당 접근로 2개)를 설정했다. 전차군 예비대는 제198 독립 경포 여단, 제86 방사포 연대, 제6 근위 중전차 연대, 제16 독립 모터사이클 대대였다. 

 

제1 근위 전차군의 작전 계획은 구조 역, 돌게린 지역에서 제8 근위군이 구조, 젤로, 돌게린, 알트-말리슈 선에 도착한 이후 돌파에 참여해 휘하 3개 군단을 단일 제파로 투입시키는 것이었다. 우익은 제6 전차 군단, 중앙은 제6 근위 전차 군단, 좌익은 제8 근위 기계화 군단이었다. 제64 근위 전차 여단, 제11 근위 중전차 연대, 제19 자주포 여단이 전차군 예비대로 남았다. 전차군 포병 집단은 제197 독립 경포 여단과 제316 독립 방사포 연대였다. 각 군단마다 2개 접근로가 할당되어 총 6개 접근로가 되었다. 

 

제1 근위 전차군과 제3 충격군의 계획은 제병협동군들이 적 방어선에 뚫어놓은 돌파구를 5개 전차 군단과 1개 기계화 군단으로 확대하면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다른 기계화 군단(제1 기계화 군단)도 제1 제파로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하여, 공세 전면 22 Km 에서 전차와 자주포 1,570대가 동시에 전투에 돌입하고 Km 당 전차군 소속 전차와 자주포 71대가 돌파에 참여할 것이었다. 이건 제병협동군의 근접 지원 전차들을 제외한 숫자다. 

 

전차군의 총 작전 종심(베를린까지의 거리)은 65~70 Km (소총병 제대와 충돌하지 않기 위한 우회로까지 추산) 였고 진격 속도는 하루 당 32~35 Km 를 요구했다. 

 

제8 근위 기계화 군단은 제1 근위 전차군의 좌익으로 군단 주력을 차폐하고 스트로코 축선을 동시에 공격해 에르크너 동쪽의 숲 지대를 차단하고 베를린-프랑크푸르트-오데르 고속도로를 차단하여 베를린을 남쪽에서 공격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전차군들은 이런 방법으로 작전을 짜 제병협동군들이 작전 4일 차에 베를린에 도달하게 되 있기로 한 반면 이틀 만에 베를린에 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전차군들의 급격한 베를린 진공은 제병협동군들이 젤로 고지의 강력한 적 방어선을 얼마나 빨리 돌파하는데 달려 있었다. 


3. 베를린 작전에서의 전차 부대의 활동

 

1945년 4월 15일 밤 동안, 제2 근위 전차군의 제대들은 집결지이자 오데르 강의 도약점인 솔딘으로 이동했다. 제2 근위 전차군의 2개 여단이 알트 드레비츠에서 정확한 조직하에 도하해 전 전차군의 도약을 촉진했다. 

 

제1 근위 전차군은 란츠베르크 남쪽 12 Km 지점의 숲에서 나와 밤 동안 군단 선견대들을 먼저 보냈고 0600시에 본대가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베를린 작전의 시작에서 4월 15일 0600시까지 전 기갑 제대가 전투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집결지에 도착했다. 이 시간까지 제4 전차 군단, 제4 근위 전차 군단, 제7 근위 전차 군단, 제6 전차 군단, 그리고 제4 근위 전차 군단과 제8 기계화 군단의 선견대들이 교두보에 집결했다. 4월 16일 1400시까지 모든 전투 제대들이 교두보에 도착했다.

 

퀴스트린 교두보에 병력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이 지역이 개활지인 관계로 도약점에서 전차 제대들을 위장하는데 큰 어려움이 일어났다. 전차군 사령부와 전차 군단 사령부와 그 참모들은 도약점에서 병력 이동을 감추고 위장하려고 힘을 썼다. 전차들의 주된 위장 수단인 전차호 속에 숨는 방법은 적의 포화에 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준비 포격이 시작되자, 전차 군단 지휘관들과 전차 여단 지휘관들은 전차군 지휘관들은 제병협동군의 주 돌파 지역에 있는 소총병 사단 관측소에 들어갔다.

 

수색 정찰 과정에서 강화된 대대들이 적의 주 방어 지역 2~3 Km 까지 파고 들어가 적이 전술적 예비대를 투입시키게 강요했다.

 

수색 정찰의 수행은 전차 제대들의 다음 작전에서 보병에 대한 근접 지원을 수행하는 데 이점을 주었다. 우리는 지형지물과 적 대전차 방어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들을 획득했고 이 덕분에 적 지뢰 지대와 나치의 대전차 포화에 대한 손실을 예상보다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4월 16일 0530~0630시, 34~40분 후의 집중 포격 이후,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병협동군 제대인 제3 충격군, 제5 충격군, 제8 근위군이 퀴스트린 서쪽 교두보에서 뛰쳐 나와 근접 지원 전차 제대들의 지원을 받으며 총공세에 들어갔다. 돌파 지역에서 적의 최전선 방어 지역을 143개의 탐조등이 비췄다. 

 

돌파 지역 중심에서 제47군, 제3 충격군, 제5 충격군, 제8 근위군은 처음에는 약했지만 갈수록 강해지는 적의 저항을 상대하며 적의 제1 방어선을 돌파해 알트-부스트로-뉘트레빈-말노 선에 도달했다.

 

1600시, 제5 충격군 병력들과 제8 근위군 병력들은 젤로 고지를 따라 설치된 적의 제2 방어선에 도달했고 적의 강력하고 잘 조직된 저항과 맞닿트렸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는 그날 오후에 벌어지는 상황을 평가하고 제병협동군들이 젤로 고지의 적의 방어를 돌파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진격이 중지되는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 돌파 지역을 강화하기 위해, 사령부는 1630시에 제1 근위 전차군과 제2 근위 전차군을 제5 충격군과 제8 근위군의 돌파 지역에 투입했다.

 

전선군 사령부는 전과 확대 과정에서 전차군이 투입될 '깔끔한 돌파구'를 기다리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다른 한편으로 전차군의 진격 목표 종심이 충분하지 않고(교두보에서 베를린까지 65 Km) 오데르 강에서 베를린까지 적이 설치한 방어선이 기동 부대의 넓은 기동을 막는다고 보아 전차군들을 적 방어선 돌파에 투입시켰다.

 

그 무렵, 전차군 사령부는 돌파구 확장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군단 선견대들은 전투 준비 상태를 유지하며 수색 부대들을 보병들과 같이 전투에 투입시키는 동안 소총병 제대들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전방 관측소들의 통신망은 선견대, 군단 참모부, 야전군 참모부에 설치되어 상호 통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병협동군 수색 부대들이 확실히 조직되어 전차 부대와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차군 본대는 선견대 뒤에서 이동했다. 

 

제2 근위 전차군 사령부는 전선군 사령부의 명려을 받자 2개 전차 군단(제4 전차 군단과 제7 전차 군단)을, 제1 근위 전차군 사령부는 선견대와 선봉 여단들을 제5 충격군과 제8 근위군의 공세에 돌입시켜 적의 방어를 뚫고 보병을 우회하며 진격 축선을 유지하며 베를린 축선으로의 공격을 확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전차군들은 적의 제2 방어선에 도달할 때 까지 적의 완강한 저항을 상대해야 했다.

 

1900시에, 전선군 사령부는 밤에도 공세를 계속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 방어를 완전히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적 방어는 계속 강력함을 유지했고 아군은 돌파구를 열지 못하여 4월 17일 아침까지 지지부진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전차군들은 제병협동군들과 공조하여 계속해서 야간 전투를 치렀고 17일 1200시에 제2 근위 전차군은 중요하지 않은 지형인 뉘치게르트, 뉘트레빈, 구조프로 제4 전차 군단과 제7 전차 군단을 진격시켜 적이 지형 지물에 의지한 대전차 방어선을 만든 프리란데슈토름과 알테-오데르 강에 도달하게 했다.

 

제1 근위 전차군은 4월 17일 밤 동안, 모든 화포를 최전선에 보내고 제8 근위군과 공조하여 1000시에 30분간의 준비 포격 후 젤로 고지를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사령부는 젤로의 적 전선을 공격하며 경사가 급해 전차 작전이 힘든 지형 때문에 손실이 커지자 제6 근위 전차 군단과 제8 근위 기계화 군단이 자리를 지키는 동안 제6 전차 군단을 고지 북쪽 외곽으로 이동시켰다.

 

진격 속도는 계속해서 심각하게 낮았고 적의 중간 방어선들은 완강한 상황이었다. 전선군 사령부는 야전군 사령부에 진격 속도를 올리라고 채근했다. 

 

주 돌파 축선에서 제47군, 제3 충격군, 제5 충격군 제대들은 제2 근위 전차군과 제6 전차 군단 제대들이 17일에 수로 장애물을 도하하고 교두보를 확보하는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18일에 진격 속도가 너무 느려졌지만, 전차 제대들과 함께 더 성공적으로 돌파를 확대했다. 전차 제대들이 수로 장애물을 넘느라고 손실 속도가 증가하는 상황은 진격 속도가 저하될 것을 알려주었다. 전차들의 정지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2 근위 전차군 사령부는 17일에 좌익인 제1 근위 기계화 군단을 알테-오데르 강 도하점 확보에 투입하고 제7 근위 기계화 군단의 진격 축선에 투입시켰다. 제1 근위 기계화 군단의 전투 돌입은 기계화 부대가 전차 부대보다 어려운 지형 상황에서도 기동성을 유지함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 기계화 군단은 팔르타코, 구조프의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알테-오데르 강과 필레스 강의 도하점을 점령하여 제7 근위 전차 군단이 18일 동안 돌파구로 돌입할 기회를 주었고 제48 근위 전차 여단을 보내 제1 기계화 군단과 공조하게 했다.

 

제1 기계화 군단이 슈토베로 강을 도한한 후, 제7 근위 전차 군단은 그 뒤를 따라 2100시에 리겐발데 북동쪽의 숲에 완전히 집결했다.

 

리겐발데 강에 제1 기계화 군단과 제48 근위 전차 여단이 집결하며 제4 근위 전차 군단의 좌익에서 적의 저항이 수그러들었고 북서쪽으로 철수했다. 제4 근위 전차 군단은 17일 1200시에 프리란데슈트롬 강에 도달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도하점을 확보하기 위한 효과적이지 못했던 격렬한 전투에 휘말렸다.  제1 기계화 군단의 선견대인 제33 차량화 소총병 여단은 6.2 고지의 운하인 크바펜도르페르를 심각한 손실 없이 도하하고 18일에 바즐로에서 북동쪽으로 1 Km 지점인 66.3 고지(메글린 동쪽)에 도착했다. 

 

4월 19일 동안, 제2 근위 전차군 병력들과 제6 전차 군단은 전차 작전과 기동에 상대적으로 적합한 지역에 들어서 힘든 전투를 치르며 30 Km 를 진격했다.

 

제1 근위 전차군 전선이자 제8 근위군 전선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제1 근위 전차군의 우익과 중앙은 퀴스트린-베를린 고속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있었다. 전차군 좌익이 적의 계속되는 반격을 받아치고 적의 예비대를 공격하며 디데르스도르프 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우익의 진격에서 전차군은 좌익의 전선이 늘어지게 강요받았다. 4월 19일, 적은 마지막 예비대인 제23 SS 기갑척탄병 사단을 아군의 좌익에 투입했다.

 

20일과 21일 동안, 전차 제대들은 40 Km를 진격했다. 제1 근위 전차군은 이 시기 동안 제2 근위 전차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진격했다. 제1 근위 전차군의 작전 지역은 서로 연결된 호수와 운하들 때문에 기동이 매우 힘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제69군이 뒤쳐짐에 따라 제1 근위 전차군의 좌익이 노출되자 전차군 사령부는 전력을 남쪽으로 돌려 프랑크푸르트의 나치 부대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4월 21일까지 제1 근위 전차군은 베를린 외곽의 요새 지대를 지나 슈트라우스, 슈세니츠, 디메르츠 호수를 건너고 베를린을 둘러싼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장악했다. 

 

그리하여 바르샤반-포즈난 작전과 달리 베를린 작전의 첫단계에서 전차와 기계화 부대들은 오데르 강에서 베를린까지 잘 조직된 적의 방어를 상대해야 했다. 적은 종심 65~70 Km 에서 강력히 요새화된 8겹의 방어선을 준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차군과 전차 군단들의 대규모 기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제병협동군들은 그들 제파만으로 나치의 방어를 돌파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전차들은 적의 뛰어난 휴대용 대전차 화기 운용과 전차 운용 때문에 보병 지원 없이 싸울 수가 없었다. 전차군 전력은 보병과 밀접히 공조하며 돌파구를 열 수밖에 없었다. 돌파에서의 전차군 운용과 제병협동군들의 뒤이은 공격 증가는 적의 전 방어 종심을 돌파하는 충격 집단을 만들게 했다. 

 

전차 제대들은 아군이 연속적인 화력 투사 계획의 결과로 적의 지휘가 무너지고 혼란에 빠진 결과로 적의 방어 종심 20~40 Km 를 돌파한 후에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공세에서의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차 제대들의 기동이 제한된 것이었다. 삼림 지대와 수많은 자연적, 인공적 대전차 장애물이 깔린 상황에서 기계화 군단들(제1 기계화 군단과 제8 근위 기계화 군단)은 뛰어난 효율을 보여주었다. 

 

베를린 요새 지대의 외곽 지역에서의 전투 동안(4월 21~22일)진격 부대들이 대도시에서 충분히 유연하지 못하게 싸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베를린으로 접근하는 시기에 병력들은 전선군 사령부의 시가전 전투 지침에 따라 병력을 빨리 재조직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느려졌다.

 

전선군 사령부는 우리 부대가 이렇게 진격 속도가 계속 느리면, 적이 상황을 회복하고 도시의 방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염려했다. 4월 22일, 사령부는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24시간 꼬박 베를린에서 싸울 충격 소부대들을 전차 소부대도 포함해서 편성하라고 명령했다.

 

전선군 사령부의 지시를 받자, 야전군들은 전투 제대들을 재편성해 전차를 동반한 보병 충격 집단들을 구성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대도시에서의 공세는 우리 부대들의 전투 형태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충격 집단들은 전투 제대의 중심적인 유형이 되었다. 작전 준비 기간에 편성된 전차군의 충격 집단들은 작전 시작에서 실제로 도시에 접근하며 격렬한 싸움에 휘말리며 분리되었다. 전차 충격 집단들은 전투 과정에서 전력을 회복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전차군이 적절한 보병 지원이 없어 충격 집단의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제병협동군의 충격 집단들은 소속 전차 군단 전차들과 근접 지원 집단으로 구성되 강화되었는데 보병이 주가 되고 전차가 지원을 하는 방법이라 도시에서 강력한 안정성을 보여 주었다. 이 상황은 전차의 충격 집단들이 도시에서 보병과 전투 공병의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 적의 휴대용 대전차 화기나 기타 근접 대전차 화기에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해 줬다. 대조적으로, 대전차포나 전차가 돌격 집단을 따라다니며 근접 지원을 해 주는 것은 적의 화점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는데 큰 효과를 보였다.

 

 

돌격 집단의 중기관총이나 대전차총은 별 효과를 내지 못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기동성을 떨어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가지에서 싸우는 돌격 집단들은 중화기를 장비하는 것보다 전차나 포병의 근접 지원을 받으며 싸웠다. 충격 집단을 지원하는 전차 부대들은 차단 집단과 지원 집단으로 나뉘었다. 각 집단 전차들은 길 양쪽을 따라 가며 화력을 지원했다. 자주포들은 전차들 뒤에서 진격하며 건물마다 직사 화력을 날리며 적이 화점이 발견되는 대로 무력화시켰다. 전차들은 높은 건물마다 30~40 m 거리에서 전차포를 발사했다.

 

 

방공포들은 차량에 실려 자주포 뒤에서 이동하며 살아 남은 건물 옥상 위의 적 화점들과 창문에서 튀어나온 휴대용 대전차 화기들을 제거했다. 건물마다 틀어박혀 저항하던 적들은 이 과정에 따라 분쇄되었다. 박격포들은 건물 옥상들마다 화력을 퍼부었다. 보병들과 전투 공병들은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건물 잔해들과 바리케이드를 치워 전차들의 기동로를 열었다. 

 

베를린 작전에서의 시가전 전훈은 충격 집단에 전차 4대 이상을 배속시키면 뒤의 전차들이 시계가 제한되는 바람에 비효율적이라는 걸 보여 주었다. 

 

 

베를린 중심으로 갈수록 전차들은 수많은 바리케이드들과 파괴된 건물 잔해 때문에 진격을 제한받았다.

 

 

4월 27일과 28일은 베를린 전투의 전환점이었다. 제 근위 전차군은 진격에 큰 진전을 보였다. 제1 근위 전차군은 제8 근위군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인 제3 근위 전차군과 공조해 쇤베르크 거리의 동쪽을 점령했다. 그 동안 제8 근위 기계화 군단은 란트베흐 운하의 남안과 티어가르텐 공원에 도달했다. 제4 근위 전차 군단은 제47군의 보병들과 함께 4월 27일까지 포츠담을 점령했고 텔토프 축선 동쪽에서 공세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4월 29~30일 동안 베를린 전투는 특히 격렬한 상황이 되었다. 진격 부대는 적의 절망적인 저항을 무시하고  성공적으로 진격해 베를린의 적을 포위하고 계속해서 목을 옥죄었다. 

 

진격은 5월 일까지 게혹되어 제1 근위 전차군과 제8 근위군은 제2 근위 전차군과 합류해 5월 2일 0600시에 연결했고 제3 충격군은 제4 전차 군단과 티어가르텐에서 제8 근위군 병력과 연결했다. 베를린의 적군은 세 부분으로 고립되었다. 


결론 

 

 

소비에트 군이 대조국 전쟁에서 수행한 모든 공세 작전들의 대규모 전차 제대 운용에서 전차군이 원칙대로 제병협동군이 뚫어놓은 돌파구로 돌입해 작전술적 종심에서 전투를 치른 것과 달리, 베를린 작전에서는 전차군들이 매우 어려운 지형과 적의 강력한 요새 방어 종심 65~70 Km를 직접 돌파했다. 이 상황에서 전차군들은 최초로 적의 종심 방어 돌파에 동원되었다.

 

삼림 지역에서, 자연적, 인공적 대전차 장애물과 나치의 강력한 야포와 대전차포 화력 체계는 전차 제대들의 진격 속도를 떨어트리고 돌파 동안 제병협동군의 보병들과 계속해서 긴밀히 협조하게 강요했다.  

 

베를린 작전에서 기계화 군단들은 적 방어 돌파와 시가전에서 더 많은 보병을 가진 만큼 더 강력한 효율을 보여 주었다. 이 때문에 기계화 군단들은 전차 군단들보다 제대화된 적 방어 돌파와 시가전에서 더 큰 효율을 발휘했다.

 

베를린 전투에서, 충격 집단들은 기본적으로 전차 제대와 기계화 제대 병력들로 구성되었다. 각 전차 여단에 보병이 부족한 결과로 전차 20대 이상을 가진 충격 집단을 2~3개 이상으로 만들지 못했다.

 

베를린 작전에서 적은 휴대용 대전차 화기와 기타 근접 전투 화기를 대규모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전차들은 독자적으로 싸우면 큰 손실을 입었고 보병들이 항상 전장을 청소해야 했다.  


 

베를린 작전에서 전차 제대들은 수로 장애물을 건너며 자주 연막을 사용해 적의 공습을 막고 움직임을 은폐했다. 도하에서의 연막 사용의 오점은 연막이 너무 좁은 지역에만 집중되었고 가짜 도하 지점에는 살포하지 않은 것이었다.

 

베를린 작전에서 전차 제대들이 작전술적 전과 확대가 불가능한 전장 상황 때문에 진격 속도는 빠르지 못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제병협동군 제대들의 낮은 진격 속도에도 영향을 줬다. 전차 제대들이 느리게 움직인 걸 비난할 수 없다. 작전의  전체적인 상황이 임무 완수에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상황은 전차 제대들이 4월 16일에 돌파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제병협동군들과함께 종심 배치된 적 방어를 돌파하는 준비를 미리 하지 못한 것과, 제5 충격군과 제8 근위군과의 공조가 충분히 확실하게 할 수 없던 것도 설명해 준다. 전차 제대들이 보병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적의 강력한 방어를 돌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종심 깊고 신중히 배치된 적 방어선의 존재는 전차군을 제병협동군과 함께 적 방어를 돌파하며 주 돌파 지역에서 보병의 공격 비율을 증가시키기게 했다. 이 경우, 전차군이 대도시에서 전투를 벌일 때 독립된 진격 장소를 할당받으면, 작전 준비 기간 동안에 많은 소총병 제대들과 합동 훈련을 하고 충격 집단을 구성하는 게 필요했다.

 


베를린 작전은 전차 제대들의 급격한 기동과 재편성 수행에서 건설적이었다. 이 경우에 전차 여단이나 기계화 여단은 적 방어를 돌파하거나 수로 장애물을 도하할 때, 그 성공은 전 군단의 성공을 좌우했고 나머지 제대들은 전위 여단이 뚫어놓은 돌파구로 들어갔고 이후 원래 예정된 기동로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항, 군단의 성공적인 행동은 다른 전차 군단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 작전은 전차 제대들이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수로 장애물을 도하했다는 것에서도 건설적이고 특징적이었다. 모든 제대들이 동일한 도하 장비를 일괄적으로 장비해 잡다한 종류의 도하 장비를 장비한 것보다 성공적으로 도하를 수행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사실에서 모든 제대들은 동일한 장비를 장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끝-


신고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공지 2023년 하반기 개편 안내 (레벨 시스템 추가) 9 Mi_Dork 23.07.13.09:07 +1 4239
공지 밀리돔 후원 요청 (2023-06-23) 28 운영자 14.01.24.20:42 +13 39093

밀리돔 | milidom 의 저작물은 다음의 사이트 이용 약관 에 의거해 이용 가능합니다.
이 라이선스의 범위 이외의 이용허락은 운영진에게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