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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A. 마리셰프, <소련 전차 부대의 대전기 돌파 전술>

PKKA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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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군사사 저널 1982년 6월호에 A.마리셰프 소장이 기고한 소논문입니다.

 

 

 

 

 

대조국 전쟁기, 특히 제2, 3기에서 붉은 군대의 공세 작전 수행은 자주 강력히 준비된 적 방어를 돌파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돌파는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임무로 적 방어선을 뚫는 것이 핵심으로 적의 견고한 방어선을 금가게 하고 무너트리며 전선의 구멍으로 침투하여 적 종심을 향한 기동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돌파는 적 측면이나 후방으로 기동이 불가능할 때 적의 방어 전면으로 정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대조국 전쟁의 시작 때 적 방어 돌파, 특히 전차를 이용한 돌파는 큰 문제거리였고 이후 해결되었다.1

 

그러나 전차를 이용한 돌파 수행의 정확한 이론적 관점은 즉시 수행될 수가 없었다. 문제는 1940년에 일어났는데 이 시기는 기계화 군단에 대한 정보가 뒤죽박죽이던 시절로 군단은 대규모의 전투 차량을 필요로 했다. 소총병 사단의 전차 대대와 스타브카 예비로 비축된 부대는 기계화 군단 창설을 위해 배치되었다. 이 때문에 붉은 군대는 전쟁이 일어날 때 실질적으로 보병을 근접 지원한는 역할의 전차 부대가 없었다. 기계화 군단의 창설은 전차와 지휘 인력의 부족으로 완벽하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기계화 군단을은 나치와의 어려운 전투에서 전차들을 대규모로 잃었고 1941년 7~8월 사이 거의 무너졌다.2

 

이 모든 것들이 적 방어 돌파를 어렵게 만들었다. 전쟁 첫 주 동안 소총병 부대들은 필요한 수의 전차 증원을 받지 못해 재빨리 적 방어선을 돌파해 적 종심 깊이 진격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리하여 1941년 7월 중순에는 기계화 군단의 해체가 시작되었고 독립 전차 부대들이 조직되어 보병과 함께 작전을 하도록 했다.3

 

그러나 전차들은 극심한 군수 지원 부족에 시달렸고 이는 적 종심으로 빠른 속도로 공세 작전을 펼칠 수 없게 했다.

 

게다가 전쟁 제1기 동안 경험 부족 때문에 전차 운용에는 늘 심각한 오판이 따랐다. 제일 기초적인 잘못은 보병, 포병, 전투공병의 지원이 부족한 채로 전차만 단독으로 진격하는 것, 포병 화력의 부족, 불충분한 기동, 정면 공격만 고수하는 경향, 전차의 기본 임무인 기동을 통한 적 보병과 무기 체계의 파괴가 아닌 고정 포대로 사용하는 것 등이었다.

 

제1기 동안의 전차를 통한 적 방어선 돌파 전훈(클린-솔네츠노고르스크, 엘레츠, 티흐빈, 하리코프, 기타 다른 작전들)은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으로 1942년 10월 16일에 배포되었다.4 특히 이 명령이 중요한 것은 당시 전차 운용의 문제를 지적하고 전차 운용 필요의 윤곽을 그린 것이다. 특히 명령은 독립 전차 연대와 독립 전차 여단을 야전군 사령관 직할에 두고 보병 근접 지원 전차(непосредственной поддержки пехоты, 이하 ТНПП, NPP)로 활용하라는 걸 강조했다. 근접 지원 전차의 주 임무는 돌파시 아군을 지원하고 적 보병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근접 지원 전차들은 최고 속도로, 과감한 기동과 지형을 이용해 적 측면이나 후방으로 접근해야 했다.

 

소총병 부대들의 돌파를 근접 지원하는 부대는 독립 전차 여단, 연대, 대대와 자주포5 연대, 대대 로 소총병 사단에 임시로 배치되는 부대들이었다. 적의 전술적 방어 지역을 돌파할 때 근접 지원 전차 집단은 여기에 투입된다. 이런 집단의 조합은 적 방어가 강력해짐에 따라 전차 숫자를 늘리게 되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반격 동안은 제21군 소속 제63, 74, 293 소총병 사단이 각각 20~22대의 전차를 보유했고 돌파 전면 3~4Km에서 Km당 오직 4~7대의 전차 지원밖에 받지 못했지만 베를린 작전에서는 제5 충격군 소속 제1 제파 소총병 사단들의 근접 지원 병력은 20~65대의 전차와 12~50대의 자주포가 되었고 이것들을  돌파 전면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는 전차들과 자주포들이 1~1.5Km의 전면에 30~70대의 기갑 차량들을 집중시킬 수 있게 했다.6

 

전쟁 동안 근접 지원 전차 집단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경전차는 빠르게 도태되었고 중전차와 중자주포가 빈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제3기의 근접 지원 집단은 소총병 사단 당 자주 전차 여단(전차 65대)과 자주포 연대(자주포 21대)나 1~2개의 전차 연대, 자주포 연대로 구성되었고 지뢰 제거 전차도 증강되었다.7

 

근접 지원 전차 집단의 증가와 소총병 사단의 돌파 전면이 3~4Km에서 1.5~2Km로 줄어듬에 따라 전투 차량의 근접 지원 밀도는 더욱 늘어났다. 제3기 동안의 작전들은 돌파 전면 Km당 25~30대의 전차가 할당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근접 지원 전차 집단 운용 기술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942년의 공세 작전에서는 전차 집단들이 중앙 통제를 받지 않고 소대, 중대마다 소총병 연대나 대대에 배속되어 제1 제대 뿐만 아니라 제2 제대 에서도 따로따로 움직였다. 이러한 독립 전차 대대와 여단들(특히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부대)은 큰 효과를 내기는 커녕 돌파 작전에서 부정적인 결과만 가져왔다. 이 때문에 1942~1943년의 작전 동안(스탈린그라드, 벨고로드-하리코프 등)에서 전차 여단, 전차 연대, 자주포 연대는 항상 완편된 상태의 지원 집단으로 운용되었다. 규정과 명령은 전차 여단을 쪼개서 사용하는 걸 금지했다.

 

여기서 근접 지원 전차는 소총병 부대와 함께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러나 적 방어선의 지속적인 증강은 보전 합동 뿐만 아니라 다른 병과와의 합동을 더 신장시키는 걸 요구했다. 이 때문에 1944년 하반기에 소총병 사단 지휘관들은 전차 부대와 자주포 부대를 소총병 연대와 합동 작전을 하게 하고 가끔 소총병 대대 수준까지 기갑 부대를 배속시켰다. 여기서 전차 소대가 소총병 중대에 붙고 전차가 1대씩 소총병 소대에 붙기도 했다. 1941년~43년 동안 이런 전차 대형과 부대를 전개하는 건 위험했다. (이건 전차 부족과 운용 경험 부족 때문이었다.) 다행이 전차 부대의 양적, 질적 성장과 전훈 축적은 근접 지원 전차들이 중앙 통제를 받지 않아도 큰 효과를 낼 수 있게 했다.

 

근접 지원 전차가 1대라도 있으면 돌파 시 인력과 장비 양쪽의 상호작용에 기여할 수 있었다. 소총병 부대의 지휘관들은 개별적으로 근접 지원 전차에 임무를 부여했고 다른 병과들의 작전과 조율시켰다. 지휘관들은 전투 과정에도 지원 전차들을 통제했다. 예를 들면, 동프로이센 작전에 투입된 제2 충격군 소속 지원 전차들은 소총병 사단들에게 이렇게 운용되었다. 그러나 중앙 통제를 받지 않는 근접 지원 전차 운용은 전쟁 끝에 가서는 적이 더 강화한 방어선을 뚫기에는 불충분하여서 사단장들은 상황에 따라 소총병 연대를 지원하기 위한 전차를 더 집단화했다.

 

전차 부대와 대형이 적진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은 아군 전면 10~15Km 뒤에서 작전 개시 전날 1~2일 전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전차 부대는 고유의 임무를 받고 다른 병과 부대들과의 조율과 적과 지형에 대한 수색 임무를 받고 수행했다. 매우 자주 합동 전술 행동이 조정 작업에서 나왔다.

 

공세 전날 밤이나 준비 포격 단계에서 근접 지원 전차들은 자주 아군 전면에서 1~3Km 뒤의 도약점에 집결했다. 전차 집단의 전투 대형은 전차 조합과 적군 전력, 지형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적의 방어선이 얇고 대전차 방어가 적으며 지형이 전차 운용에 적합하면 일반적으로 단일 제대에 2개 전투선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제1 선에는 전차들이, 제2 선(제1 선의 200~300m 뒤)에는 자주포가 진격했다. 지뢰 제거 전차는 선봉에 섰다.8 이 경우 긍정적인 상황으로 작전 시작부터 전차와 자주포가 돌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투 대형은 공세 과정에서 전차 공격의 힘을 늘릴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더 깊고 다수의 축선에서 적의 강력한 방어를 돌파할 때는 2~3개 제대로 나눠 작전을 벌였다. 지뢰 제거 전차들은 최선봉에서 작전을 펼쳤다. 그 뒤 제1 제대 전차들이 100~150m 뒤에서 중형 전차나 중전차로 1~2개 전투선을 구성하고 진격했다. 제2 선 전차들은 제1 선에서 2개 전투선을 이루고 200~300m 뒤에서 진격했다. 제1 제대 제1 전투선 전차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적 보병을 섬멸하고 지뢰 제거 전차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1 제대의 제2 전투선 전차들은 중형 전차, 중전차, 중자주포를 포함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제2 제대는 순전히 자주포로 구성되었다. 제1 제대와 밀접히 공조하며 제2 제대는 소총병 대대의 공격을 선도했다. 제2 제대의 200~300m 후방에서 전차 여단의 차량화 소총병 대대가 예비로 출격했다. 대대는 전차와 자주포로 지원을 받았다. 근접 지원 전차 집단의 전체적인 공격 종심은 1Km 정도였다.

 

이런 전차 집단의 구성은 후방으로부터의 효과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전투 실행은 이런 전투 대형도 현저한 단점이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이 대형이 투입될 때 대규모의 전차를 최초 공세에 투입하기 어려웠다. 더 나아가 전투 제대 간 거리 200~400m 정도는 제대간 상호 화력 지원을 해 주기에는 너무 길었다. 1944년 하반기와 1945년의 작전 전훈은 깊은 제대를 가지고 운용하는 전차 집단 형태를 유지할 때 제대간 거리를 줄이고 각 제대마다 전투선을 늘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대조국 전쟁의 전 과정에서는 전장에서 기동하는 전차 지원을 위한 방법과 전차들의 화력 극대화, 단차간 각격 25~50m 유지와 전투선 간 150~200m 유지가 확립되었다. 너무 좁은 단차간 간격은 기동을 방해했고 적 화력에 의한 손실을 늘렸다. 너무 긴 단차간 간격은 보전합동을 방해했고 단차들간의 화력 교환을 어렵게 했다. 근접 지원 전차들의 적 방어 돌파 작전은 선에서 선으로 방법론적인 환경을 가졌다.

 

근접 지원 전차 집단은 일반적으로 소총병 사단과 함께 제1(주) 방어선 종심으로 진격했다. 이 임무를 받은 후 근접 지원 전차들과 자주포 부대는 소총병 사단에서 빠져나와 사단, 군단, 야전군 선견대와 합세하여 적의 제2 방어선으로 진격해 주요 목표를 점령하고 본대가 정지 없이 진격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큰 조직적 문제를 남겼으며 항상 이상적이진 않았다. 대조국 전쟁의 규정은 소총병 대형이 급격한 적 전술적 방어 지대 돌파를 위해 40~50대의 근접 지원 전차를 Km 당 지원받게 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규정의 전차 밀도는 가능하지 않았다. 제2, 3기의 중요한 작전들에서도 근접 지원 전차의 Km 당 지원 댓수는 20~25대의 불과했다. 이는 자주 전선군과 야전군 사령관들이 돌파 작전을 위해 스타브카에 전차 군단이나 기계화 군단, 심지어 전차군까지 동원하는 걸 요청해 적 방어선을 돌파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독립 전차 군단과 독립 기계화 군단의 전차들(제13 기계화 군단의 1개 전차 연대와 제4 기계화 군단의 2개 전차 연대, 제26 전차 군단의 1개 전차 여단)이 제병협동군의 기동 집단을 이룬 동시에 근접 지원 전차 부대의 역할을 맏았다.9

 

다른 사례도 있다. 지토미르-베르디체프 작전(1943년 12월~1944년 1월)의 준비 때 돌파 지역의 전차 밀도가 Km 당 8대를 넘지 못하자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제18군 사령부는 스타브카의 허가를 받아 제3 근위 전차군에서 1개 전차 여단을 빌려왔다. 이 전차 여단을 공세 개시 때 제129 근위 소총병 사단의 근접 지원 전차 부대가 되었다.

 

적 전술적 방어 지역을 돌파한 후, 독립 전차 군단과 독립 기계화 군단(제병협동군의 기동 집단)과 전차군(전선군의 기동 집단)이 전투에 참여했다. 이 대형과 야전 부대는 공군과의 공조로 치열한 전투 없이 적 예비를 무너트리고 적 방어선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후퇴하는 적을 급격히 추격해 급격한 속도로 연속되는 상황을 만들고 적의 부차적인 방어선을 넘어 본대가 중지 없이 종심으로 진격하게 되 있었다.

 

예를 들면,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서 제1 근위 전차군의 작전 수행과 비슬라-오데르 작전에서 제2 근위 전차군, 야시-키시네프 작전에서 제6 전차군은 작전 성공을 보장하는 '깔끔한' 돌파구로 들어가 깊숙히 진격했다.

 

그러나 근접 지원 전차의 부족은 자주 지휘관들이 침투 제대를 성공적인 적 방어선 돌파에 동원하게 했다. 여기서 공세 작전을 분석했을 때 전차 군단과 기계화 군단은 자주 적 방어선 돌파에 운용되었다. 전차군은 일부만, 그리고 가끔 전차군 전체가 돌파를 위해 투입되어 제2 방어선으로의 중지 없는 진격이나 제1 방어선의 완전한 돌파를 달성했다.

 

전차 군단, 기계화 군단, 전차군이 강력한 적 방어선 돌파에 투입되는 건 자연히 현저한 전차 손실을 가져 와쏙 전술적 성공을 작전술적 성공으로 확대하기 힘들게 했다. 당시의 지휘관들이 이걸 모를 리는 없었지만 빠른 돌파의 실패와 작전 템포 저하로 인한 작전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럴 수 밖에 없었다.

 

가끔 전선군 사령관들은 전차군을 초반부터 6~8Km의 공격 종심을 두고 돌파에 투입했다. 사령관들은 최초 공세 때 적이 너무 강한 공격을 받으면 제1 선을 포기하고 제2 선이나 보조 방어선으로 물러날 때가 있다는 걸 노렸기 때문이다. 이 상황 아래서 즉시 진격 속도를 올리고 취약한 적 방어선을 무너트리고 예비대와 군수창을 휩쓸며 본대가 성공적인 진격을 위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10

 

예를 들어 베를린 작전에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제3, 4 근위 전차군은 5~7Km의 공격 종심을 가지고 대규모 소모로 방어선을 유지할 여력이 없는 적을 급격히 돌파했다. 전차군은 별다른 손실 없이 재빨리 적의 제2 방어선을 향해 돌진해쏙 다른 제병협동군과 작전을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돌파 국면에서의 전차군 투입은 가끔 필요했는데 소총병 부대의 전투 효율이 떨어지거나 공세 작전 준비에서 시간이 많이 없었을 때 그랬다. 그래서 지토미르-베르지체프 작전에서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준비 시간 부족과 격렬한 전투로 약화된 소총병 사단들, 그리고 근접 지원 전차의 부족(Km 당 8~9대 밀도에 불과했다.) 때문에 제1, 3 근위 전차군이 적의 3~5Km 종심을 돌파하는 걸 도와 주었다.같은 이유로, 키로보그라드 작전(1944년 1월)에서 제5 근위 전차군은 적 방어 전면에 2~4Km 돌파구를 열었고 우만-보토사니(1944년 3~4월) 작전에서 제2 전차군과 제5 근위 전차군도 그렇게 했다.11

 

대조국 전쟁의 과정 동안 재빠른 돌파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전차군이 최초 공세에 투입되어 독자적으로 적 방어선을 돌파하는 일도 있었다. 전차군의 이러한 운용은 지형 상황과 적 방어 상태에 따라 일어났다. 예를 들어 코르순-셉첸콥스키 작전에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제6 전차군은 강려한 최초 돌파로 적의 약한 방어선을 돌파해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제5 근위 전차군과 합류해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후 제6 근위 전차군은 데브레첸, 부다페스트, 싱안링-신경 작전에 전부 제1 제대로 투입되었다. 제1 제대로서의 전차군 전투 경험은 전차만으로도 돌파가 가능할 때가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12

 

그리하여 대조국 전쟁 동안 전차 부대는 위대하고 복잡한 발전 과정을 걸었다. 전차 부대는 지상군의 정통적인 주 공격 제대가 되었고 공세 작전에 돌파 종심과 진격 속도를 늘려 주었다. 적 방어의 성공적인 돌파는 대규모의 항공, 포병 지원에 달려 있었고 지원의 양과 질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적 방어 돌파에서 전차 부대의 효과적인 운용은 계속해서 지뢰 지대를 청소하고 진격로를 개척하는 공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차 부대의 조직 구성과 전투 대형은 전쟁 직전보다 훨씬 세련되게 되었으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효율적인 돌파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편제상 소총병 사단 소속 전차 대대의 부재로 전차 부대나 자주포 부대를 다른 부대에서 빌려오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로 제대 간 조정이 더 어려워졌고 합동 전투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졌다. 두 번째 단점은 소총병 사단장들이 실제로 전차 부대의 관리 책임을 지속적으로 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단점들은 전후 편제표에 소총병 사단에 전차나 자주포 대대를 추가하며 해결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근접 지원 전차 부대의 제일 중요한 조직, 구조 발전 경향은 자주포가 근접 지원 전차 부대의 일부가 되고 중전차의 비중이 늘었다는 것이다. 근접 지원 전차의 기본적인 운용 지시로 전차와 자주포를 Km 당 5~15대에서 30~40대로 늘리고 근접 지원 전차 집단을 제1 제대 뿐만 아니라 제2 제대 까지 배치하고 중앙 통제를 받지 않은 체 따로 노는 소규모 근접 지원 전차 부대들을 대규모 중앙 통제 운용으로 전환한 것은 큰 발전이었다.

 

전체적으로 전차 부대의 전투 전훈은 전쟁의 마지막 시기 동안 상당히 다양한 방법을 보였다. 근접 지원 전차의 지적이고 기교 넘치는 운용은 조직의 이론과 실제, 전차 부대의 운용을 현대까지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1. 자세히 보고 싶으면 VOYENNO-ISTORICHESKIY ZHURNAL, No 6, 1962,
    pp 19-20.을 보라.
  2. "Sovetskiye tankovyye voyska 1941-1945" [The Soviet Tank Troops, 1941-1945],
    Voyenizdat, 1973, p 33.
  3. A. I. Radziyevskiy, "Tankovyy udar" [Tank Attack], Voyenizdat, 1977, p 16.
  4. VOYENNO-ISTORICHESKIY ZHURNAL, No 10, 1974, pp 68-73.을 보라.
  5. 역주: 독일에서는 돌격포, 구축전차 등으로 부르는 차량들도 러시아에서는 죄다 '자주포'로 부릅니다.
  6. "Stroitel'stvo i boyevoye primeneniye sovetskikh tankovykh voysk v gody
    Velikoy Otechestvennoy voyny" [The Organizational Development and Combat
    Employment of the Soviet Tank Troops During the Years of the Great Patriotic
    War], Voyenizdat, 1979, pp 102, 105.
  7. Ibid., p 105.
  8. Ibid. , p 108.;
  9. Ibid., p 101.
  10. A. I. Radziyevskiy, op. cit., p 115.
  11. TsAMO SSSR [Central Archives of the USSR Ministry of Defense], folio 299,
    inv. 76784, file 1, sheet 6.
  12. VOYENNO-ISTORICHESKIY ZHURNAL, No 3, 1981, pp 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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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케케 2014.11.12. 10:02
잘봤습니다. 솔직히 대전기 소련군에 대해 아는 게 정말 피상적이었는데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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