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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키레예프, <전차, 기계화 군단의 선견대 운용 전훈>

PKKA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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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키레예프가 군사사 저널 1982년 10월호에 쓴 논문으로 선견대 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양한 부대에서 선견대의 운용은 대조국 전쟁 전의 우리 교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야전요무령-36은 선견대 조직과 적의 우세 지대에 대한 장악 및 적 후방의 중요 지역 점령에 선견대를 이용하라고 언급했다.1 선견대의 작전은 적이 후퇴할 때나 아군이 반격을 시작할 시기에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견대는 대조국 전쟁 시기에 가장 광범위하게 쓰였는데 특히 소비에트 군이 결정적인 공세 작전으로 전환한 후에 쓰였다. 선견대 운용의 중요성은 다음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소연방 원수 I. S. 코네프는 산도미에시-슐레지엔 작전을 준비하면서 제3 근위 전차군 사령부에서 선견대들의 전투 준비 상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요구했고 선견대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며 특정한 지시를 내렸다.2

우리는 적의 작전술적 종심에서 광범위하고 급격한 기동의 큰 부분을 맡은 전차와 기계화 제대가 작전 시간표를 충족시키기 위한 전투 임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전선군 바깥에서 적절히 강력하고 고도로 기동화된 선견대(본대와 따로 떨어진)의 조직을 필요하게 했다. 선견대는 적 방어 종심에서 작전술적,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점령 지역을 방어하며 적 비행장, 교량, 도하점을 점령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선견대가 본대에서 고립되어 작전을 하여 상대적으로 강력한 적과 교전을 벌이지 않아 진격 속도가 늦춰지고 쓸데없는 인력, 장비 손실을 입지 않으며 주요 임무를 수행해 유리한 방어선을 형성하거나 다른 중요한 목표를 적절한 시기에 점령하고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게 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적군을 우회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적 전력이 소규모라면 선견대는 과감히 전투에 들어갔다. 선견대는 가끔 조우전에 돌입하는 경우도 있는데 적 예비대가 작전술적 후방에서 전방으로 이동하는 상황을 포착했을 때였다.


전차 군단과 기계화 군단의 지휘관들과 참모들은 선견대 조직 결정을 하면서 주로 선견대가 수행할 전투 임무의 중요성, 선견대로 조직될 부대의 상태와 선견대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경험을 고려했다. 선견대는 대게 경험 많고 결정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지휘관들이 맡았다. 예를 들면 A. Kh. 바다자냔, V. M. 가레로프, I. I. 구사콥스키, D. A. 드라군스키, O. A. 로시크, A. M. 템니크,  D. G. 수호바로프, S. F. 슈토프, I. I. 야쿠봅스키를 비롯한 과감한 지휘관들이 선견대를 지휘해 전쟁 기간 동안 명성을 떨쳤다. 이들 중 많은 인물들이 소비에트 군의 지도적 위치에 이르렀다.


선견대 작전의 성공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본대와 떨어져서 할당된 전투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적의 부대 조합이었다. 선견대는 강력한 기동성, 적절한 화력과 타겨력, 적지 후방에서 작전을 벌이는 데 필요한 기동력을 가져야 했다. 1942년의 공세 작전에서 군단 선견대로 증강된 전차 중대나 전차 대대를 썼지만, 1943년 8월 이후의 선견대는 주로 증강된 전차, 기계화 여단이 쓰였다. 이것은 선견대가 여러 가지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가끔 몹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견대를 증강시키기 위해 1개 자주포 연대와 대전차, 방공포 소부대,  방사포 대대, 기타 될수 있는 한 많은 전투공병 대대와 차량화 소총병 대대가 선견대에 배속되었다. 이러한 경우 선견대는 적 방어 후방에 구축된 강력한 적 방어선을 지뢰제거 전차, 중전차, 자주포 부대로 증강되어 단독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선견대는 공군과의 지속적인 공조를 위해 공군 관측 장교들도 데리고 있었다.


전차와 기계화 여단에 대한 증강은 적의 작전술적 종심에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데 적절한 수준의 자율성을 얻었다.


전쟁 전체 기간, 특히 전쟁 제3기에서 선견대는 작전 시작과 작전 도중에 지정되었다. 전차 여단이나 기계화 여단이 진격 중에 선견대로 지정되었고 정해진 방식에 따라 선견대 작전을 준비했다.


선견대의 지휘관과 참모들이 수행하는 과업의 경과와 준비 기간의 확대는 전쟁 초기보다 더 커졌고 전쟁 종결까지 철저히 수행되었다. 선견대 지휘관들이 전투 임무를 받으면, 지휘관은 임무를 철저히 연구했다. 이 시기에 군단장의 명령으로 선견대는 증강받아서 지정된 공세 장소로 이동해 필요하면 즉석에서 선견대 지휘관을 교체했다.


선견대 지휘관은 상황을 판단한 후 차후 작전 결정을 채택하고 선견대 작전안을 군단 사령부에 요약해 보고한 뒤 예하 부대에 임무를 할당했다. 임무에 일치하는 명령서가 배부되고 모든 부대가 전투 작전 준비를 끝내고 기동 후방 업무 부대가 필요한 양의 보급품을 비축했다. 부대 통제 조직과 인접 부대 및 공군과의 상호작용 유지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작업은 일반적으로 작전 지역에 대한 축소 모형을 만들어 수행했다. 포병과 공병 지원, 방공포와 대전차 방어가 동시에 조직되었다. 준비 기간 동안 지휘관과 참모들은 계속해서 전투 중비 상태를 검열했고 예하 부대들을 적절히 도왔다.


우리는 공세 확대 국면 중의 선견대의 특별한 준비를 논하면서  이 준비에 동원된 부대의 숫자와 시간, 전투 돌입시의 전투 임무 수행, 전투 작전 할당 전의 여단의 위치 등을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전투 상황에서 선견대는 전투 준비를 할 시간이 많이 없었다. 많은 경우 여단은 제1 제파의 일부로 모든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으며 선견대는 즉시 전투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전투 임무가 선견대에 할당될 때, 군단 사령부는 적에 대한 간단한 정보, 선견대의 임무, 작전 축선과 작전 수행을 완수해야 하는 시간, 선견대의 전투 지경선을 정해 주었다. 가끔 선견대의 지휘관과 참모들이 너무 시간이 엇을 때 상급 지휘부는 선견대에 전투 작전의 특성 뿐만 아니라 전투 수행 방법까지 설명해 주었다. 제2 제파나 에비대의 전차 여단이 선견대 임무를 맡을 때가 있었는데 코르순-솁첸콥스키 작전에서 제6 전차군의 제5 근위 전차 군단의 경우 선견대는 야전군(이나 군단)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전방이로 이동해 증강받으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작전 축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증강 인력을 제시간 안에 집중시키기 위해(증강 전력은 대게 군단이나 야전군 진격 지역이 아닌 곳에 있었다.), 야전군(이나 군단) 참모진이 증강 전력을 지정된 장소로 직접 인솔하고 선견대 지휘관에게 인수인계했다. 증강된 인력과 장비가 선견대에 집결하자 제6 전차군은 코르순-솁첸콥스키 작전에서 선견대를 조직하고 투입했다.3

선견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축선에서 진격하고 특별히 주 목표를 점령할 축선에서 철저했던 수색 정찰 조직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군단장과 참모진은 선견대에 수색 정찰 임무의 중요한 부분을 맡겼다. 전쟁 제3기 동안 항공기들은 광범위하게 퍼져 정보를 수집해 선견대에 수색 정보를 전달했다.

 


선견대는 방어 종심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측면과 후방 방호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진격하며서 측방 방호와 후방 방호는 지속적인 수행의 대상이었다.


선견대는 다양한 상황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게 허용되었다. 선견대가 진격을 조직했을 때(작전의 준비 기간에), 소총병 제대가 공세를 시작해 적의 전술 방어 지대에 대한 돌파를 확실하게 하고 적 종심으로 급격히 진격할 때 선견대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렇나 선견대는 자주 이런 목적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선견대가 공세 확대 시기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조국 전쟁에서 전차 군단과 기계화 군단 선견대는 가장 자주 작전 첫날에 투입되어 적 전초선에서 4~10 Km 종심으로 진격했다. 포병과 지상 공격기들은 선견대와 본대의 돌파 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하기 위해 각각 적을 공세 지역에서 압도했고 적이 전투에 돌입할 때 측면을 때렸다.


전쟁 기간 동안 선견대가 본대와 떨어져서 작전을 수행하는 거리가 확연히 늘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파시스트 부대를 포위할 때 돈 강의 도하점을 점령할 시기에 제26 전차 군단의 선견대는 종심 25 Km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선견대의 진격 종심은 2배로 늘어났다.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선견대는 전과 확대 시기에 다양한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선견대는 자주 적의 대규모 통신 기지를 점령해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겨 주었고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 통신 기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 중 라돔스코 시를 점령한 제6 근위 전차 군단의 선견대인 제53 근위 전차 여단의 전투 작전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여단은 적 통신 기지 점령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포 연대와 자주포 연대로 증강받았다. 여단의 전투 작전은 1945년 1월 1일 1016시에 실시되었다. 여단은 행군 중인 적의 회복 부대를 두둘겼고 급격히 진격하며 부가이, 드메닌, 자크셰프 벨케 지역에 1300시까지 도달하여 후퇴하는 적을 무너트리고 측방 방호를 실시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1500시에 선견대는 라돔스코 동쪽 끝으로 쇄도하여 히틀러주의자들에게 기습을 먹였고 도시를 지키던 적 하급 부대 1,000명을 사살하고 장갑 열차 2대를 파괴했다. 1600시에 선견대는 철도 교차점을 점령했고 전방위 방어로 전환해 교차점을 본대가 접근할 때까지 방어했다.4 라돔스코 점령은 파시스트의 남서쪽 후퇴로를 차단했고 필리차 강을 건너던 인접 부대의 도하 속도를 촉진했다.


적 방어 종심에서 전차 군단과 기계화 군단의 성공적인 전과 확대 기간 동안 자주 수로 장애물을 도하해야 했었는데 수로 장애물은 심각하게 진격상 큰 장애물이었고 적은 수로 장애물을 중요한 방어선으로 이용했다. 선견대는 강을 급격히 도하하는데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선견대는 수로 장애물에 제일 먼저 도착해 도하 움직임으로 적의 시선을 끌어 적이 선견대를 상대로 직접 행동하게 만들고 교두보를 점령, 장악하며 본대가 진격하기 용이한 환경을 만들었다. 선견대가 자주 강을 도하할 때 짧은 시간 안에 준비해 도하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점에서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중 제25 전차 군단의 선견대 작전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제175 전차 여단은 공세를 급격히 확대하고 산 강을 도하해 1944년 7월 22일까지 야로슬라프를 해방시키고 본대의 성공적인 작전을 보장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선견대는 적의 소규모 집단을 두들기며 70 Km 정면을 휩쓸었고 그 날 정오에 강을 모두 도하해 적을 추격했다.5 그 결과 군단 주력은 산 강을 급격히 건너 적시에 임무를 완수했다.


선견대는 자주 교량을 손상 없이 점령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에서 제10 근위 전차 군단의 제61 근위 전차 여단은 기습에서 우위를 얻고 바르투 강의 교량을 온전히 점령했다. 그리하여 군단 주력은 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극히 역동적인 작전 특성은 선견대가 추격 국면에서 본대와 떨어져 본대보다 더 빠른 평균 진격 속도를 달성하게 했다. 1942년과 1943년에 선견대는 본대에서 15~25 Km 이상 떨어져 전진했고 하루 당 25~30 Km를 진격했다. 반면 1944~1945년의 선견대는 각각 30~40 Km, 40~50 Km를 앞서서 전진했다.6 선견대는 본대와 떨어져 80~90 Km나 그 이상을 몇일 안에 진격했다. 이러한 추격 동안 선견대는 적의 후퇴할 기휘를 본질적으로 빼았았고 적 예비대가 방어선을 준비하거나 방어 지역을 강화하지 못하게 했다. 급격한 추격 속도 달성은 선견대가 적의 화점과 저항 거점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규정에 따라 좋은 수색 정찰과 강력한 측후방 안전을 보장하며 극단적으로 빠른 속도로 우회 기동을 했기 떄문이었다. 추격 속도는 추격의 지속성에 달렸다. 선견대의 교체는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제3 근위 전차군의 제7 근위 전차 군단 선견대는 비슬라-오데르 작전에서 1945년 1월 14일에서 24일까지 5번 교체되었다. 전차 여단이나 기계화 여단은 선견대로 작전을 하며 선견대로서의 역할을 2~3일 동안 유지했다.7 제2 근위 전차군의 제1 기계화 군단 선견대는 1월 18일에서 30일동안 6번 교체되었다.


선견대는 적을 특히 밤에 추격해 성공을 거두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 동안 제9 근위 전차 군단의 제47 근위 전차 여단은 그루젝 시를 야간 기습 공격으로 점령했고 1945년 1월 16일에는 2300시에 소샤체프를 공격해 적의 바르샤바를 향한 후퇴로를 차단했다. 선견대는 소샤체프 비행장을 1월 17일에 점령했다.8 여단은 90 Km 일대에서 24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야시-키시네프 작전에서 제5 근위 전차 군단 선견대의 작전은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야간 추격의 한 예가 되었다. 제22 근위 전차 여단은 1개 자주포 연대, 1개 포병 여단, 전투공병 중대와 박격포 중대로 강화되어 선견대로 활동했다. 1944년 8월 26일 밤에 선견대는 적을 급격히 추격해 전력이 약한 부대만 전개해 적의 후방 위수 부대를 파괴하고 적이 림니쿠 사라트 시로 가는 접근로에 방어선을 설치하지 못하게 했다.9

선견대가 전차와 기계화 부대로 사용되었을 때, 이전의 작전은 선견대의 높은 독립성과 전투 임무 수행, 기습의 요소, 뛰어난 기동성과 확대된 타격력, 야간에 가지는 이점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선견대는 잘 조직된 수색 정찰, 부드러운 부대 통제와 선견대 내 각 부대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줬다. 공세 작전에서 선견대의 광범위한 사용은 대조국 전쟁에서 전차와 기계화 부대의 원칙적인 전투 운용의 새로운 발전이 되었고 특히 적의 작전술적 방어 종심 작전에서 빛을 발했다. 여기서 얻은 광범위한 전투 경험은 현대전 상황에서 전차 부대의 공세 운용 이론과 전투 및 정치 훈련에서 부대의 실제 훈련에서 큰 중요성을 가진다.


1. "Vremennyy Polevoy ustaf RKKA 1936 (PU36)" [Temporary Field Service Regulations
of the Workers and Peasants Red Army, 1936 (PU36)], Voyenizdat, 1936,
p 90.
2. I. I. Yakubovskiy, "Zemlya v ogne" [Land on Fire], Voyenizdat, 1975,
pp 515-517.
3. Central Archives of the USSR Ministry of Defense, fnd 339, inv 5179, fl 80,
shs 10-11.
4. Ibid., fnd 315, inv 4440, fl 706, shs 52-53.
5. Ibid., fnd 3594* inv 409341, fl 1, shs 106-107.
6. Ibid., fnd 619, inv 107127, fl 1, shs 74-76.
7. Ibid., fnd 307, inv 4148, fl 308, shs 277-294.
8. Ibid., fl 188 s.h 18.
9. Ibid., fnd 339, inv 5179, fl 16, sh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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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енёв 2014.12.03. 07:47
궁금한게 선견대는 사단급 이상 제대부터 편성되는 겁니까?
PKKA 글쓴이 2014.12.03. 17:30
Венёв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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