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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 챕터 3 : 베를린은 언제나 흐림 -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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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A와의 비상 연락망이 연결되어있는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면서 글라디쉐프는 아주 잠깐동안, 처음으로 CIA 일을 시작했던 무렵을 회상했다. 스물 일곱살 때의 일이다. GSFG 스테이션의 담당관은 이제 갓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못 미더울땐 일감을 주지도 않았다. 정보를 어떻게 빼 왔더라.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는데, 사령부 내부의 정기 인사이동 소식을 전달해 준 것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만 하면 되는거야.” 담당관 겸 바텐더의 말은 곧 그가 자신에게 되뇌이던 말이기도 했다. 4년동안,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군생활을 두 번은 할 시간을 그런 일에 종사했다. 겉보기엔 전혀 공산주의를 싫어할 이유가 없는 성장배경을 가진 자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는 길다면 긴 수 년간의 세월이 조금씩 조금씩 퇴적되고 정보가 파뭍인 지층을 형성하여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허물어 질 위기에 처 해 있었다.

 

  “둘 다 연락이 안된다구요?” 

 

  글라디쉐프 소령은 당황했다. 특히 CIA쪽에서 한 명이라도 생포됐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변에도 위기가 온다. 뭣하러 외교적 관례조차도 무시하고 신분이 보장된 화이트를 생포하려고 하겠는가, 내부의 쥐새끼를 색출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중 하나일 것 이다.

 

  [ - 정보는 정확했어. 그런데 말이야… 타이밍이 굉장히 안 좋았지 뭐야. 베를린여단의 S2에 전달까진 제대로 됐는데, 이미 알고 있더군.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어.]

 

  아까 전에 통화를 하던 중, 수화기 너머의 CIA에서 전해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기관원들을 노린 소련 특작부대의 HVT확보 작전 정보가 도착한 시점에서 이미 해당 작전들은 실행중이었다는 것이다. NSA 화이트 1명이 실려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등급 일반인 소개 컨보이는 이미 기습당해서 신병확보까지 이뤄진 뒤였고, CIA와 NSA의 주 인력들 역시 기습을 당해서 추격을 당하는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호송조 지휘관이나 기타 엄호병력들과 연락이 끊긴지는 오래이고, CIA 호송을 담당하던 차량조차도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 그가 접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 - 이봐, GRU ‘동지’. 난 자네를 믿고 있어. 그런데 계속 이런 식이면 내가 믿어줘도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할거야.]

 

  말 안해도 스스로 위험을 인지하고 있다. 이중간첩은 속여야 하는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 약간의 실제 정보를 조금은 내어주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을 법 한’, 혹은 ‘실제로는 새어나가도 이쪽에 별로 손해가 안 가는’ 정보를 쥐어줘서 신뢰를 사는 정도는 탐정소설 몇 권만 읽어도 누구나 생각할 법 한 테크닉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글라디쉐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기묘하게 그가 미국인들에게 의심  사기 좋은 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독소련군이 무언가 작전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탐지했지만 그것이 어떤 작전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는 넘겨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정보는 미국인들의 상황 오판에 큰 기여를 했고, 서방측은 적어도 유럽 전구 내에선 완벽한 기습을 허용한 셈이 되었다.

 

  내부 정보와 군 이동 동향을 토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을 미국 정보기관들이 벙 쪄 있을 무렵, 그가 건네준 또 다른 정보들 역시 정확했지만 결과적으로 쓸모 없었다. 이미 엎질러 진 물이니까.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는가. ‘실은 저것이 소련에서 아측에게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 심어둔 쥐새끼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통화를 마치고, 개인실을 나와서 흡연실로 향했다. 일단 니코틴이 들어가야 머리 속이 정리가 될 것 같다. 지난 수 년 동안 남들을 속이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감당하기 힘들게 느껴졌다. 아마추어처럼 이러지 말자. 일단 머리 속을 정리하고, 계획을 짜야 한다. 

 

  첫 담배를 물 때엔 아직도 불안감이 여전했다. KGB 특전팀이 일을 성공시켜서 기관원을 한 명이라도 생포한다면? 설령 NSA에서만 포로가 나왔다 하더라도, GSFG 내에 미국인들이 ‘빨대’를 꽂아 두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다. 미리 도망칠 준비도 해야한다.

 

  그러나 이쪽 혼자서 튀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내부 방첩기능은 자신의 표면상 조국인 소비에트 연방을 능가하는 것으로 악명높은 나라가 바로 이 빌어먹을 독일 민주 공화국이다. KGB와 슈타지가 손에 손잡고 독일 땅을 뒤져서 신상 파악이 확실하게 끝난 소련군 장교 한 사람을 못 찾을까? 단순히 숨어 다니는 식이라면 길어야 이틀 안에 잡힌다.

 

  결국 도망쳐 나올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한 도주 루트를 마련해주고 안전지대로 빼내 줄 미국인들이 나를 불신한다면? 글라디쉐프 소령이 심란한 것은 단순한 미국인들의 불신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이 나라에서 이중간첩의 최후가 어떤지는 본인이 더 잘 안다.

 

  흡연실에서 나왔을 무렵엔 다소 생각이 정리되어 있었다. 마지막 찬스가 있을 것이다.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행운도 필요하다. 행운은 자신의 팔자소관에 따라 갈리겠지만, 정보는 자신 있다. 의심하는 것은 미국인들이지, 이 망할 빨갱이들은 나를 의심한다는 개념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 여기까지 생각하며 문고리를 돌린 것이다.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머리 속은 복잡했다. 흡연실에 들어 갈 때에 비해 이정표가 며 가지 더 선 것에 불과하니까. 일단 그 이정표를 찾은 것에 감사했다. 이정표에 만족하긴 아직 이르다. 글라디쉐프의 심층심리 속에서, 그는 이정표를 따라 길을 걷다 다시 갈림길에 마주쳤다. 멈칫 했지만, 다시 금방 길을 찾았다. 인생 별거 있나. 실패하더라도 머리에 9밀리 권총탄을 박을 여유는 있겠지. 쫄면 될 일도 안 된다.

 

  벌컥, 문고리를 열어젖히자 익숙한 얼굴들이 자신에게 경례를 붙이고 살갑게 한마디 한다.

 

  “통신장교 노릇은 할 만 하십니까?”

 

  “평소엔 한가했는데, 전쟁 터지니까 거기도 바빠. 역시 여기가 내 마음의 고향이야. 일은 바쁘고, 배는 아프고, 스트레스성 장염이라도 왔나, 이따 내과 군의관 좀 봐야겠어.”

 

  “쓸만한 시긴트는 좀 나왔어요?”

 

  “아니, 별 거 없어. 그러니까 거기 대머리 아저씨도 나보고 볼일 보라고 여기 보내준거겠지. 여기는 별 거 있냐?”

 

  “소식은 있는데, 썩 좋지 못합니다.” 샤프한 인상의 정보국 상위녀석의 이야기에 그는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아 뭐야 이번엔. 일단 들어나 보자.  

 

  “KGB 애들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처절하게 실패했어요.” 두통이 잠깐이나마 말끔하게 가셨다.  그냥 망친 수준이 아니면 생포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인가? 이제 사령부 내의 쥐새끼에 대한 이야기를 불 사람은 아무도 기대 안했던 군 특작팀의  급조된 기습으로 건진 NSA의 화이트 한명으로 줄었다는 이야기인가? 비릿한 미소를 찰나의 순간조차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며, 직업적으로 표정을 자연스럽게 찌푸리면서, “제기럴, 자세히 얘기해 봐.”

 

  “처음엔 순조로웠는데, 밀착 경호하고 있던 미제 특작부대놈들이 냄새를 맡았답니다. 차량 추격전이 한참 벌어졌는데, 연쇄 교통사고가 몇번이고 벌어진 모양입니다. 그지경이 돼도 도망칠놈은 도망치고, 그러니까 이쪽도 쫒아가고. 아군 사상자 카운트하면 총 맞은 사람보다 교통사고로 나온 사상자가 몇배는 된답니다.”

 

  “표적은 어떻게 됐어?” KGB 잔챙이들이 어떻게 죽고 다쳤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국인 기관원들이 무사한가이다.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처음의 말을 새삼 상기하며 약간 기대했다. 모두 다 탈출했길 바라며.

 

  “CIA 표적들은 다 죽었대요. 교통사고에 휘말린 모양입니다. 유조차랑 부딫히는 바람에 통채로 불덩이가 됐답니다. NSA 표적은 거의 잡을 뻔 했는데… 그 년을 태운 차도 교통사고로 멈춰서 바로 생포하기만 하면 되는건데, 멍청한 놈들이 하차해서 도망치는 놈들과 교전중에 쏴버린 모양입니다. 놈들 증원병력이 오는 바람에 생사는 제대로 확인 못 하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는데, 결국 한 놈도 못 잡은건 변함 없죠. 대차게 말아먹었습니다.”

 

  “허허, 참. 애석하게 됐군. 상대가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야. 델타에 그린베레…….”

 

  “기대도 안 했던 녀석들이 한 명이라도 잡아 주었기에 망정이지 뭡니까.”

 

  그래, 그 새끼가 문제였지. 일단 저쪽은 누가 죽었건 살았건 관심 없다. 아무도 이쪽에서 손에 못 넣었으면 그걸로 된거다. 복 받으시오, 미군 특수부대 동지들. 그대들의 조국에 대한 헌신덕분에 내가 잠시나마 한숨 덜었소. 그 한놈은 내가 어떻게든 처리해 보리다. 신뢰도 회복하고, 내 명줄도 챙기고.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 좋은게 좋은거다. 에헤라디야.

 

  “그러게 말이야. 그 놈은 잘 있대?”

 

  “슈타지의 안가에서 그 복덩이들이랑 잘 지내고 있답니다. 시간상으로 보아, 독일 동무들의  40공수가 전투강하를 시작했을겁니다. 강하지점만 제대로 확보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죠. 헬기편으로 바로 압송해오면 끝입니다. 한 두 세시간 걸리지 않을까요?”

 

  “DZ랑 가까운데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거. KGB 친구들이 일을 대차게 말아먹어서 그런가, 영 불안해.” 

 

  “조금 멀긴 한데,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기 보이시죠? 크게 멀리 떨어진 데는 아니에요.”

 

  그렇게 그는 알고 싶은 것을 확인했다. 다른 때 같으면 의심을 완벽하게 피하기 위해 사담을 10분정도는 더 늘어놓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들어 오자 마자 던진 급조된 알리바이를 그들이 납득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퍽 안심되는데, 뱃속에서도 3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네. 화장실좀 들렀다가, 사무실좀 들렀다 다시 올께.”

 

  “일 천천히 보십쇼. 일 있으면 호출기로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가, 누가 봐도 납득할 시간 동안만 죽치고 다시 나와 개인실로 기어들어갔다. 방문을 잠그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11장의 도입부로 돌아왔다. 이번엔 제발 늦지 말아야 한다. 신인지 운명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가 글라디쉐프에게 준 마지막 기회. 

 

  그것이 수십억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런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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