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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S. 알페로프, <부다페스트 작전에서의 제4 근위군의 공세>

PKKA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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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군사사 저널 1982년 9월호에 기고된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4 근위군은 부다페스트 시가전에 말려들진 않았습니다.




군의 완전한 차량화와 무기의 뛰어난 효율, 특히 핵무기의 효율은 현대 군사 기동 작전 상황의 복잡하고 급격한 변화를 요구한다. 다양한 전투 경험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 특히 부다페스트 작전에 참여한 제4 근위군의 선례를 보면 현대 작전을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제4 근위군은 전투에 참여하기 전에 우크라이나를 떠나 루마니아에서 재집결했다. 제4 근위군은 도나우 강을 향해 중단 없이 진격했고 적의 준비된 전술적 종심 방어를 돌파했으며 돌파구를 메꿀려는 적의 반격을 차단했다.


11월 12일, 제4 근위군의 선봉인 I. N. 모시랴크 대령의 제62 근위 소총병 사단과 A. Ye. 야코블레프 소장의 제80 근위 소총병 사단은 열차로 티미소아라역에 도착했고 나머지 6개 소총병 사단은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솜보르 북동쪽에 11월 26일까지 집결했다.


군단장들은 각 사단들을 이틀에 걸쳐 열차에서 하역시키고 행군 종대를 준비했다. 제62 근위 소총병 사단과 제80 근위 소총병 사단은 11월 13일에 이동을 시작했고 병력 집중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끌지 않았다. 두 사단은 11월 19일에 새 지역에 집결했다.


제4 근위군 사령관 이반 바실리예비치 갈라닌 중장은 행군 동안 새 임무를 받았는데 12월 1일까지 본대를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샤로힌 중장의 제57군이 도나우 강 서안에 구축한 교도보로 이동시켜서 벨랑시 호수에서 스제케스페헤르바르를 돌파해  12월 10~11까지 발라톤 호수까지 교두보를 확대시키라는 것이었다. 제4 근위군에 세르게이 안토노비치 보브루크 소장이 지휘하는 제31 근위 소총병 군단이 제46군에서 옮겨 왔다. 제4 근위 소총병 사단, 제34 근위 소총병 사단, 제40 근위 소총병 사단은 도나우 강 동안에 깔린 95Km 일대의 적 방어선을 점령했다. 


같은 날, 근위군 참모장 쿠지마 니콜라예비치 데레뱐코 소장은 작전 계획 준비를 시작했다. 계획은 어려운 상황에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도나우 강을 점령핟는 것에서 주목해야 한다. 도나우 강의 폭은 평균 800~1000m였고 많은 부분이 가을비로 불어나 있었다. 강으로의 접근 경로는 너무 노출되어 있었고 강 서안은 동안보다 고지대였으며 강 서안에는 적의 화점, 철조망, 지뢰가 깔려 있었다. 


근위군 사령부는 제41 근위 소총병 사단의 교두보 선두 점령을 지원했다. 제126 근위 소총병 연대의 M. S. 벨리크 소령이 지휘하는 제3 대대가 모하스 남동쪽 2.5Km 지점에서 정면 6Km, 종심 4Km의 적의 소규모 방어 구역을 전투 첫째날에 점령했다. 사단 주력은 11월 26일에 도착했고 제57군과 합류해 바티나 지역에 구촉한 교두보를 넓혔다. 전선군 사령관은 도나우 강 서안에서 도하를 돕기 위해 부교를 만들 통나무 16톤을 지원했고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의 2개 사단과 군단 포병을 주둔지 좌측에서 도하시킬 것을 명령했다. 


상황이 전개되자 야전군 사령부는 작업을 시작했고 사령관은 11월 20일에 새 계획을 승인했다. 새 계획은 도나우 강 서안에서 공세를 확대하고 벨랑시 호수를 따라 설치한 적 방어선을 스제케스페헤르바르와 모하스를 통해 돌파해 12월 10일까지 베르시베른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과 제21 근위 소총병 군단이 강 서안에서 공세를 계속했고 그 동안 제31 근위 소총병 군단은 11월 20일 2145시까지 L. Sh. 브란스부르크 대령의 제40 근위 소총병 사단을 보내 바르도스 지역에 교두보를 구축할 것이었다. 


12월 1일 아침, 제252 소총병 사단의 제928 소총병 연대와 제83 해군 보병 여단이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고르시코프 중장의 도나우 분함대 소속 제1 장갑 수송 여단의 선박들에 탑승에 도하를 시작했다. 병력들은 게롄을 점령하는 길에 전투를 벌였고 제21 근위 소총병 군단 병력들과 합세했다. 도나우 강 점령에서 기습 달성에 특별한 관심이 쏠렸고 제1 제파 도하는 어둠과 연막 속에서 준비 포격 없이 철저한 방음 속에 실시되었다. 제31 근위 소총병 군단 포병은 적이 도하에 성공한 아군 보병을 발견하기 전까지 발포하지 않았다. 도하가 성공하자 강력한 포격이 적 화점을 압도했고 전투 공병들이 지뢰 지대를 제거하고 소총병들이 적 참호선을 공격할 때 충분한 화력 지원을 제공했다.


사령부의 명령에 따르면 1개 소총병 대대, 1개 포병 대대, 1개 공병 중대, 1개 수색 소대로 구성된 기동 분견대를 차량에 탑승시켜 운용해 12월 1일 새벽에 공세를 확장시키기로 되 있었다. 이 분견대들은 파시스트들의 화점을 포위하거나 점령했고 적 후방에 도달해 적에게 손실을 강요하며 아군 주력의 돌파에 도움을 주었다. 12월 1일까지 제4 근위군의 좌익은 17Km, 우익은 12Km를 진격했다. 제4 근위군은 12월 20일까지 벨랑시 호수에어 달라톤 호수에 다달았다. 제4 근위군은 발라톤 호수까지 적이 불완전하게 만든 마르가리타 방어선을 뚫으며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제4 근위군은 돌파 이후 방어로 전환했다. 근위군 공세의 느린 속도와 결과적인 공세 속도 저하는 첫 도하점에서 도하한 병력들이 자주 흩어져 전투를 벌이고 충분한 탄약 없이 싸웠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도하점에서는 적이 완강한 저항을 벌였고 모든 고지와 거주지와 건물에서 전투를 유도했으며 대대급 병력으로 아군 중대를 공격하는 등 병력을 끌어모아 국부적인 병력 우위를 달성하고 반격을 시도했다.1 적은 11월 26일에서 30일 사이 제15 방공 대대, 제26 건설 대대, 제50 전투 공병 대대, 헝가리 제5 경보병 대대를 투입했다. 12월 15일까지 헝가리 제2 보병 사단, 독일 제1 기갑 사단, 제23 기갑 사단 소속 병력들이 전투에 참여했다.


적은 헝가리의 수도를 계속 손에 넣고 있으려고 벨랑시 호수와 발라톤 호수 사이의 방어선을 강화했다. 방어선의 제1 방어 구역은 5~8Km 종심을 확보했고 적 병력이 꽉 들어차 있었으며 상호 통신망이 연결된 참호와 화점 체계와 철조망 장애물과 대전차 장애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는 12월 12일에 스타브카가 긱접 내린 명령에 따라 제4 근위군에 적 방어를 돌파하고 파트카와 스제케스페헤르바르에서 폴고라드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세 둘째 날까지는 전선군 기동 집단인 제18 전차 군단과 제5 근위 기병 군단이 돌파를 지원에 최전방에서 12Km를 진격하고 자르와 베레테시코즈마 사이의 선에 작전 3, 4일차에 도달하고 6일차에는 출발점에서 68Km 지점인 작전 목표에 도달해 부다페스트의 적 집단이 서쪽으로 탈출할 길을 막게 되 있었다. 제46군은 제4 근위군의 우익에서, 제57군은 좌익에서 진격했다. 

 

 

 

작전 과정


한편 병에 걸린 갈라닌 중장을 대신해 제4 근위군 사령관에 부임한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자하로프 대장은 11월 29일에 임지에 도착해 3개 군단의 5개 사단으로 13.2 Km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하고 돌파 중점을 스제케스페헤르바르에 두어 제21 근위 소총병 군단2의 제41 근위 소총병 사단이 첫 번째 지점을 점령한 후 적 좌익의 방어 지점을 점령해 전과를 확대하고 야전군 제2 제파인 표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캇코프 중장의 제7 기계화 군단3과 각 군단에서 1개 씩 차출된 소총병 사단들, 제21 근위 소총병 군단의 작전 예비인 1개 소총병 연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소총병 사단들의 전투 대형은 단일 제파였고 연대들은 이중 제파였다. 자하로프는 부대 재편성에 4일을, 도하점 점령에 2일을 할당했다.


작전 준비 기간 동안 실탄 사용 훈련이 대부분의 소총병 부대에서 실시되었고 후방에서도 2~3개 지휘소에서 군단, 사단, 연대 수준의 도상 연습을 수행했다. 지휘관들과 참모들은 돌파 과정과 병력들의 상호작용을 준비했다. 근위군의 재집결은 공세 직전에 시작되었다.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장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비류코프 중장은 이렇게 요청했다.


"12월 12일 밤에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은 제21 근위 소총병 군단 지역으로 방향을 틀어 방어 전선에서 평행하게 80 Km를 행군하고 12월 16일 아침까지 샤라시드 지역에 집결할 것."4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은 적의 무선 통신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재지별 과정 중에 이전 주둔지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 주둔지에 총 150대의 가짜 전차와 90문의 가짜 야포가 설치되었고 전차와 차량들은 그 자리에서 기동하는 척 했다. 다양한 공세 행동이 폴고라드 지역에서 수행되었다.5 적 지휘부는 결과적으로 아군의 재편성 상황과 주 돌파 지점과 공세 시간을 알지 못했다.


참모들은 그 다음의 공세를 준비했다. 12월 17일, 야전군 지휘관의 결정은 작전 수행에 관련된 모든 수단을 신중히 준비하면서 명령서 형태로 각 휘하 지휘관들에게 배부되었다. 참모들이 짠 작전 시간표는 각 소총병 군단들이 임무에서 즉시 종심 깊이 파고들기 위한 작전의 주요 국면을 자세하게 지정했다. 공격을 위한 화력 지원 수단은 특별히 철저했다. 소총병 군단 포병들은 군단 포병 집단으로 합쳐졌다. 군단 대전차포 부대, 특히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의 대전차포 부대는 화점을 이루고 적의 제23 기갑 사단의 반격을 전방에서 차단했다. 야포와 박격포의 막대한 밀집은 돌파 지역에서 마찬가지였다.6


안정적인 병력 통제는 주로 지휘소가 맡은 끊임없는 기능에 의해 철저히 조정되어 보장되었다. 야전군 사령부 작전 과장 G. F. 보론초프 대령의 작전 참모 집단의 에를 들면, 다른 지휘소들 중 작전에 관련된 지휘소들은 자신들의 업무 특성에 일치하는 정보, 집행, 실행 장교들의 지휘소에 작전 참모 장교 하나씩을 붙여 지휘소 업무와 지휘소 배치, 재배치, 경비를 맡겼다. 상황 정보 갱신과 전투 서류 작성 시간 단축에 관심이 쏠렸다. 지휘소들을 전투 부대 가까이 배치한 것이 상황 변화를 실시간에 가깝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작전 준비 동안 당의 정치 업무는 병사들에게 높은 사기와 투지를 불어넣었고 병사들이 국제적인 해방 전쟁 의무를 치르고 있음을 주지시켰으며 현지 민간인들과 상호 활동할 것을 교육했다. 


12월 20일 1015시, 제4 근위군은 전날 결정된 일정표에 따라 공세에 들어갔다. 60분의 준비 포격이 포탄 7,500톤을 날렸고 적 방어에 진격로를 열었다. 적의 저항은 진격할 수록 커졌다. 적은 후퇴해온 부대로 강화되었다. 적은 예비대를 동원해 반격을 수행했다. 예를 들면 공세 시간 두 시간만에 2개 독일군 보병 대대가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의 좌익인 파벨 이바노비치 아포닌 소장의 제5 근위 공수 사단을 멈춰세웠고 제23 기갑 사단의 1개 기갑 연대는 보병과 함께 제80 근위 소총병 사단의 우익을 공격했다. 12월 20일 오후 동안 적은 작전술적 예비인 제3 기갑 사단을 끌어와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과 제21 근위 소총병 군단의 전투 지경선을 공격했다. 제4 근위군은 그날까지 적의 반격을 받아치며 15Km 정면에서 9Km 종심을 서서히 뚫고 들어갔다. 밤 동안 제4 근위군은 구축한 돌파구로 9 Km를 추가로 들어갔다. 12월 31일 1100시에는 15분의 준비 포격 후 다시 공세를 재개했다.


12월 22일 아침까지 제4 근위군은 헝가리의 오래된 도시인 스제케스페헤르바르에 도착했다. 도시는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이 제31 근위 소총병 군단과 제135 소총병 군단이 좌우익에서 수행한 결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전선 공격을 수행한 후 점령되었다. 시가전 돌격조는 일반적으로 소총수와 기관단총수 10~25명과 화염병을 장비한 전투 공병 3~5명으로 구성되었다. 돌격조는 45mm 야포 2~3문과 박격포 2~3문, 경기관총과 중기관총 몇 정으로 무장했다. 각 돌격조는 건물 하나 하나를 점령하는 임무를 받았다. 제4 근위군은 스제케스페헤르바르를 점령하며 제7 기계화 군단과 전투 중 합세했고 적의 작전술적 종심으로 전과를 확대했다. 


K D. 파르페노프 대령의 제4 근위 소총병 사단은 12월 26일 1900시에 에즈테르곰 근처의 도나우 강 남안에 도달했고 뒤에는 제18 전차 군단이 후속했다. 나머지 병력은 12월 28일에 도착했다. 12얼 20~28일 동안 제4 근위군은 마을 151개를 해방시키고 적 17,600명을 사살하고 포로 5,792명을 잡았다. 이 동안 적은 전차 295대, 야포 192문, 장갑차 80대, 항공기 12대, 기관총 362정을 상실했다. 제4 근위군은 12월 31일에 전선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로 전환해 1945년 1월 2~26일 사이에 벌어진 아군을 도나우 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부다페스트 포위를 풀려는 적의 강력한 반격을 막았다.(역주: 독일군의 콘라트 작전) 


부다페스트 작전 동안에 제4 근위군의 전투 작전은 행군 중의 전투,긴 재편성 시간, 큰 수로 장애물 점령, 준비된 적 방어선 돌파, 전차, 기계화 부대와의 협동, 외부 포위망 형성 전훈을 추가했다. 제4 근위군은 적을 외부 포위망 안으로 몰아넣고 부다페스트의 적 집단을 파괴하는데 예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비에트 작전술은 적 제병협동 집단을 상대로 기교 넘치는 조직과 전투 작전 수행의 예를 만들었다.


제4 근위군은 작전에서 승세를 확대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행군 중 전투로의 전환은 향상된 수단을 사용한 진격 부대에 의한 도나우 강 점령이라는 예상치 못한 성공을 가져왔다. 진격 분견대는 교두보를 유지하고 본대와 합류해 교두보를 확장시켰다. 분견대들이 도나우 강 유역을 넓게 점령함으로서 적이 우리의 주공 축선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게 하거나 잘못 알게 해 적의 에비대 운용 효율을 급격히 떨어트렸다.


  1. 제4 근위군의 전선에서 서로 전투를 벌인 양측 부대는 이렇다. 독일 케셰 집단(혼성 연대와 제10, 12 74 포병 대대), 독일 제7 보병 사단과 제23 보병 사단 소속 병력들 VS 소련 도나우 분함대 제1 여단과 제16 국경 수비대, 독일 제31 보병 사단 VS 제44 훈련 연대와 제4, 38 경찰 대대. 전체 19,370명이었다.
  2. 여기서 제84 소총병 사단과 제252 소총병 사단은 제135 소총병 군단의 지휘에 들어갔다.
  3. 이 작전은 스제케스페헤르바르 점령에 뒤따라 계획되었다.
  4. "Osvobozhdeniye Vengrii ot fashizma" [The Liberation of Hungary from Fascism], Moscow, Nauka, 1965, p 121.
  5. T .F. Vorontsov, N.I. Biryukov, A.F. Smekalov et al, "Ot volzhskikh stepey do avstriyskikh Al'p (boyevoy put 1 4-y gvardeyskoy armii)" [From the Volga Steppes to the Austrian Alps (The Combat Path of the 4th Guards Army)], Voyenizdat, 1971, pp 131-132.
  6. 스제케스페헤르바르 공격에 참여한 부대는 이렇다: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제5, 7 근위 공수 사단, 제80 근위 소총병 사단), 제135 소총병 군단(제84 소총병 사단, 제252 소총병 사단의 일부), 제31 근위 소총병 군단의 제40 근위 소총병 사단, 제9 돌파 포병 사단(제23 곡사포 여단, 제115 평사포 여단, 제10 박격포 여단), 제42 대전차 여단, 제123 평사포 여단, 제64 박격포 여단, 제7 기계화 군단의 제1440 자주포 연대, 제366 근위 중돌격포 연대, 제58, 61 방사포 연대, 제17 항공군의 제189 대지 항공 사단, 제288 전투기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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