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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크럽첸코,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전차, 기계화 부대 운용 특성>

PKKA 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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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쿠르스크 전투 특집호인 군사사 저널 1983년 7월호에 기고된 기사입니다. 

 

 

쿠르스크 전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측이 전차들을 유래없이 대규모로 운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군의 방어 교전 수행 과정에서 양측은 도합 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돌격포)를 운용했다. 말리놉스키 원수는 이렇게 논평했다. "쿠르스크 전투는 그 완강함과 격렬함에서 그 어떤 전투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중대한 전차전들에서 양쪽은 서로를 압도하기가 힘들었고 두쪽 다 심각한 전차 손실을 입었다. 이 끔찍한 전투에서 나치 독일군의 중추가 무너졌다."1

 

성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나치 사령부는 14개 기갑 사단을 쿠르스크 지역에 집결시켰다. 이 사단들은 전선에 배치된 독일의 기갑 사단 중 70%였다.2 공격 집단에는 나치 친위대 최강의 사단들인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이 있었고 독일 국방군 최고 명문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 척탄병 사단도 있었다. 적은 기갑 부대를 신형 중전차 티거와 신형 중형 전차 판터, 신형 구축전차 페르디난트로 강화했다. 1943년 7월 초에 나치군은 쿠르스크 북쪽에 전차와 돌격포 1,200대를, 남쪽에는 1,500대를 배치했다.2

 

스타브카는 적의 공격을 막고 후속 공세 작전을 신중히 준비했다. 개선된 전투 장비들이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에 배치되었다. 새로운 전차와 자주포 부대들이 조직되었고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의 숫자가 들너았으며 그 조직력도 향상되었다.

 

1943년 여름이 시작될 때 4개 전차군이 재조직되었고 7월에는 모든 전차군이 개편되었다. 

 

임박한 교전 환경을 고려하며 스타브카는 7월 1일에 제1 전차군, 제2 전차군, 제5 근위 전차군을 쿠르스크 돌출부에 집결시켰다. 이후 돌출부에 막 조직된 제3 근위 전차군과 제4 전차군이 도착했다. 쿠르스크 지역에 15개 독립 전차 군단과 독립 기계화 군단이 배치되었으며 기타 수많은 독립 전차 여단들과 연대들도 집결했다. 방어 교전의 시작에서 보로네시 전선군과 중부 전선군, 스텝 전선군이 보유한 전차와 자주포의 총 숫자는 4,995대로 그 중 반이 전차군 소속이었다. 3

 

전체적인 기갑 장비의 숫자는 우리 군이 우세했다. 돌출부 북쪽에서 소비에트 군은 적에게 전차와 자주포에서 1.5배의 우위를 가졌고 남부에서는 1.1배의 우위를 가졌다. 그러나 양측의 기갑 전력을 더 정확히 평가하려면 1943년 여름에 소비에트 군이 아직 많은 수의 경전차를 전투에 운용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의 전차와 자주포 3,444대 중 900대 이상이 경전차였다.4예를 들면 제1 전차군 전력의 25%는 경전차였다.5 독립 전차 제대들의 경우 30%가 경전차였다.6 그리고 최근에 조직된 전차군의 참모들이 아직 부대 통제에 충분한 경험이 없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방어 교전에서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의 전차군들과 독립 전차, 기계화 군단들의 운용 목적은 다양한 축선에서 반격을 가하고 적의 예상 공격 축선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기동 제대들은 방어 종심 30~50 Km 뒤에 배치되었다. 독립 전차 연대와 독립 자주포 연대, 독립 전차 여단은 야전군, 소총병 군단, 소총병 사단의 기동 예비가 되었다. 기동 제대들은 제2 방어 지역과 제3 방어 지역 중간에 배치되었다. 이 경우 제1 제파 소총병 사단들의 대전차 장비가 부족하면 전차들과 자주포들이 주 방어 구역에 들어갔다.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들은 방어 교전을 위해 신중히 준비했다. 전차 부대들의지휘관들과 참모들은 소총병, 포병, 공군, 공병 지휘관들과 모여 도상 연습을 곗혹 했고 진격하는 적에 대한 모든 반격 가능 수단을 연구했다. 임박한 작전을 위한 정치-사기 지원도 병행되었다. 정치 부서들의 주요 업무는 전차병들이 다가올 전투가 조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환점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전쟁에서 자주 그랬듯이 방어 교전의 과정에서 스타브카는 전차, 기계화 부대를 운용하는데 새롭고 생각 못한 결정을 내렸다. 특히 제2 전차군과 제1 전차군 운용에서 이 사실이 드러났다. 두 전차군은 다양한 방향에서 적에게 역습을 가히기로 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 작전에서 불행하게도 안정적인 방어를 위한 적절한 공병 조직이 계획되지 않았다. 공병들의 작업은 격렬한 전투 중에 완성되었다.

 

독일군의 공세 첫날, 적은 중부 전선군을 상대로 한 강력한 기갑 공세로 제13군의 주 방어 구역을 돌파했고 그날이 끝나갈 때 아군 종심 6~8 Km를 파고들었다. 이 상황에서 전선군 사령부는 7월 6일 아침에 강력한 역습으로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제13군의 제17 근위 소총병 군단이 A. G. 로딘 중장의 제2 전차군 소속인 V. E. 그리고리예프 소장의 제16 전차 군단과 전선군 예비대인 I. E. 바실리예프 소장의 제14 전차 군단이 제2 전차군 소속이 되어 역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부족한 전력,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 각 병과간 조정을 위한 시간의 부족, 약한 공병 지원과 제14 기갑 군단이 갑작스럽게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제13군의 상황을 회복한다는 목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같은 시기에 이 역습은 중부 전선군의 방어 작전 과정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비에트 군은 적을 압박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위협했다. 전선군 사령부는 이 역습을 통해 위험한 지역에 새 병력을 집중시킬 시간을 얻었다.7 적은 전선군의 제2 방어 구역에서 멈췄고 손실을 입으며 올호바트카 지역에서 공세를 재개할 기회를 잃었다. 제2 전차군의 반격 이후 모든 제대들이 방어에 들어갔으나 독립된 방어 구역을 받지는 않았다. 제2 전차군은 제14군 제대들과 공조해 쿠르스크 돌출부를 북쪽에서 돌파하려는 적의 기도를 막아 냈다.

 

보로네시 전선군 지역에서도 강력한 전차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 첫째 날까지 적은 현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제6 근위군의 방어 지역을 위협하고 제6 군위군을 후퇴하게 강요했다.8 이 상황에서 전선군 사령부는 전차군과 예비 전차 군단들을 운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미리 예정된 역습 계획과 달리 전선구 사령부는 미하일 예피모비치 카투코프 중장의 제1 전차군과 제2 근위 전차 군단, 제5 근위 전차 군단을 제6 근위군의 제2 방어 구역으로 보내 제6 근위군과 공조해 우선 방어를 안정시킨 후에 적이 멈췄을 때 반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새 지역으로 완전히 이동하기 위해 제1 전차군은 7월 6일 아침에 제6 근위군의 제2 방어 구역 전면 30 Km를 따라 제4 전차 군단과 제3 기계화 군단을 제1 제파로 멜로보예, 야코블레보 선에 배치했다. 제31 전차 군단은 제2 제파였다. 전차군의 좌익인 루치키 지역은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크랍첸코 중장의 제5 근위 전차 군단이 배치되었고 고티체바 지역에는 A. S. 부르데이니 대령의 제2 근위 전차 군단이 배치되었다. 

 

종심에서 방어 구역을 유지하기 위한 규모 전차 제대의 운용은 전차 제대의 작전술적 운용의 새로운 효과를 보였다. 이리하여 작전술적 방어를 안정되었고 좁은 전면에서 적의 대규모 기갑 부대 진격을 받아치기가 가능하게 했다. 

 

7월 6일 아침, 적은 공세를 재개하고 새로운 부대들을 교전에 투입하면서 제6 근위군의 방어를 무너트리고 돌파구를 작전술적 수준으로 확대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아군 전차들의 강력한 방벽이 적의 기갑의 파도를 막아세웠고 적은 쿠르스크로 가는 최단 거리에서 돌파구를 열 수가 없었다. 

 

전차 제대들은 전차호 속에 엄폐한 전차들과 엄폐하지 않고 계속 기동하는 전차들을 조합시켜 싸웠다. 이를 통해 적 포병과 공군에 의한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우리 군의 행동을 제한시키는데 성공한 후에는 아군 공병 준비의 부족 때문에 전차호가 부족했기 때문에 아군 전차들의 생존률이 저하된 것도 지적해야 한다.

 

쿠르스크 방어 전투의 절정은 프로호롭카 지역에서 7월 12일에 벌어진 교전이었다. 쌍방은 모두 합쳐 전차와 자주포, 돌격포 1,200대를 동원했고 그만큼 많은 항공기를 동원했다. 독일 국방군에서 가장 경험 많은 기갑 부대 지휘관인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독일 제4 기갑군에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트로프 중장의 제5 근위 전차군이 역습을 가했다. 적은 프로호롭카에서 멈춰섰고 물러났다. 이 전투의 격렬함과 치열함은 적이 여기서만 전차 400대를 상실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역자 왈: 속지마, 프로파간다야!!) 우리 군도 막대한 손실에 고통받았다. 쿠르스크 전투 과정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들은 치열했지만 프로호롭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차전이자 쿠르스크 전투의 전환점이었다. 

 

소비에트 군의 방어 교전에서의 승리는 오룔과 벨고로드-하리코프 지역에서 반격을 하기 용이한 환경을 만들었다. 공세 작전의 과정에서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들은 풍부한 전훈을 얻었다. 전차와 기계화 부대를 공세에서 운용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독립 전차 연대들, 독립 전차 여단들, 독립 자주포 여단들은 소총병 사단에 할당되어 중앙화된 방법으로 소총병 부대를 근접 지원했다. 근접 지원 전차들과 자주포들의 밀도는 증가했다. 예를 들면, 제11 근위군은 Km 당 전차와 자주포 20~30대를 사용했다. 

 

독립 전차 군단들과 독립 기계화 군단들은 제병협동군의 기동 집단이 되었다. 전차군은 기본적으로 전선군의 기동 집단으로서 전술적 성공을 작전술적 성공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새로운 유형의 전차군을 전선군 수준의 공세 작전에서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몇몇 문제는 자연스럽게 나온 실수와 결점에 상처를 입으면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상황은 오룔 공세 작전에서 나왔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파벨 세묘노비치 리발코 중장의 제3 근위 전차군은 오룔 공세 작전에서 7월 19일에 교전에 가답했다. 23일동안 제3 근위 전차군은 독자적으로나 아니면 제병협동군과 협동하여 결과적으로 적 방어를 7개 지역에서 돌파하고 강을 두번 도하했다. 작전이 확대될 수록 제병협동군의 진격을 보장하기 위해 스타브카는 자주 진격 방향을 바꿨다. 제3 근위 전차군은 곳곳에서 나타나며 적을 어려운 지점으로 몰아붙였고 예비대를 교전에 투입시키게 강요했다.9 제3 근위 전차군의 높은 기동성과 공격 효율은 전선군 전체의 평균적인 진격 속도를 증가시켰다.

 

7월 26일, 서부 전선군의 제11 근위군이 뚫은 돌파구로 침투하기 위해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바다노프 중장의 제4 전차군이 전투에 돌입했다. 그러나 제4 전차군의 전투 작전은 계획되로 되지 않았다. 제4 전차군은 제병협동군과 떨어져서 침투하지 못했고 소총병 제대들과 함께 적의 4개 방어선을 돌파하며 적의 대전차 화기와 인공 장애물에 손실을 입었다. 공세 시작 10일 후, 제4 전차군은 제11군과 함께 적 방어를 25~30 Km 밖에 돌파하지 못했다. 제4 전차군이 겪은 이런 문제를 무시해 보면, 전차군의 전투 작전은 작전의 전체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적 방어를 돌파하면서 제4 전차군은 적의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 예비들을 예정보다 일찍 끌어 내면서 할당된 임무를 완수했다.10

 

제2 전차군도 물론 오룔 작전에 참여했다. 제2 전차군은 7월 15일에 공세를 시작하여 제병협동군과 협력하며 7월 17일까지 적 방어를 돌파해 버리고 중부 전선군 지역에서 적이 점령한 지역을 전부 탈환했다. 7월 말까지 전선군은 오룔의 적 집단을 남쪽에서부터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전차군의 진격 종심은 얕았다. 이 문제는 전차군이 격렬한 방어전에 휘말리며 전력을 상당히 손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전투 작전 결과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쳤다.

 

오룔작전에서의 전차군 운용을 평가해 보면, 필자의 의견으로는 1943년 여름의 소비에트 지상군의 전략적 공세 체계 전반에서 특히 신중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스타브카가 세운 계획의 결점은, 오룔 공세 작전에서 우리 군은 단지 오룔에서 적을 패배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적이 벨고로드-하리코프 지역으로 예비대를 옮길 기회를 뺏었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스타브카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정확히 살펴보면 제3 근위 전차군과 제4 전차군이 오룔 지역에서 예상보다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다는 점이었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 원수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전투 이후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었다."11

 

1Km를 진격할 때마다 병사들의 사기와 기술을 필요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전차 부대 공격은 적 방어선을 흩어버리고 적에게 전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제4 전차군과 제2 전차군이 제3 근위 전차군의 진격로를 위해 빈번히 진격로를 바꾸다가 진격 속도가 느려진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분석해 보면, 특히 제3 근위 전차군의 운용에 대해 세르게이 마트베예비치 시테멘코 대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제3 근위 전차군의 행동은 브랸스크 전선군의 공세 확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오룔 일대에서 적을 패배시키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12 오룔 작전에서의 전차군 운용의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이라도 이 평가에는 동의할 것이다.

 

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 작전에서 보로네시 전선군의 기동 집단으로 운용된 제1 전차군과 제5 근위 전차군은 적 방어를 성공적으로 돌파하는데 참여했고 이후 적의 작전술적 종심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독립 전차군단들과 독립 기계화 군단들은 전차군의 측면을 엄호하며 진격했다. 2개 전차군은 공세에서 희귀한 '기갑의 검'으로서 적 집단을 상대로 깊숙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다. 전차군의 이러한 작전술적 운용은 크게 효과적이었고 대조국 전쟁의 이후의 작전에서도 큰 영향을 줬다. 오룔 공세 작전에서제병협동군과 합세해 적의 전술적 방어를 돌파하는데 전 전력을 투입한 전차군 운용과 달리, 벨고로드-하리코프 작전에서는 전차군은 방어 돌파에 여단급 선견대만 투입했다.13

 

벨고로드-하리코프 작전 수행의 전훈은 적 방어의 작전술적 종심을 향한 공세의 성공은 소총병 제대들과의 지속적인 공조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었다. 선견대들이 제병협동군과 소총병 군단에 할당되지 않았다면 기동 집단에 필요한 돌파구를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기동 집단은 소총병 제대들의 지원 없이 돌파구를 뚫는 데 오랜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적 방어 종심으로의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의 침투 성공은 공군과의 공조도 달려 있었다. 기동 제대들은 적 집단 깊숙히 침투하며 적을 포위하는데 최고의 결과를 가져왔다. 

 

쿠르스크 전투 작전을 분석하면 새로운 유형의 전차군이 소비에트 군의 공격 부대로 현전히 증가했고 전선군 수준의 공세 작전의 환경을 유동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운용 폭을 넓히는데 공헌했다. 전선군 지휘관들은 고도의 기동성을 가진 전투 수단을 가졌다. 

 

쿠르스크 전투는 기갑 장비, 전차, 기계화 부대의 조직 형태와 전투 운용 방법을 발전이 시작되는 전투였다. 1843년 말부터 전차 부대들은 85 mm 포를 장비한 개량된 T-34 전차를 장비했다. 이후 122 mm 주포를 장비한 IS-2 중전차와 ISU-152, ISU-122 중자주포가 장비에 추가되었다. 1943년 2분기에 전차와 기계화 군단의 편제표에 2개 자주포 연대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전차 여단이 추가되었다. 이리하여 전차와 기계화 부대의 공격력과 기동성이 현저히 증가했다. 그리하여 전차, 기계화 군단은 적에게 더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고 공세 작전에서 결정적인 목표를 차지하고 급격한 속도를 가졌다.

 

전차 부대의 반격에서의 운용 전훈은 전차 부대가 적의 전술적 방어의 완전한 돌파에 참여하지 않을 때 성공을 거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차군과 독립 전차, 기계화 군단들이 돌파구 형성 임무에 참여해야 했던 이유는 제병협동군에 아직 근접 지원 전차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충분하지 못한 포병과 공군 지원은 자주 전차군이 적의 전술적 방어 지역에서 질질 끄는 싸움을 벌이게 했고 전차 군단들과 기계화 군단들이 예상 못한 손실 때문에 적의 작전술적 종심에서 유동적인 작전을 수행할 기회를 뺐어갔다.

 

필자의 관점에서 결론을 내려 보면, 쿠르스크 전투의 전훈은 방어 작전 과정에서 공세 집단의 조직, 이동 중의 제병협동군과 전차군의 공조, 적의 준비된 방어에 대한 높은 속도의 돌파, 본대와 떨어진 상태에서의 부대 작전, 공세 작전에서의 결정적인 기동과 적의 작전술적 예비대의 패배에서 현대에서도 의의를 가진다.

 

 

 


  1. PRAVDA, 22 June, 1961.
  2. "Istoriya vtoroy mirovoy voyny 1939-1945", Vol 7, Voyenizdat, 1976, p 143.
  3. ibid., pp 120, 136, 137
  4. Ibid., p 144.
  5. TsAMO SSSR, folio 299, inv. 3070, file 188, sheet 6.
  6. Ibid., folio 315, inv. 4440, file 18, sheet 3.
  7. "Istoriya vtoroy mirovoy...," Vol 7, p 147.
  8. TsAMO, folio 299, inv. 3070, file 188, sheet 8.
  9. I. Yakobovsky, "Zemlya v ogne", Voyenizdat, 1975, p 146.
  10. "Istoriya vtoroy mirovoy...," Vol 7, p 163.
  11. K. K. Rokossovsky, "Soldatsky dolg", Voyenizdat, 1972, p 225.
  12. S. M. Shtemenko, "General'nyy shtab v gody voyny", Book 1, Voyenizdat, 1981, pp 234~235
  13. "Sovetskaya Voyennaya Entsiklopediya", Vol 4, Voyenizdat, 1977, p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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