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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피모프, <비슬라-오데르 작전의 전훈으로 본 적 종심으로의 급격한 진격에서의 항공력 운용>

PKKA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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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비슬라-오데르 작전 특집호인 군사사 저널 1985년 1월호 논문으로 저자인 예피모프는 당시 소련 공군 총사령관 이었습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 이전의 항공 상황은 소비에트 공군에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치 A 집단군 (1월 26일부로 중부 집단군에서 개칭)은 제1 벨로루시 전선군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에 맞서고 있었는데 항공기 600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우리 군보다 열세였다.1 적 공군 루프트바페는 바르샤바에서 베를린까지 12개 비행장을 가졌고 제6 항공군의 지휘 아래 될 수 있는 한 많은 항공기를 끌어모아 전력을 850~1,000대로 늘렸다. 작전 직전에 적 공군은 유류의 부족 때문에 활동을 제한하고 대규모 비행을 주저하고 있었다. 적 항공기들은 서 부크 강의 입구에서 잘로까지 수색 정찰을 위해 매일 25~30회 씩 초과 출격했다. 같은 시기, 나치들은 강력한 방공 체계를 구축했다. 

 

작전에 참여한 우리 항공 전력은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16 항공군(지휘관 S. I. 루덴코 상장, 참모장 P. I. 브랴코 중장)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제2 항공군(지휘관 S. A. 크라솝스키 상장, 참모장 A. S. 프로닌 소장)이었다. 각각 항공기 2,190대와 2,58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2 그리하여 소비에트 공군은 적 공군에 대해 막대한 숫적 우위를 가졌다. 게다가 항공기의 질과 조종사들의 기량도 적을 능가했다.

 

전선군 지휘관들은 병력 집중 지역의 지상군 엄호와 적지 종심에서의 지상군 엄호, 항공 우세 유지, 공습을 통한 적 지상 전력 파괴로 지상군의 적 방어 돌파와 기동 집단의 적지 종심 기동 지원, 후퇴하는 적의 급격한 추격, 도하와 철도 하역 엄호, 적 예비대의 반격 시도 차단, 지속적인 전장 정찰 등 항공군의 기본적인 임무를 할당했다. 제16 항공군과 제2 항공군은 전선군의 결정에 맞춰 항공 작전의 기본 계획을 만들었다.

 

계획에 따르면 제16 항공군은 5,625회를 출격해 공세 시작 6일 전부터 병력 집결 지역을 엄호하고 적 비행장을 공습하고 항공 정찰을 수행하기로 되 있었다. 항공군의 기본 전력은 주 돌파 지역에 집중되었다. 항공군 전력 80% 이상이 마그누셰프 교두보에서 활동했다. 예를 들면 제5 충격군을 지원하고 엄호하기 위해 1개 대지 공격 사단과 2개 폭격기 사단을 할당했다. 제8 근위군도 같은 전력을 지원받았으며 제61, 69, 33군은 1개 폭격기 사단과 1개 대지 공격 사단을 할당받았다. 항공 우세 유지와 병력 엄호는 제3 전투기 군단과 제282, 283 전투기 사단이 맡았다.

 

1~2개 대지 공격 사단이나 2개 전투기 사단이 전차군 지원에 할당되었고 1개 대지 공격 사단과 1개 전투기 사단이 독립 전차 군단이나 기병 군단 지원에 할당되었다.항공 통제의 중앙화는 돌파구로 가는 기동 집단 지원에서 볼 수 있다. 기동 집단 엄호 작전은 4일로 계획되었다. 여기서 항공기들은 작전 둘째 날 출격하게 되 있었다. 항공군 부대들은 적의 작전술적 종심에서 지원 임무를 받아 재배치에 들어갔다. 같은 시기 제3 폭격기 군단과 제1 근위 전투기 사단이 재배치되었다. 

 

제2 항공군의 전투 운용 계획은 3일 전 12,080회를 출격 하는 것이었다. 첫째 날에는 4,760회, 둘째 날에는 3,950회, 셋째 날에는 3,370회였다.3 공세 전날 밤 동안 제208 야간 폭격기 사단의 Po-2 폭격기들이 타르노폴의 적 병력과 장비를 폭격해 적의 주의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돌파 지역에서 분산시켰다.

 

항공군의 전 기체가 적 방어선을 돌파하는 제13군, 제52군, 제5 근위군의 돌파 지역에 집중되었다. 공격에서 항공 준비 동안 폭격기들은 적 포병, 에비대, 화점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공세 첫날의 지상 전력 지원 과정의 중요한 역할은 대지 항공 항공기들이 맡았다. 여기서 전투기들과 지상공격기들은 모든 병과의 지상 병력들을 엄호하고 지원했다.

 

전투기 사단 2개가 항공 우세를 유지했다. 게다가 작전 첫째 날에 아군은 폭격기와 지상공격기의 비행장 공습으로 적 항공기들을 크라코프, 디에즈노, 나글로비체 비행장에서 파괴했다. 

 

항공군 사령부는 2개 폭격기 사단과 1개 야간 폭격기 사단을 중요한 예비로 두고 있었다. 제16 항공군과 제2 항공군은 공세 두 시간 전에 적 지휘소, 관측소, 통신소를 공습해 적 지휘 통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지상군의 진격 뒤에서 항공 부대들은 먼지로 시계가 차단된 이전 비행장을 떠나 미리 만들어 놓은 새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리하여 공세 시작 전에 비행장 17개가 산도미에시 교두보의 전선 10~15Km 뒤에 미리 설치되었다. 

 

항공군의 참모들은 전 작전 종심에 걸쳐 항공기들을 재배치하고 그 전에 비행장 정비 대대와 비행장 건설 대대들을 기동 부대에 합류시켜 전방으로 보냈다. 

 

공습의 높은 효율과 기습을 보장하기 위해 지상군과 공군 사령부의 상호 신뢰와 깔끔한 조율, 특히 빠르게 진격하는 전차 부대와 공군간의 조율은 작전을 위한 주요 요소였다. 소비에트 사령부는 비슬라 강과 오데르 강 사이의 적 방어 구역을 관측하는데 이례적인 주의를 기둘였다. 항공군의 정찰 전력은  전선군 참모들의 계획에 따라 공세가 개시된 지 40일 동안 적 종심 400~500Km 일대의 수색과 항공 사진 촬영을 수행했다. 적 방어의 최전선은 특별히 7회나 촬영했다. 소비에트 정찰기들이 촬영한 항공 사진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212,797Km 에 이르렀으며 같은 시기 영국군의 정찰 사진들보다 1.6배 더 길었다.

 

공군의 전투 작전 준비에서 주요한 문제 중 하나는 지상 병과들과의 조율 조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령부의 도상 연습과 훈련이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는 항공군의 지휘관들과 참모들을 모아 도상 연습을 하고 항공 작전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44년 12월에 항공군 사령관들이 각 군단장 및 사단장들과 참모들을 모아 수행한 도상 연습에서 완벽성을 보였다. 

 

항공군 참모들은 지상군에 대치된 공군 사령부 대리들과 공군 관측소 훈련에 주의를 기울였다. 병력 훈련은 서로 지원하게 되 있는 공군 부대와의 공조로 수행했다. 지상 공격기와 폭격기들은 전투기와의 합동 교전을 훈련했다.

 

젊고 겨험이 부족한 조종사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이 쏠렸다. 제16 항공군은 1944년 12월의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들과 지상 공격기 조종사들이 모인 부서를 조직했다. 조종사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앞으로 있을 작전에서의 전투와 지상군과의 공조 방법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토론을 벌였다. 모인 조종사들은 총 110명으로 전부 에이스였으며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은 18명이었다. 지상 공격기 조종사들은 급강하 폭격 기수을 토론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작전 지점을 연두했고 선두 집단들은 이미 최전선 상황에 익숙해졌다.

 

항공기들은 재집결 계획에 맞춰서 공세 지작 하루에서 둘째 전날에 전방 비행장에 집결했다. 작전 준비 기간 동안 광범위한 당의 정치 교육이 조종사들과 지상 요원들에게 강력한 투지를 불어 넣었다. 작전 전날에 모든 조종사들은 지상 요원들은 군사 위원회에 출석해 나치에게 노예가 된 폴란드 인민들을 해방시키겠다고 맹세했다. 

 

항공 작전 과정이 보여주듯이, 준비 기간에 수행한 방법들은 작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항공 준비 수행 가능성은 나쁜 기상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서 제2 항공군은 2030회를 출격할 수 밖에 없었다.4 이런 악천후에서는 조종사들의 기량과 훈련도가 중요했다. 

 

공세 첫날이 끝나갈 때 400대 내외의 지상 공격기와 폭격기들은 소편대를 이루거나 개별적으로 낮게 깔린 구름 속을 비행해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키엘체와 치미에니크에서 움직이는 적을 공습했다. 적은 이 공습으로 심한 손실을 입었다. 저녁에 적 기갑 군단의 진격이 멈춰 섰다. 다음날 낮에는 제4 폭격기 군단과 제2 대지 항공 군단이 전투기들의 엄호 하에 키엘체 남쪽에서 치미엘니크 북쪽으로 기동해 아군 제4 근위 전차군의 측면을 공격하려는 적을 공격해 전차 50대와 차량 400대를 파괴했다.5 적 예비대에 대한 소비에트 조종사들의 지속적인 공습은 아군 지상군이 급격한 속도로 적 제1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2 방어선에 도달해 니다 강을 도하하고 중단 없이 진격해 키엘체 남쪽에서 치미엘니크 북쪽 일대의 적의 작전술적 예비 4개 사단을 포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적 병력이 후퇴하자 소비에트 항공기들은 적이 제3 방어선을 구축하는 걸 차단하는 임무를 받았다. 지상 상황이 좋아지자 1월 16일과 1월 17일에는 전차군들이 원하는 만큼의 대대적인 항공 지원이 가능해져 4,000회 내외를 출격했다.6

 

가장 효과적인 공습은 나치 독일 제42 군단과 제10 차량화 사단이 스카르지스코-카미엔나에서 라돔스코로 철수하는 걸 포착해 습격한 것이다. 폭격기들과 지상 공격기들은 30대씩 조를 짜 후퇴하는 적을 돌아가면서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공세 이틀 동안 기상 상황이 너무 안좋아서 제16 항공군은 최고로 훈련받은 조종사들로만 276회를 출격시킬 수 밖에 없었다.7

 

1월 16일 새벽에 항공 정찰이 적의 후퇴 경로를 포착했다. 폭격기들과 지상 공격기들은 적 행군 종대를 파괴하고 도로와 철도를 통해 후퇴하던 적들을 주저앉혔다. 

 

지상군의 진격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자 전차 부대와 공군이 후퇴하는 적을 추격할 때 서로 공조가 어려워졌다. 전과가 확장될 때 항공군 지휘관들은 전차 군단 지휘부를 따라가며 자주 지상군과 통신망이 끊겼다. 이런 경우 공군 사단이나 연대가 하늘의 기체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려면 전차 부대의 무전기를 빌려 써야 했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으로 제4 전차 군단과 제3 근위 대지 항공 사단, 제16 전차 군단과 제300 대지 항공 사단이 1월 16~17일 사이에 통신선을 복구했다.

 

폭격기들, 지상 공격기들, 전투기들은 적 방어선, 화점 저항 거점을 돌파 집단의 전투 돌입 전에 공격했다. 이리하여 소비에트 군과 폴란드 인민군은 바르샤바를 해방시키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폴란드 인민군 제1 혼성 항공 사단의 399회 출격을 포함한 6,656회의 출격이 있었다. 1월 12~17일 사이 제16 항공군과 제2 항공군은 총 11,748회를 출격해 공중전에서 적기 44대를 격추시키고 86대를 비행장에서 파괴했다.8

 

소비에트 공군은 비슬라-오데르 작전의 두 번째 국면(1월 18일~2월 3일)에서 지상군의 높은 진격 속도를 보장했다. 소비에트 조종사들은 다양한 기상 상황 하에서도 곗혹해서 작전을 수행했다. 전방의 지상군과 공조하는 항공기들은 지상군이 적 저항을 뛰어넘고 중단없이 진격하게 도왔다. 적진을 급격히 돌파하고 적 후방으로 기동하는 선견대들은 공군의 엄호와 지원이 있어서 활약이 가능했다. 공군은 나치 군대가 후방에서 새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도 막았다. 

 

적 사령부가 자신들의 예비대를 화급히 서부 전선에서 동부 전선으로 옮겨 구멍난 전선을 막으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우리 공군은 전선에 도착한 적 에비대를 공격하고 적 기갑 부대를 산산조각냈다.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 군단이 이와 같은 운명에 떨어졌다. 우리 공군은 적 5개 보병 사단이 바르타 방아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후퇴하는 적 예비대를 상대한 전투를 분석하면 항공기들은 재빨리 적 위치를 파악해 먼저 공격을 가하고 행군로를 틀어막았다. 지상 전차 부대들은 공군이 휩쓸고 간 전장에서 적을 완전히 끝장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의 전훈은 전차군의 적 추격 속도가 하루 당 30~50Km 이상이었고 이런 급격한 진격 속도에서 공군과의 조정은 나쁜 기상 상황 떄문에 항공기들이 새 비행장으로 이동하기가 힘들어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전선군 사령부, 전차군 사령부, 항공군 사령부는 전선 항공기들을 재배치할 수단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적 작전술적 종심 안에 있는 적의 비행장들을 될수 있는 한 빠르게 확보한다는 방안이 나왔다.9

 

비행장 건설 대대들과 비행장 정비 대대들은 지상군 선견대의 엄호 하에 전방으로 이동했는데 이게 큰 효과를 냈다. 공군 지상 요원들이 진격하는 지상군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제16군 사령부는 항공기들을 과감히 기동시켰다. 예를 들면 제2 근위 전차군의 선견대 뒤에서 비행장 정비 대대가 보급 부대와 같이 트럭과 장갑차에 타고 이동해 전차 부대가 소샤체프 비행장을 확보한 후 재빨리 하차해 항공기 착륙 준비를 했다. 지상 요원들은 모두 무장했고 적의 공격에 비행장을 방어하는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1월 18일, 제402 전투기 연대가 소샤체프 비행장으로 이동할 동안 비행장 북서쪽의 마을에서는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지상 공격기들은 전투기들이 먼저 착륙한 후 뒤이어 착륙했다. 제2 근위 전차군 사령관 보그다노프 상장은 1개 전차 여단에 비행장 방어 임무를 맞겼다. 공군 지상 요원들이 브리에젠 비행장을 기습해 비행장을 점령한 경우도 있었다.10

 

같은 시기, 작전의 마지막 시기에서 공군 사령부가 적 항공기와의 계속되는 투쟁을 무시하고 아군의 제공권 장악 상황을 과신해 전투기들을 적 지상군 파괴에 지나치게 할당한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비에트 군이 나치 독일의 본토에 도착했을 때, 특히 오데르 강에 이르렀을 때 제1 벨로루시 전선군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요 항공 전력을 몇 안되는 영구 비행장에 집결시켰고 활동을 급격히 늘렸다. 더 후방에 있던 공군 제대들은 항공 우세를 유지하고 지상군을 엄호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후방 비행장에서 전투 지점까지는 200km에 가까워 전투 효율을 떨어트렸다. 항공 초계 시간의 감소와 결과적인 출격 횟수 감소는 거의 경보 단계였다. 게다가 확보한 비행장은 정비하기에 시간이 걸려 작전 효율을 떨어트렸다. 이런 이유로 적 공군은 작전의 마지막 국면에서 일시적으로 하늘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항공군 사령부가 내린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임시 비행장으로 만든다는 결정은 중요했다. Ye. Ya. 사비츠키 중장의 전투기 군단은 최초로 포크리시킨 대령의 항공 사단이 브레슬라우-베를린 고속도로에 착륙할 동안 포즈난 고속도로에 다른 사단들의 착륙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항공 작전 문제의 새로운 현상이었던 고속도로와 점령한 적 비행장을 이용한 착륙 장소 확보는 소비에트 공군이 단기간에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 걸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공군 지휘부 조직과 지상군과의 공조는 급격히 진격하는 지상군을 공군이 엄호하고 지원하는 걸 보장했다. 이것은 모든 공군 제대 지휘소와 관측소가 제병협동군 지휘소에 위치하고 전선군 기동 집단 지휘소에는 공군 제대 대리들과 항공 사단 참모들이 2~3개 작전 집단들 만들어 적지 종심까지 지상군을 따라가 지상군과 공군의 조율을 담당하게 했다. 

 

지휘소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통신선 유지는 SCR-399 무전기를 통해 이루었다. 특별 부대가 중앙 통신소를 경비하고 공습에 대비했다. 게다가 최초로 특별히 지정된 초계기가 지휘 통제를 중계하며 통신망을 넓혔다. 

 

제16 항공군과 제2 항공군의 비슬라-오데르 작전 참여를 그 크기에서 보면 작전의 환경과 그 결과는 지휘 기술의 증가와 소비에트 기체의 기술적 우위의 기술적인 사용의 예가 되었다. 1월 12일에서 2월 3일 동안 두 항공군은 25,400회 출격을 달성했고 214회의 항공전으로 적기 209대를 격추했다.11

 

공군의 작전술은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진격하는 지상군을 엄호하며 지상군과 공조하고 적 깊은 종심으로 급격히 진행되는 작전의 통제에서 새로운 단계를 밟았다. 이 단계는 초기에 거둔 항공 우세가 적기 격추 및 지상에서의 파괴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를 진격하는 지상군의 임무와 작전 단계에 맞춘 운용, 지상군 전투 지역에서의 화력 투사로 달성한 것이었다. 폭격기들과 지상 공격기들의 기본적인 효과는 적 예비대 손실, 후퇴하는 적 타격을 통한 방어선 구축 방지, 적 역습 경로 확인과 강력히 요새화된 적 특화점 파괴였다. 전투기들은 기동 집단에 항공 엄호를 수행했다. 

 

진격하는 지상군에 뒤에 항공기들을 재배치하고 전투 전에 근접한 곳에 임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보급선을 확보하며 적의 비행장을 확보해 사용하고 아우토반을 임시 비행장으로 개조하고 공군 지상 요원들을 진격하는 전차 부대에 붙여 적 비행장을 점령, 확보하게 한 것은 중대했다. 지상에서 항공기들을 지속적으로 쥐하하는 작전 집단은 그 배치된 종심에 따라 임무의 중요도가 달라졌으며 무전 설비의 광빔위한 사용으로 지상군과 공군의 작전을 상호 조율하고 통신을 유지했다.

 

공군과 지상군의 공조에 신중한 조직은 합동 지휘 도상 연습과 지상군 지휘부에 공군 대리 파견, 전차군 사령부에 공군 사단 지휘소와 관측소의 설치는 전투기들과 지상 공격기들이 작전 기간 동안 가장 결정적인 임무 수행에 명령을 내렸고 피아식별 암호, 공습 목표 지정, 항공 교통 통제를 수행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의 항공 지원은 적지 종심에서의 급격한 속도로 수행하는 지상군과 공군의 공조에 큰 전훈이 되었다. 


  1. "Sovetskaya Voyennaya Entsiklopediya," vol 2, 1976, p 147.
  2. "Operatsii Sovetskikh Vooruzhennykh...," vol IV, 1959, pp 103, 104.
  3. TsAMO SSSR [Central Archives of the USSR Minsitry of Defense], folio 236, inv. 2712, file 337, sheet 108.
  4. Ibid., folio 233, inv. 2356, file 449, sheets 30, 34.
  5. "Sovetskaya Voyenno-Vozdushnyye Sily v Velikoy Otechestvennoy voyne 1941-1945" [The Soviet Air Forces in the Great Patriotic War of 1941-1945], Moscow, Voyenizdat, 1968, p 369.
  6. Ibid., p 370.
  7. TsAMO, folio 233, inv. 2356, file 449, sheets 30, 34.
  8. "Sovetskiye Voyenno-Vozdushnyye...," p 377.
  9. Ibid., p 378.
  10. S. I. Rudenko, "Kryl'ya Pobedy" [The Wings of Victory], Moscow, Voyenizdat, 1976, p 296.
  11. "Istoriya vtoroy mirovoy...," vol 10,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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