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주제로 글을 올리는 곳입니다. (단, 이용약관 필독)
기타

V. 미할킨, <바그라치온 작전에서의 포병의 전투 운용>

PKKA 875

0

0

* 본 논문은 군사사 저널 1984년 6월호에 실린 논문으로 바그라치온 작전 40주년을 맞아 쓴 논문 모음 중 하나입니다. 저자인 미할킨은 당시 소련군 포병 사령관이었습니다. 

소비에트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는 지속적으로 군의 구조와 군의 양적, 질적 성장에 신경써 왔고 이에 따라 벨로루시 작전 직전의 소비에트 포병은 현저히 성장했다. 이는 포병 부대가 다른 병과 및 공군과이 밀접한 공조로 적의 공병 준비가 잘 되고 깊은 조심을 가진 방어를 돌파하는 걸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작전 준비 과정에서 제1, 2, 3 발트 전선군과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은 포병의 대규모 기동이 필요했기 때문에 예비 최고 사령부에서 포병 사단과 방사포 사단 13개와 방공 사단 20개를 지원받았다. 지휘관들과 참모들은 대규모 화포들을 후방에서 온전히 수송해 와야 한다는 책임에 직면했다. 우리는 이 작전의 크기를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작전술적 수송 열차 67량을 이용해 포병 연대 40개에 필요한 화포들을 이송하고 전선에서 69개 포병연대가 집결했다는 사실에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제1 발트 전선군의 경우 소총병 사단의 포병 편제에 돌파를 위해 85개 포병 연대와 대대가 배치되었다. 이전의 공세 작전들과 비교해 봤을 때 야전에서의 포병 재편성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제1 발트 전선군의 제43군은 돌파 구역 7Km 정면으로 150개 포대를 이동시켰고 정확한 화력 통제와 지속적인 관측 덕에 화력 집중이 기본적으로 은밀 했고 짧은 시간(8~10일) 안에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1


수풀이 우거진 늪지대 지형은 화포를 방열 지점에서 이동시키고 전개하는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사전에 준비를 해 놓아서 포병들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모든 수준의 포병 참모드른 작전 준비 기간 동안 부대 전개 위치를 답사하고 방열 지점과 관측소 설치 지점을 결정하고 지형도를 작성했으며 작전을 위해 공병 부대를 조직하고 지원받았다.2 주요 지점에서의 결정적힌 화력 집중은 다음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전선군이나 야전군의 돌파 지역에서 최소 진격 정면의 11~20%, 어떤 곳은 80~90%까지 포병 화력이 밀집되었다. 이건 돌파 지역에서 Km 당 140~200문의 화포가 집결하는 걸 가능하게 했다.3


전술적 밀도를 예로 들자면 제65군의 제18 소총병 군단의 제37 근위 소총병 사단은 235문의 야포, 방사포, 박격포의 지원을 받았다.4 높은 포병 밀집은 적의 주요 방어 시설을 동시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고 포병 밀도의 증가는 적 포병에 대한 화력 우위를 보장했다.


야전군, 군단, 사단, 연대의 진격하는 포병 집단은 벨로루시 작전을 준비하며 더 창의적인 발전을 이륙했다. 주요 돌파 지역에서 싸우는 모든 야전군은 강력한 장거리 포병 집단을 가졌는데 장거리 포병 집단은 주로 적 포병 제압에 쓰였다. 예를 들면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근위군 소속 장거리 포병 집단은 4개 장사정포 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5군의 경우 1개 평사포 사단과 2개 중평사포 여단으로 구성되었다.5


작전에 투입된 11개 야전군 중 8개 야전군(제6 근위군, 제31군, 제28군 제외)은 돌파구를 뚫는 데 방사포 집단을 만들었다. 제3, 5, 28, 49, 65군은 파괴 집단이 조직되었고 제5, 28군은 돌파 집단이 조직되었다. 군단, 사단, 연대에도 포병 집단이 조직되었다. 포병 집단들은 여전히 구식 명칭(장거리 포병, 보병 지원, 기타 등) 이었지만 명칭과 일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포병 집단들의 전력과 지휘 통제 방법은 조직적, 전술적 선에 밀접하여 실행되었다. 포병 집단은 소총병 부대에 더 정확한 지원을 해 줄수 있었고 돌파 지역에 더 효과적인 대규모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으며 전투 작전 중 더 뛰어난 화력 통제를 부장했다. 


포병 공세 계획은 전선군의 포병 참모들이 수행했는데 참모들은 모든 유형의 정찰 자료를 분석했다. 그러나 여기서 참모들은 야전군의 포병 공세 일정의 개별적인 특색을 제외하진 않았다. 야전의 포병 참모들은 작전 첫째 날에 포병 공세 일정을 짰고 탄약 소모 분량을 측정했으며 작전 지시에 따라 화력을 강화할 계획과 일정을 짰다. 적 목표와 지역을 무력화시킬 계획은 선임 포병 참모가 승인하고 수행했다. 이 과정은 야전군, 군단, 사단 포병의 더 효과적인 운용을 보장했다.6


전선군 계획에 의하면, 포격으로 적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시간은 제1, 2 벨로루시 전선군이 2:00~2:05 시간이고 제1 발트 전선군은 2:15 시가이며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2:20시간이었다. 간혹 90분 이상으로 포격 시간이 증가하기도 했다. 이것은 적이 강력히 요새화된 방어 지점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1 발트 전선군을 제외한 준비 포격은 적 종심 6Km 일대에 5~15분간 포격을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포격 이후 무력화 포격을 종심 2Km 일대에 퍼부었으며 간혹 종심 6Km 까지 포격 범위가 확장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준비 포격을 중지하고 포대를 공격 전방으로 옮길 때 준비 포격과 지원 포격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한 이동 화망을 형성했다. 나머지 포대들은 화망의 틈을 메우는 소규모 포격을 계속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은 20분동안 뒤이어 집중 포격을 가하면서 화포들의 기술적 한계를 최대로 증가시켰다. 첫 5분 동안 화포의 25%가, 다음 10분 동안 50%가, 다음 15분 동안 75%가, 20분까지 가면 화포 전체가 한계에 다달았다. 화력과 상황에서 마지막 집중 포격은 이동 화망과 조금 달랐다. 마지막 포격은 기습 달성을 위해서 포격이 적 최전방을 타격한 후 최전방에서 300m 후방에 떨어지게 되 있었다.


공세에 나서는 보병과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포격 지원은 전선군 사령부가 상황을 관찰하고 적 제1 방어선의 배치에 따라 그 비율을 준비했다. 제1 발트 전선군은 보병들이 적의 제1, 2 참호선을 장악할 때 까지 30일간의 연속적인 화력 집중으로 단일한 이동 화망을 지원하기로 계획했다.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공세 지역에 적 종심 1.5~2Km 지역에 60분간의 단일 이동 화망을 형성하기로 계획했다.7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28군과 제65군은 제2 벨로루시 전선군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 최초로 적 종심 1.5~2Km를 뒤덮는 작전술적 수준의 이중 이동 화망을 지원받을 것이었다. 포격 지원의 새로운 방법은 나치의 거점 방어를 뚫는 보병과 전차 자원에 필요한 것이었고 소비에트 포병의 능력 증가로 기인한 것이었다.8


적지 방어망에서 보전포 합동 계획에서 참모들은 집단 목표에 대한 화력 집중을 계획해 적 대응 병력을 막을 장거리 포격 화망을 만들었다. 계획을 위해서는 최소 화포 200~300문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야전군 돌파 집단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일부를 근접 지원에 돌리자는 제안에 따라 군단과 대대 포병 집단은 소총병 대대, 연대, 사단, 군단 지휘관의 지휘하에 들어갔다.9


포병 참모들은 적의 대포병 사격 가능성 확임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포병 지휘관은 포병 작전 명령서에 이렇게 지시했다. "적 포병은 우군의 진격을 방해할 목적으로 우리의 준비 포격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포병 화력을 총동원해 대 준비포격을 가할 수 있다. 이 경우 포병 지휘관들은 야전군 군사 위원회의 허가 아래 준비 포격 실시 이전에 적 포대에 대한 강력한 포격을 실행하라."10


포병 부대들은 작전을 준비하며 야전에서 계획을 위한 실탄 훈련을 실시했다. 예를 들어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65군은 1944년 6월 2일까지 모든 소총병 부대들과 포병 부대를 두 패로 갈라 야전 훈련을 실시했다. 포병들은 훈련에서 보병과 함께 이동하는 이동 화망 기술을 선보였다.






각 제대간 더 좋은 협동 조직을 위해 소총병 군단들과 소총병 사단들은 모든 수준의 지휘관들에게 샌드박스를 사용했으며 임박한 작전의 작전 환경과 적 방아선의 병력 배치를 재현해 훈련했다. 훈련은 자세했고 다양한 제대가 공세의 다양한 기간 동안 취할 행동과 적 방어를 뚫고 반격을 막을 방법을 확정했다.11


포병 지휘관들은 전투 과정에서 밀접한 조정을 위해 사령부와 관측소를 다른 병과 지휘관들이 공용으로 쓰거나 지휘소를 서로 근처에 비치했다. 관측 장교들은 무전 설비를 갖추고 보병 부대에 들어갔다. 전차, 기계화 부대들의 조율 조직에서는 돌파 상황에서의 기동 집단 지원 계확과 화력 요청과 중지를 뜻한느 신호 결정이 승인되었다. 포병 관측 장교들은 화력 통제를 위한 특별 전차에 탑승했다.


포병과 공군간의 조율은 야전군급 수준이었다. 야전군 참모들은 공군 참모들과 임무 수행을 위한 과정을 확실히 했다. 포병은 규정에 따르면 공군이 적의 전술적 방어 구역 전체를 타격할 동안 포격은 적 주 방어 구역을 타격하고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포병은 공군 작전 지원을 위한 적 방공만 제압 임무도 맡았다.12


벨로루시 작전의 준비 과정에서 포병의 전투 운용 문제는 스타브카 대리들과 전선군 지휘관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예를 들면 스타브카 대리 주코프 원수와 제2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G. F. 자하로프 상장은 N. D. 야코블레프 포병 원수와 S. M. 시테멘코 상장과 함께 1944년 6월 9일에 I. T. 그리신 중장이 지휘하는 제48군을 시찰하며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고 마침내 포병 공세의 목적을 정했으며 계획에 지시를 더했다.13 1944년 6월 6일, 바실렙스키 원수는 제3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I. D. 체르냐홉스키 상장은 N. I. 크릴로프 중장의 제5군을 시찰하며 포병과 전차, 보병, 공군의 조율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13


작전 준비 시기에서 방공포의 기본적인 효과는 집중된 병력과 탄약, 물자 등을 엄호하는 것이었따. 병력이 전투 행동으로 전개될 때 방공포의 80%가 제1 작전 제파를 엄호하기 위해 전방으로 옴겨졌다. 여기서 야전군들은 1개 방공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주 돌파 지역의 소총병 군단들도 1개 방공 사단으로 증강되었다. 예를 들면 제1 발트 전선군은 제6 근위군을 엄호하기 위해 3개 방공 집단이 조직되었다. 방공 집단 중 2개는 제1 제파 소총병 군단을 엄호했고 나머지 하나는 제2 제파와 도약점에 배치된 제1 근위 전차 군단을 엄호했다.14


총공세 전야에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제1 발트 전선군의 포병 중 일부는 공군과의 협조 하에 제1 제파 사단들이 보낸 수색 분건대(전방 대대) 지원에 참여했다. 준비 포격 시간 30분 전이었다. 포병 집단의 일부는 일시적으로 방열 지점에서 분견대 지원에 연관되었다. 포격과 공습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전차의 기습 행동은 확실한 결과를 가져 왔다. 적은 수색 부대의 활동을 본격적인 공세라고 오판했고 6월 22일 동안 모든 전술적 예비들을 실질적으로 각 방어 지역에 배치했다. 아군은 준비 포격을 하지 않거나 조절해서 함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이유로 야전군들과 군단들은 특별한 진격 상황에 맞춘 포병 공세 계획을 가져오는 걸 필요로 했다. 예를 들면 제6 근위군의 준비 포격 시간은 이런 이유로 최소화되었다. 준비 포격에 할당된 탄약 중 50%가 적지 종심에서의 작전 지원에 쓰일 수 있었다.


제5군의 제122 소총병 군단과 제115 소총병 군단 지역에서도 적이 이전의 포병, 박격포 집단 배치를 바꾸게 강요하고 있었다. 야전군 장거리 포병 집단은 적 포병 집단의 위치 변경에 준비 포격에 5분만 투입되었다. 나치의 대포병 사격은 포병 수색과 관측 자료를 명확히 할 기회를 주었고 아군 포병은 적 방열 지점을 알아내 포격을 가했다.


준비 포격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래서 제18 소총병 군단의 진격 지역에서 소비에트 포병은 적 포병에 대해 단기간에 화력 우위를 얻을 수 있었다. 준비 포격의 효과는 제28군, 제5군, 제65군의 개별 제대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관측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제39군의 제5 근위 소총병 군단의 돌파 지역에서 제18 근위 소총병 사단의 제61 근위 소총병 연대 제1 대대장 페도로프 소령은 준비 포격 과정에서 적이 아군의 포격을 견대지 못하고 제1 참호선에서 철수하는 걸 관측했다. 페도로프는 보고를 즉시 연대장에게 올리고 포격이 끝나기 전에 적을 공격해야 한닺는 요청을 했다. 포병과의 밀접한 조율 덕에 대대는 막대한 화력 엄호를 받으며 재빨리 나치의 참호선을 점령하고 루체사 강을 건너는데 필수적이었던 다리 3개를 장악했다. 다리 장악은 소총병 군단의 전과 확대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15


공세를 위한 준비 포격의 과정에서 적 방어의 중요한 목표는 높은 밀도의 방사포가 타격했는데 특히 BM-31 대대가 투입되었다. 예를 들면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3군 지역에서 BM-31 대대는 베리체프 동쪽의 적 저항 거점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적 대피호의 70%가 방사포 포격으로 파괴되었다.16






야포의 직사 화력은 돌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방의 적 화점을 파괴하기 위해 포병이 철조망 장애물을 뚫어 보병의 공격을 수월하게 했다.17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은 돌파 지역에서 준비 포격 때 이중 이동 화망 방법을 사용했다. 이중 화망은 적 종심에서 동시다발적인 화력 피해를 높은 화력 밀도로 입혔고 적을 무력화시켰다. 적은 제1 참호선 뿐만 아니라 그 뒤 300~500m 지점의 제2 참호선에서도 기동과 관측의 기회를 상실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준비 포격의 현저한 특징은 소위 '확장된 일제 포격' 이었다. 준비 포격의 시작에서 방사포들은 50분간 준비 포격을 했는데 5~7분의 간격을 두고 일제히 발사하여 일반 화포와 겹쳐 적을 무력화시켰다.18


수풀이 우거진 늪지대 지형과 제한된 도로는 모든 전선군이 포병의 이동 계획을 확실하게 했다. 그래서 제65군은 포장 도로 하나와 통나무길 두개만 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진격하는 보병과 전차를 지원할 포병은 군단 장거리포 집단의 일부와 야전군 직할 방사포 부대였다. 대구경포 같은 지나가기 힘든 장비는 제1 근위 전차 군단에 후속해서 진격했다. 이런 배치는 그 효율을 기본적으로 증명했다. 뒤쳐진 포병들은 전투 작전 과정에 영향을 크게 끼치지 못했다.


적 종심에서의 전과 확대에서 소총병 부대와 강력한 보전합동 집단이 확립되었다. 예를 들면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의 경우 각 집단마다 구경 45~122mm 화포 12~16문의 직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각 화포 집단은 두 개로 나뉘어 서로 번갈아 가며 한 집단이 보병과 기동할 동안 다른 집단이 화력을 지원하기로 되 있었다. 작전의 이런 조직은 포병을 동반시킴으로서 보병을 만족시킬 효과적인 화력 임무 수행을 보장했다. 적의 주요 화력과 주 저항선에서의 저항을 상대할 경우 포격과 공습이 복합적으로 시행했다. 그리하여 제122 소총병 군단의 보그셰프 점령은 제3 근위 돌파 포병 사단과 제1 항공군의 항공기 270대의 동시 타격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작전술적 종심에서 포병은 수많은 도하를 지원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포병 참모들은 베레지나 강 도하를 준비하며 화포가 도하할 시간표를 짰다. 예를 들면 제11 근위군은 돌파를 위해 40분간의 준비 포격(30분은 광역 포격, 10분은 집중 포격)을 계획했다. 진격 중 포격 지원 계획은 제1 제파 대대 돌파 지역에 30분간 집중 포격 방식으로 계획했다. 막애한 양의 화포가 도하를 지원하기 위해 운용되었다. 이와 같이 제8 근위군은 마그르투체프 지역에서 비슬라 강을 도하할 때의 포병 밀도는 Km당 40분 (제28 근위 소총병 군단), 72문(제25 근위 소총병 군단), 심지어 90문(제4 근위 소총병 군단)까지 올라갔다.


포병은 적 집단(특히 민스크)을 무너트리는데도 건설적으로 운요되었으며 적의 반격을 막는데도 유용하게 운용되었다. 포병의 포격은 포위된 나치 집단을 파괴하면서 대규모 화력 집중으로 적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나치가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하면 적을 직사로 겨눈 임시 화점을 구축하고 있던 포병들이 적을 파괴했고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포병들은 자주 적 돌파 예상 경로에 독립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성공적으로 반격을 차단했다.


벨로루시 작전은 코벨의 적 방어선을 뚫기 위한 보브루이스크에서 코벨로의 포병의 기동을 숨기는 데서 건설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6월 29일에서 7월 4일까지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4 돌파 포병 군단을 포함한 대규모 포병 부대는 연속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보브루이스크 남쪽 지역에 전력을 집중했다.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포병들은 600~650Km를 다양한 방법으로 이동했다. 포병 재편성의 엄격한 통제, 기교 넘치는 교통 통제, 잘 조직된 부대 하역 계획은 포병의 작전술적 기동을 은폐하고 기동 시간의 최소화를 보장했다. 각 부대는 16시간동안 200~240Km를 이동했다. 35,000대의 차량이 행군을 도왔다. 7월 18일에 뛰어난 재편성 수행으로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좌익에는 대규모 포병 전력이 밀집했다.19이 조치는 야전군의 돌파 지역에서 Km 당 평균 야포와 방사포 180문이라는 막대한 작전술적 밀도를 이뤘고 어떤 곳은 최대 1Km에 240문의 화포가 집중되는 등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고 성공적인 돌파를 보장해 주었다.20 


결론을 내리자면, 벨로루시 작전 과정에서 포병 부대들은 뛰어난 전투 기술과 막대한 영웅주의를 보여 주었다. 가장 뛰어난 포병들은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벨로루시 작전 동안 소비에트 포병 사령관 N. N. 보로노프 포병 원수, N. D. 야코블레프 포병 원수, V. I. 카자코프, N. M. 흘레브니코프, A. K. 소콜스키, M. M. 바르수코프, I. S. 베스킨, P. N. 페트로파블롭스키, N. M. 포자르스키, I. M. 피르스키, N. F. 살리치코와 기타 포병 장성들은 포병의 전투 운용에 큰 역할을 했다. 바그라치온 작전은 포병의 전투 운용에서 이론과 실제 양쪽에 새로운 기여를 했다. 작전에서 얻은 다양한 저투 경험은 이후의 작전에서 광범위하게 쓰였다. 


  1. "Sovetskaya artilleriya v Velikoy Otechestvennoy voyne 1941-1945 gg."
    [Soviet Artillery in the Great Patriotic War of 1941-1945], Moscow, Voyenizdat, I960, pp 431, 432.
  2. TsAMO SSSR [Central Archives of the USSR Ministry of Defense], folio 233, inv. 2317, file 23, sheets 10-11.
  3. "Sovetskaya Voyennaya Entsiklopediya" [SovietiMilitary Encyclopedia], Moscow, Voyenizdat, 1976, Vol 1, p 433; "Vtoraya mirovaya voyna 1939-1945" [World War II of 1939-1945], Moscow, Voyenizdat, 1978, Vol 9, p 44.
  4. G. Ye. Peredel'skiy, A. I. Tokmakov and G. T. Khroshilov, "Artilleriya v boyu i operatsii" [Artillery in an Engagement and Operation], Moscow, Voyenizdat, 1980, pp 132-133.
  5. TsAMO, folio 241» inv. 2597, file 145, sheet 17; folio 237, inv. 2418, file 168, sheet 127; folio 233, inv. 2356, file 10, sheet 25.
  6. "Sovetskaya artilleriya v Velikoy...," p 439.
  7. "Operatsii Sovetskikh Vooruzhennykh Sil v Velikoy Otechestvennoy voyne 1941-1945" [Operations of the Soviet Armed Forces in the Great Patriotic War of 1941-1945], Moscow, Voyenizdat, 1958, Vol III, p 305.
  8. "Istoriya voyn i voyennogo iskusstva" [The History of Wars and Military Art], Moscow, Voyenizdat, 1970, p 270.
  9. "Sovetskaya artilleriya v Velikoy...," p 443.
  10. TsAMO, folio 233, inv. 2317, file 23, sheet 258.
  11. "Osvobozhdeniya Belorussii 1944" [The Liberation of Belorussia in 1944], Moscow, Nauka, 1974, p 504.
  12. Ibid., pp 26-27.
  13. Ibid., p 57.
  14. "Sovetskaya artilleriya v Velikoy...," pp 444, 447.
  15. Ibid., p 450.
  16. TsAMO, folio 310, inv. 9025, file 30, sheet 27.
  17. Ibid., folio 358, inv. 20455, file 10, sheet 260.
  18. Ibid., folio 422, inv. 32160, file 6, sheet 74.
  19. Ibid., folio 233, inv. 2317, file 76, sheet 14.
  20. Ibid., sheet 20.
신고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공지 2023년 하반기 개편 안내 (레벨 시스템 추가) 9 Mi_Dork 23.07.13.09:07 +1 3722
공지 밀리돔 후원 요청 (2023-06-23) 28 운영자 14.01.24.20:42 +13 38570

밀리돔 | milidom 의 저작물은 다음의 사이트 이용 약관 에 의거해 이용 가능합니다.
이 라이선스의 범위 이외의 이용허락은 운영진에게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